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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농촌의 사회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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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농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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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武科)를 거쳐 무관으로 임용된 가계를 이르는 말이다. 이 양반들이 가세가 기울어 농촌으로 낙향(落鄕)하면 보통 이를 향반(鄕班)이라고 부 른다. 이 양반 중에서도 차등이 있어 가장 존중을 받는 가계는 유림(儒 林)의 가계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시대라서 같은 삼정승 의 가계라도 문관으로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 출신의 가계 가 더욱 존중되었다. 다음으로 유림 버금가는 가계는 왕족의 먼 후예나 국가에 유공한 훈족(勳族), 그리고 충신열사의 후손들이다. 그 다음이 문 무백관 등 권귀(權貴)의 가계들이다. 이들 세 종류의 양반들은 농촌사회 에서 서로들 간에 잘 알려져 있어 누구네가 어째서 으뜸가는 양반인지를 소상히들 알고 있다. 이들 향반들도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개중에는 넓 은 농지를 소유하는 지주(地主)들이 있어 이들을 서울에 사는 부재지주 와 대칭되는 재촌지주라고 이른다.

이들 이외에 자신들은 양반 또는 향반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존중받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본래 존중받던 양반 가계이지만 농촌에 낙향한지 오 래되고 일정한 곳에 대대로 모여 살면서 벼슬길이 막힌 가계로 통상 농민 으로만 인정받는 계층들이다. 향반들은 언어동작이 신중하며 큰 소리 치 는 것을 꺼리고 출입 시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걸음걸이도 느리고 반듯하 다. 이들은 농촌사회의 의사결정에 크게 영향하는 잠재 지도층이다.

둘째는 중인(中人) 계급이다. 양반과 평민사이에 존재하는 계급으로 이 중인계급에도 구별이 있어 내의원(內醫院)이나 전의감(典醫監), 관상 감(觀象監), 사역원(司譯院) 등에 봉직하던 기술직(전문직)들이나 그 가 계가 중인 중에서는 보다 우월하게 존중되었다. 기술직들은 경국대전의 정원(定員) 규정에도 정3품(正三品) 이상의 품계에 오를 수 없도록 규정 되어 있다. 당상관(堂上官)과 당하관(堂下官)의 구별은 같은 정3품이라도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은 당상관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는 당하 관이다. 인사규정상 기술직(전문직)들은 당하관인 정6품직이 승진 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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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다. 그래서 중인인 것이고 과거(科擧)도 잡과(雜科) 급제자들을 이르 는 말이다.

서울에서는 북촌에 문관, 남산 밑에 무관이 살고 중인들은 그 중간지 점인 청계천 수표교 언저리가 주거지였다. 이 중인 중에서 버금가는 중 인은 사자관(寫字官)이나 도화서(圖畵署)의 화공(畵工), 장원서(掌苑署)의 신화(愼花) 등 종6품직 이하의 가계들이다. 농촌에서는 이와 유사한 부 류가 한의(漢醫)들이며, 오늘날의 수의사(獸醫師)인 마의(馬醫)나 우의(牛 醫)들은 한의 보다도 더 낮은 중인이었다.

농촌에서 한의 못지않게 존중되는 직종이 풍수(風水)들이다. 풍수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로 명당(明堂)인 음택(陰宅)을 잡아주는 직 종이다. 농촌에서는 숭조(崇祖)관념이 강하여 좋은 곳에 조상을 안장코 자 하는 열망이 넘쳐 이를 잡아주는 사람을 지관(地官) 또는 지사(地師) 라고 높임말로 부르기도 한다. 이 지사들은 양택인 집터를 고르거나 방 위, 택일 등의 일을 겸하기도 한다. 양반이나 향반에 속하지 않으면서 평 민보다는 좀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회계층이 양반이나 향반의 서자(庶 子)가계이다. 정실부인 소생이 아닌 까닭으로 경국대전 이전(夷典)조에 도 한품서용(限品敍用)조에 해당하는 부류들로 관리에 등용되더라도 5 품 이하에 임용되는 가계들이다. 이들도 중인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셋째 계층은 평민 또는 상민(常民)계층이다. 농촌사회 구성원 중 압도 적으로 많은 인구를 점유하고 있는 게 이 평민들이다. 이 평민계층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가장 우선된 부류는 금위영(禁衛營)이나 어영청(御營 廳), 그리고 훈련도감(訓練都監) 등에 근무하던 각급 장교의 가계로 속칭 한량(閑良)이라고 부르는 부류다. 또 각급 관청의 아전(衙前)들의 가계가 이에 버금가는데 고을 원(員)님을 보조하는 이방(夷房), 호방(戶房) 출신 등 육방관속(六房官屬)이 이에 해당한다. 또 면(面)마다 한사람씩 두어 농사를 지도하였던 오늘날 면장의 전신인 권농관(勸農官)과 서당의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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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리고 마을의 이정(里正) 등도 이에 속한다.

가장 인구가 많은 농민들은 평민들의 주류를 이루고 의식주의 원료 생산을 담당하며 명절이나 절식(節食) 등 각종 농촌풍속의 보존자들이기 도 하다. 이 농민들 중 지주(地主)나 자작농(自作農)층은 소작농(小作農) 이나 농업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농민보다 우월하였다. 광작하는 대농 은 농업노동자를 고용하는데 주인집에 상주하는 농업노동자를 머슴이라 하고 단기간 고용하는 노동자를 달머슴이라 하였으며 이들에게 주는 노 임을 품삯이라 하였는데 이 머슴들은 하대 받는 종과는 구별된다. 또 공 인(工人)들은 각종 건축을 전담하는 대목장(大木匠) 그리고 각종 가구(家 具) 등을 제작하는 소목장(小木匠) 등이 있다. 또 농기구들을 제작하는 철공(鐵工)과 금은세공(金銀細工)을 담당하거나 말총으로 갓(笠)을 제작 하는 전문직들과 흙을 빚어 질그릇을 만드는 도공(陶工)들이 있는데 이 들 전문직들 중 가장 노련한 사람을 장인(匠人)이라고 부른다. 평민 중 순서가 가장 처진 계층이 각종 물품을 사고파는 상민(商民)인데 일정한 곳에 상점을 차린 상인을 좌가(座賈)라 하고 상품을 지고 이 장(場) 저 장 을 왕래하거나 마을을 찾아다니는 상민들을 보부상(褓負商)이라고 한다.

상인 상호간에는 상부상조하는 협동심과 자기들끼리의 응집력이 강한 편이다.

넷째로 천민(賤民)계급으로 사회계층의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 다. 노비(奴婢), 재인(才人 배우), 무격(巫覡 무당과 박수), 백정(白丁 도축 업, 식육상)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천민계급의 연원에 대해 정약용(丁若 鏞)은 그가 저술한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고려시대 이래의 떠돌이(浮浪 族)인 양수척(楊水尺)의 후계자들이라 하였다. 양수척은 우리말로 “무자 리”라고도 이른다. 그렇다면 양수척이란 어떤 존재였던가?

고려사열전(列傳)의 최충헌(崔忠獻)전에는 “양수척이란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제압하기 어려웠던 부족의 후손들로 본래 호적이나 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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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의무도 없이 수초(水草)를 따라 옮겨 다니며 수렵이나 유기(柳器 고리 등) 제작, 그리고 죽(粥)장사 등을 업으로 삼고 무릇 기생들은 이 유기장 (柳器匠)에서 나온다.”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백제의 유민이라기 보다 북방 대륙에서 온 이민족인 것 같다. 세종 29년(1447) 2월 계미일의 세 종실록을 보면 달단화척(韃靼禾尺)이란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달단은 본시 동몽고에 살던 유목민 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우리나라에 흘러와 고려시대에 양수척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백정(白丁)인 화척(禾尺)계 와 재주놀음을 업으로 하는 재인(才人)계로 나뉘었다고 한다.

화척계는 도축업이나 식육상 경영을 하는 백정과 유지(油脂) 채취로 양초 생산에 종사하거나 피혁 가공으로 가죽신을 만드는 “갓바치”, 그리 고 버들가지를 엮어 고리나 키(箕)를 만들기도 하고 말총으로 체(篩)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재인계는 줄타기, 말 위에서 재주놀음, 노래와 춤을 파는 남사당(男寺党)패가 대표적이다.

천인계층에 그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종(奴婢) 들이다. 노비에는 관(官) 노비와 사(私)노비가 있다. 관노비는 역적이나 국사범 등 큰 죄인으로 관 아(官衙)의 잡된 일을 담당하였고 사노비는 “종”이라 하여 주인이나 상 전(上典)의 명에 따라 농사나 가사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빈곤으로 몸을 팔아 종이 된 것으로 일체의 자유가 없이 주인의 사정에 따라 타인에게 매매되기도 하였다.

천인에 무당과 박수가 있다. 여자를 “무당(巫)”, 남자를 “박수(覡)”라 하는데 각종 질병이나 액운을 비는 고사(告祀)때 기원행사를 전담하고 그 보수로 생계를 꾸리는 사회 계층이다. 한때 궁중에서조차 이들을 불 러다 굿을 할 정도로 조선사회는 무당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조 선사회는 마을마다 한두 명의 무당이 생계를 꾸릴 수 있을 정도로 기원 행사의 기회가 많았다.

이들 천인들은 사회에서 천대받는 대신 자기들끼리의 결속력은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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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강하였다. 이들 천민들은 갓이나 탕건(宕巾) 등을 쓸 수 없고 대나무 를 오려 만든 패랭이(平凉笠)를 써야 했다. 통혼(通婚)이나 거주지도 자 기들끼리 하거나 모여 살았다. 따라서 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상층계급과 격리된 존재들이다.

이러한 사회계층의 존재는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국가발전에 어떤 영 향을 미쳤을까?

그것은 첫째로 국민통합에 반하는 사회적 저해요인이 되었다. 계층 간의 상호 반감, 질시, 증오 또는 천시의 관행적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 다. 능력에 의한 신분상승의 기회가 박탈되고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도 입신양명의 기회가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경제발전에 큰 저해요인이 되었다. 산업발전은 기술발전이 필수 조건인데 그 기술발전을 필요로 하는 각종산업을 평민이나 천민이 담당하다 보니 사람을 천시하는 습성이 그들이 담당한 산업까지 천시하 게 되자 천대받는 산업의 생산기술이나 관리기술마저 발전시킬 의욕까 지 송두리째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각급의 사회계층은 국가발 전의 저해요인일 뿐 긍정적 요인을 찾아볼 수 없는 악폐였다.

이 악폐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사민평등(四民 平等)의 기치아래 모든 국민은 평등하고 노비제도의 폐지와 인신매매를 금하면서부터였다. 계급타파의 능동적 주류는 가장 천대받던 백정들이 다. 1923년 진주에서 설립한 형평사(衡平社)가 계급타파를 선도하던 조 직이고 현대방(懸大房)이라는 그들만의 장학재단이 설립되어 인재육성 에 힘쓰면서였다. 형평사는 백정들의 신분상승을 위한 정치적 투쟁을 목 적으로 일본의 수평사(水平社) 운동에 자극받아 창립된 정치결사체였으 나 관헌의 탄압을 받자 1936년 대동사(大同社)로 바꾸어 피혁(皮革)회사 를 만들어 그들의 복리증진에 힘썼다. 또 식육상 경영자들끼리 전국을 망라한 축산기업조합을 설립하여 신분상승과 계급타파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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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에는 민주화 바람이 계급타파에 부채질을 하였다. 예컨대 5.16 후 혁명군부가 그들의 결속력을 득표수단으로 이용코자 전국구 의 원을 미끼로 축산기업조합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손, 사돈의 팔촌까지 수백만 표를 득표수단으로 연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사당패는 오늘날 극단이나 배우, 가수 등 인기 직종으 로 발전하였고 백정인 식육상은 기업인으로 발전하여 조선일보 2021년 3월1일자 7면의 전면광고를 보면 “갈비 먹고 힘내세요.” 하는 억대의 광 고까지 내는 재력가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최하 천민이 민주화시대의 최상층 귀족이 된 것이다. 계급타파의 결정적 시기는 1970년대 제3차5 개년계획이 추진되면서 도시공업의 발전으로 농촌인구가 줄면서 사람이 귀해지자 농촌의 사민평등은 완전히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 원고 작성에는 이우성의 ‘한인(閑人)과 백정(白丁)의 신해석(1962 역사학보)’, 이세영의 ‘19세기 농촌사회의 계급구조(1991 한신대 논문 집)’, 이태진의 ‘고려 말 조선 초의 사회변화(1982 역사학보)’, 이능화의

‘조선관노의 기원(1930 조선)’, 이와사끼(岩崎繼生)의 ‘조선의 백정(1932 조선)’, 다나까(田中德太郞)의 ‘조선의 사회계급(1921 조선)’, 하마나까 (濱中昇)의 ‘여말선초의 한량에 대하여(1967 조선)’ 등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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