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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장(牧羊場)이었던 경무대(청와대)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196-200)

지난 5월 10일 제20대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청와대가 국민들에게 활짝 개방되었다. 실로 74년 만의 개방이란다. 하루 3만 9천 명의 시민 이 6천 5백 명씩 6교대로 나누어 인기리에 관람하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는 그 면적이 백악관의 3배로 모두 25만 평방미터나 된다고 한 다. 면적만 넓을 뿐 아니라 대통령 집무실을 중심으로 관저, 비서실(여민 관), 영빈관, 상춘제, 춘추관, 안가, 기화요초로 조경된 정원의 수려한 경 관 등 여러 관련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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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북악산 아래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조불상(보물 1977호)이 있고 서 쪽 끝에는 왕비가 아닌 후궁의 신분으로 왕의 어머니가 된 인조, 경종(장 희빈), 영조의 어머니 등 모두 일곱 분의 후궁들 위패를 모신 칠궁(七宮) 이 있어 역사적 볼거리들도 있다. 앞으로 시설 내부까지 관람할 수 있다 면 볼거리는 더욱 다채로울 것이다.

이 청와대는 경복궁의 후원(後苑)으로 조선 건국이래 왕의 친경(親耕) 의식이나 왕비의 친잠(親蠶)의식의 장소로도 쓰였고, 과거시험의 장소로 도 쓰였으며, 군대의 연병장인 융무당(隆武堂)으로도 쓰였다. 1939년에 는 일제총독이 관저를 지어 쓰다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로 쓰여 왔다. 그 명칭은 본시 경(景)복궁을 호위한다는 뜻 의 경무대(景武臺) 였으나, 윤보선 대통령 때 청와대(靑瓦臺)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게제에 이 청와대가 경무대로 호칭되던 한말, 한 때 축산시험의 하나인 목양장(牧羊場)으로 이용된 사실을 밝혀 농업인의 참고에 자하고자 한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902년 2월 22일자, 수입목양(輸入牧羊)이라는 소제목의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국한문 혼용의 옛 용 어는 필자가 현대어로 바로잡음).

“조선신보에 근거한즉 수삼일전 연대(烟台)에서 인천항에 들어온 기 선 수전환(水田丸)에 양(羊) 9백여 두를 실어와 청인(淸人)이 운영하는 상 점 동순태(同順泰)에 가두었다가 엊그제 서울로 운송하였는데 이는 궁중 의 제사에 쓴다는 말이 있으나 일설에는 궁중사업으로 부평(富平)에서 기르기 위하여 도입하였다는 설도 있다더라.” 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황성신문은 광무 21년(1898) 윤치소(尹致昭)가 창간한 국한문 혼용의 주간신문이다. 연대라는 지명은 중국 산동반도의 항구명 으로 기록의 요지는 9백여 두의 양(羊 유산양 추정)을 이 연대에서 도입 하였는데 도입주체는 궁중(宮中)이다. 그 용도는 제수용이나 사육용이

제5장 시사를 통해 본 고사󰋸189

다. 사육용일 경우 사육장소가 부평으로 되어있는데 부평에서 기를 양을 서울까지 운송할 어리석음을 감안할 때 이는 아마도 오보일 것이다.

다시 황성신문 광무 6년(1902.7.17)의 급봉목양(給俸牧羊)이란 소제 목의 기사를 보면 “년전 궁내부(宮內府)에서 한 외국인을 목양교사(牧羊 敎師)로 초빙하였는데 월급은 매월 2백 원(元)이요, 목양장소는 경무대 안의 잠농소(蠶農所)로 쓰던 곳이다. 양 수백 두를 상해에서 도입하여 목 양 한다더니 최근에 들은즉 그 양들이 모두 스스로 병들어 죽자 그 교사 는 이를 변상하는 뜻에서 자기의 돈으로 양 수백 두를 다시 구입하여 기 르는데 그 양들은 극히 번성한다더라.” 하였다.

앞에 예시한 기사를 재해석하면 사업주체가 궁중에서 궁내부로 바뀌 었고 연대에서 도입한 9백여 두의 양은 모두 병사하고 다시 상해에서 목 양교사의 돈으로 수입한 수백 두는 경무대 내의 잠농소에서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뜻이다.

여기서 첫째로 의문인 것은 목양교사인 외국인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 는 것이다. 그 해답이 황성신문 광무 6년(1902) 9월 16일자의 목사상지 (牧師相持)라는 소제목의 다음과 같은 기사에 기록되어 있다.

“궁 내부에서 법국(法國 프랑스)사람 소특(蘇特 M.Schott)을 초빙하 여 농상소(農桑所)에서 양을 기른다는 것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현재 우리 조정에서 임금(고종) 등극(登極)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경례식 (慶禮式) 때 여러 나라 대사들을 초청하여 원유회(苑遊會)를 베푸는 장소 를 목장 안으로 정하자 소특씨가 인준하지 않으므로 외무부와 궁내부가 이 일을 다시 협의 중이라 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소특은 주한 프랑스 공사 갈림덕(葛林德 Collin de plancy)의 추천으로 1884년 5월 28일에 개장하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시험장,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의 후신인 종목국(種牧局) 의 책임기사(技師)로 초빙된 사람이다. 그를 추천한 프랑스 공사 갈림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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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1888년 6월 7일부터 3개년 간, 1896년 4월 7일부터 3개년 반, 1901년 5월 24일에서 4개년 반 등 모두 3회에 걸쳐 11개년 간 주한공 사로 재임하면서 한국 여인에게 장가 든 지한파 공사였다.

둘째로, 여기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소특이 일하던 종목국(種牧局) 의 내력을 약술코자 한다. 우리나라는 1882년 미국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자 주한 미국공사로 푸으트(Lucius Foote)가 부임해 왔다. 조선 조정은 그 답례로 1883년 보빙사(報聘使)라 이름하는 외교사절을 미국 에 파견하였다.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전권 대신으로 홍영식 등 8명의 수행 사절과 중국인, 일본인, 미국인 등 3명의 통역 포함 모두 11명이었 다. 이들은 미국에 도착 당시의 대통령 아더(Chester A. Arther)에게 신임장을 증정하고 그곳의 선진문물을 시찰하였다. 시찰과정에 가장 감 동적인 것은 그곳의 농사시험장인 시범농장(Model Farm)이었다. 팔뚝 만하게 영근 옥수수며, 인함박 같은 젖소의 큰 유방, 그리고 향기롭고 신 선한 채소 ‘셀러리’ 등이 탐났다.

사절들은 그해 연말에 귀국하여 고종에게 이를 고하고 우리도 이 같 은 시설을 하여 부국강병의 기초를 다지자고 건의하자 고종은 즉시 내탕 금을 내려 다음해인 1884년 5월 28일에 정식 개장한 것이 왕실직속의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시험장인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이었다.

초대장장은 보빙사의 일원이며 무관이었던 최경석(崔景錫)이었고 작 물시험은 용산구 청파동의 전답을 활용하고 축산시험은 성동구 자양동 의 왕실목마장을 활용하였다. 이곳은 본시 태종 때 지은 이궁(離宮)으로 현재 낙천정(樂天亭)이 남아있다.

그러나 불행히 1826년 최경석이 병사하자 시험장은 통리군국사무아 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농상사(農桑司) 소속으로 개편되면서 명칭도 종 목국(種牧局)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 통리군국사무아문은 당시 선진문 물 도입의 전담기구로 독일인 목린덕(穆麟德)이 협판(차관)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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