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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 농업의 고랭지채소와 직거래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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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이 안된 채 그 원고가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위원(韋 園)이나 위암(韋庵)은 장지연의 호(號)다. 농상공부대신의 위촉으로 1904년에 편찬한 농학신서(農學新書)의 특이한 내용을 요약하면 토성 (土性) 구별에서 중국식 화학기호를 표기하고 있어 일본의 신농서뿐 아 니라 중국의 신농서도 이책 편찬에 참고한 것 같다. 예컨대 산소(O2)를 양기(養氣), 수소(H2)를 경기(輕氣), 질소(N)를 담기(淡氣), 탄소(C)를 탄 기(炭氣)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제2권의 분저(糞苴)법은 각종 비료풀 이, 제3권은 밭갈이, 제4권에서 볍씨의 염수선(塩水選)이 처음으로 풀이 되고 있다. 제5권은 여러 곡식의 품종명, 제6~8권에 종예(種藝), 제9권 에 과수, 제10권에 식물총론, 제11권에 수확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위원화훼지」에는 국화, 치자화, 파초, 월계꽃, 옥잠화, 한연(旱蓮)화, 금계(錦葵)화, 채승(彩勝)화, 적앵(赤櫻)화(코스모스), 철단화(鐵團花) 등 10종의 꽃나무를 순한문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편찬년도는 미상하다. 또

「위암화원지」는 국한문 혼용으로 기록하되 화훼각론식으로 영춘화(迎春 化 개나리), 신이화(辛夷花 붓꽃), 산다화(山茶花 동백), 근화(槿花 무궁 화) 등 모두 169종의 화훼작물을 상하(上下) 2권으로 자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요컨대 이상에서 밝힌바와 같이 김가진은 농정분야에서, 장지연은 신 농서 편찬에서 개화기 우리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한 인사들이 확 실함을 그 근거를 들어 이에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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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하였다. 모두 130여 명이 분야별로 집필한 방대한 내용이다.

필자는 한국농업사학회를 대신하여 그 발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제11권까지는 우리농업의 정사(正史)를 수록하고 제12권에는 정사를 뒷 받침하는 숨은 비화(秘話)들을 수록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농업사를 연 구하다보면 대부분 그 서술 내용이 성과나 결과 위주로 풀이되어 있어 그 성과를 가져오기 위한 이면의 노력이나 경위가 생략된 게 보통이다.

그러나 필자의 행정 경험이나 농업사 연구과정을 되돌아보면 후진들 이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성과나 결과 못지않게 성과나 결과를 가 져온 이면의 과정이 더욱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 역사 학도나 후진들에겐 역사 지식의 핵심일 수도 있었다. 원인이 기술되어야 결과의 당위성이 더욱 확실하고 정당성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편찬된 제12권의 ‘농정비화’는 집필진이 모두 1960년 대 이후에 활동하던 분들이라 경험한 내용이 1980년대 전후의 현대농 정에 관한 비화들이다. 그러나 이 시기가 우리 농업과 식생활의 격변기 라고 할 정도의 전환기라서 후진들에겐 그 내용이 간절히 필요한 역사 지식일 수도 있었다. 이 제12권에는 모두 88개의 비화가 수록되어 있는 데 본고에서는 농산물의 유통과 관련된 두 편의 내용을 초록 검토함으로 서 그 내용이 전환기 농업의 상징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 까닭은 이 무렵 의 농정 중 농산물유통이 가장 뒤떨어진 분야였고 그로 인하여 농정의 변화과정을 가장 민감하게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후일 농촌진흥청장을 역임한 김영욱 씨의 ‘직거래장의 난립’이 란 소제목의 글을 초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김대중)선거가 끝나고 인수위원회가 본격 활동을 시작하였 다. 인수위원회 보고사항에 농산물 직거래대책이 우선순위에 올라있었 다. 대통령 당선자가 농산물의 유통개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유통단계를 축소하여 유통마진을 줄일 수 있는 직거래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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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라는 것이다. 직거래 실천계획을 마련 하여 일일보고체계를 갖추라는 지시도 있었다.

직거래 광풍이 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문민정부(김영삼) 초기에도 농산물의 직거래를 강력 추진하다가 유야무야 한 적이 있어 그때의 문제 점 분석과 외국의 사례 등 새로운 직거래방안을 마련하느라 유통정책국 은 경황이 없었다.

교수 출신의 김성훈 장관은 직거래와 유통개선에 직을 걸겠다고 공언 하면서 독려하였다. 특히 직거래법 제정을 추진하고 지방자치단체, 농‧

수‧축협의 금융점포와 같은 공적기관에 직거래 판매장을 개설하고 과천 정부종합청사에도 직거래장터를 개장하라고 하였다. 직거래 모델로 지 방자치단체가 부지를 제공하고 정부가 총괄 지원하며 농협이 운영하는 형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직거래의 법적장치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을 제정하기로 하고 법의 추진은 재경부에서 하기로 하였다. 직거래장터 개설은 공문 협조와 협의회를 통하여 촉구하고 현장점검을 하면서 장터 개소수를 늘리고 거래물량을 높이는데 주력하였다. 이러다보니 직거래 장터가 난립하게 되었고 비효율적이고 경제적 효과도 떨어진다는 부작 용이 나타났다.

과천청사 직거래장터는 과천시청 앞 공터를 이용하고 운영은 과천농협 이 하되, 총괄 연출은 농림부가 하는 형태로 1998년 4월 17일 개장되었 다. 장터 운영과정에서 유통마진이 줄고 판매가가 시장보다 낫다는 장점 이 있으나 투입비용을 감안하면 효율성과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나타났다. 곳곳에서 직거래장터가 이벤트 식으로 운영됨에 따라 부작용 이 부각되기 시작하였고 직거래 모델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제기되었 다……중략……

직거래의 한계와 역기능을 알면서도 이를 제기하지 못하고 밀어붙임 으로서 시행착오를 해온 공직자의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직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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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에 관하여 자문하고 조언할 유통전문가들 역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점은 비난 받아야 한다……중략……

그 많던 직거래장터는 현재 다 어디로 갔나?……중략……직거래장터 를 이용하던 생산-소비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팔고 사고 있나?”라고 기 록하고 있다.

이 비화는 김대중 정권 직후 직거래장 실패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농산물의 유통은 생산, 수집출하, 도매, 소매, 소비 등 여러 단계를 거치 는 게 통상이다.

김 대통령은 그 과정의 일부를 거치지 않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막바 로 연결하여 유통비용을 축소함으로서 생산자 및 소비자를 동시에 보호 코자 직거래장을 구상한 것이다. 이 직거래 구상을 촉발시킨 것은 그 무 렵 생산자와 소비자 가격의 차이가 어떤 농산물보다도 가장 컸던 한여름 의 고랭지채소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유통비용이 여러 단계에 걸친 중간상인의 폭리 때 문이 아니라 유통 비용이 실제로 많이 든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지 않았 다. 그런 까닭으로 농림부도 대통령의 정책대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겠 지만 김영욱이 밝힌 대로 직거래장의 경험을 통해 그 역기능이나 유통실 비가 많이 든다는 사실을 알은 후라도 이를 밝히는 과정에서 자칫 항명 으로 오해받을까 두려워 직거래의 역기능이나 불합리함을 직언하기 어 려웠지 않았나 여겨지기도 한다.

이제 김성훈 장관 후임이었던 故 김동태 장관의 농정비화로 ‘농수산물 유통 현장체험’이란 제목의 글을 초록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농림부에 근무하는 동안 수출과장, 무역과장, 시장과장, 농산물 유통국장, 축산국장 등 유통정책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였다……중 략……고랭지에서 생산되는 여름배추의 경우, 언론에서 연일 산지에서 배추가 헐값인데 소비지에서는 중간상인들의 폭리로 몇 배나 비싼 값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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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사먹어야 한다고 앞다투어 보도하였다. 여론이 비등하자 감사원에서 는 농림담당 감사관이 대관령에 가서 고랭지 배추의 수확과 상차(上車) 과정을 점검하고 허름한 런닝 차림으로 대관령에서 용산 청과시장까지 배추를 적재한 트럭을 타고 고랭지배추의 유통경로와 유통마진을 조사 한 사실이 있다.

그 감사관은 작업이 어려운 경사지에서 배추를 수확하고 적재하는 과 정에서 여러 가지 발생하는 비용 뿐 아니라 대관령에서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 비공식적으로 발생하는 비용도 목격하였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 면서 용산시장에 도착한 배추 트럭은 하역하기까지 다시 몇 시간을 기다 려야 했다. 용산 청과시장이 협소하고 무질서하여 효율적인 물류가 불가 능했던 것이다. 하역을 기다리는 동안 배추는 상품성은 고사하고 밑에 실린 배추는 거의 물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근대적인 유통시설과 거래방식 등이 농수산물의 가격을 높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높은 유통비용 발생을 농수산물 유통인들이 폭리를 취 하는 것으로 알고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쳤다. 농림부에 재직하는 동안 수없이 경험한 일이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상승하는 경우도 소비자, 언론, 정부의 원성을 상당부분 유통인들이 감당하는 억 울함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감사원의 고랭지채소 유통 비 실측과 유통인들이 그사이 억울하게 지탄받은 사정을 밝힌 것인데 이 감사원의 유통비 실측도 도매시장까지만 하였지 도매시장에서 다시 소 매상까지의 단계는 빠져있다.

여기서 잠시 고랭지채소가 농산물유통인이나 농정에 지탄의 대상이 된 원인이 무엇인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피고자 한다.

1977년 쌀 4,170만 석 생산으로 단군이래의 주곡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수출증진과 건설업계의 중동 진출 등이 겹쳐 외화 100억 달러 수출이 달성되자 국민소득이 늘면서 의식주 등 국민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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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도 빠른 속도로 바뀌게 되었다. 아마도 이 무렵이 우리 역사상 식생 활이나 농업의 생산양식의 격변기가 아니었나 믿어진다.

먼저 식생활의 변화를 보면 국민 1인당의 쌀 소비가 차츰 줄어들기 시 작하면서 육류소비가 일상화되기 시작하였다. 곧 명절이나 제삿날에 먹 던 육류의 소비가 일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통에 수요충족을 위해 1976년 쇠고기 1천 톤을 처음으로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삼겹살 자급률이 50% 밖에 안 되는 원인도 이 무렵에 시작된 돼지고기 편중 선 호가 원인일 것이다. 또 기름기 있는 육류의 소비증가는 신선채소와 자 극적인 양념류의 소비수요를 짝지어 늘어나게 하였다.

자유당시절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넘어가던 채소나 양념류가 1970년 대 들어 행정의 주요대상으로 새로이 등장하게 되었다. 1960년대 말까 지만 하여도 농림부에 채소나 양념류 담당부서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고추의 경우 78년 계속된 가뭄으로 고추가 감산되자 세 계시장의 건고추 출하 전량인 4만 톤을 우리나라가 모두 수입해 왔어도 고추가 부족하여 고추를 금추라 부르던 고추파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벼 도열병이 그 무렵의 다수성 신품인 통일계 품종에 집중하여 발생하자 사 법, 행정, 외무 등 고시3과 합격의 수재였던 장덕진 농림부장관이 경질 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세상에 고추가 부족했다고 장관이 경질되는 일 은 미처 경험해보지 않은 전환기 농업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되는 인사 조치였다. 이와 같은 식생활의 소비패턴이 바뀌고 육가공 등 식품의 산 업화가 계속되자 농림부 산하에 비로소 식품개발연구원이 개설되고 60 여 개 대학에 식품공학과가 증설되었다. 뒤따라 급변하는 식품소비에 맞 도록 하우스 재배 등 농업의 생산방식도 변화한 것이다.

이 시기 채소 소비패턴의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종래 겨울철에만 소비하던 김장김치를 한여름의 고온기에도 원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배 추의 포기김치와 백김치, 무의 석박지 등이다. 이에 더하여 김치의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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