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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른 조선시대 벼농사 기술의 발전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7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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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초에서 조선시대 벼농사의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시대에 따라 어떤 재배기술을 발전시켜 왔을까? 생산력 향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농지의 지력을 높여 생산력을 올리는 방법과 둘째 로 노동능률을 높여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법 등이다.

농지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사직설」에서는 가을갈이를 깊이 하 라 하였다. 이는 월동중의 풍화작용으로 토양중의 유효성분을 증가시키 고자 하는 갈이라 이해된다.

봄갈이도 하되 깊이 갈면 심토(心土)를 건드릴 위험이 있으므로 봄갈 이는 깊이 갈으라는 단서가 없다.

농지생산성을 높이는 두 번째 방법은 농지를 걸게 하여 비옥도를 높 이도록 유기질비료를 보다 많이 시용하는 것이다. 그 종류는 퇴비, 구비, 잠사(蠶砂), 산야초와 분회(糞灰) 등이다. 여기서 분회란 15세기만 하여 도 인분뇨를 액상으로 저장하는 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재를 보관하는 시 설과 대소변을 보는 칙간이 병설되어 있어 그때마다 분뇨를 초목회에 섞 어 보관하기 때문에 분(糞)과 재가 섞어진 분회라 이름한 것이다. 따라서 분회는 인분뇨를 액상으로 저류하지 않던 조선전기의 거름의 하나다.

지력을 높이는 세 번째 방법은 「농사직설」에 논에 새 흙(新土)을 넣거 나 떼흙(莎土)을 넣으라 하였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객토(客土)라 이름하 는 지력증진법이다. 객토가 더욱 유효한 땅은 질땅과 헤식은 땅, 그리고 수온이 낮은 논들이다. 이와 같은 지력증진기술은 16세기까지 변함이 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주의할 점은 모두가 밑거름(基肥)으로만 시용하였 다는 사실이다. 어떤 농서에도 덧거름 시용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덧거름(追肥)은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1618년에 허균(許筠)이 편찬 한 한정록(閑情錄)의 치농편(治農篇)을 보면 건묘육성을 위해 못자리에 속효성의 초목회를 덧거름으로 시용한 게 그 기원이다. 덧거름에 이어 이 삭거름(穗肥)은 1676년에 박세당(朴世堂)이 편찬한 색경(穡經)을 보면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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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음매기때 물을 빼고 재거름이나 깻묵 등의 속효성 비료를 이삭거 름으로 시용하라 하였다. 그러므로 15세기 이전의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 까지는 휴경(休耕)을 통해 지력의 회복을 꾀하였고 조선 초기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유기질비료나 객토 등의 무기질비료를 밑거름으로 시용함으 로서 휴경농법을 연작농법으로 전환시켜 왔다. 17세기 초에 밑거름에 덧 거름 시용을 더함이 더욱 유효함을 알았고 17세기 후반에 다시 이삭거름 시용을 더함이 토지생산성을 더욱 높이는데 절대 필요함을 알게 된 것이 다. 이로 보면 농업지식의 발달은 시간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덧거름, 이삭거름 등의 거름 수요가 늘어나자 거름의 유효성 분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기술이 새로이 개발되게 된다.

1619년 고상안(高尙顔)이 편찬한 농가월령(農家月令)의 잡령(雜令)을 보면 인분뇨(人糞尿)를 액상으로 보관토록 칙간에 목통(木桶)이나 대형 의 독을 묻도록 권하고 있다. 「농사직설」에서 밝힌 분회(糞灰)는 재와 분 뇨가 섞일 때 재의 알칼리성으로 인해 분뇨의 질소성분이 휘산(揮散)되 어 악취가 없다거나 운반이 편리한 장점은 있으나 질소성분이 날아가 거 름끼가 반감된 거름이었다. 거름성분을 온전히 보존하도록 하는 이 액상 분뇨 저장법은 덧거름 시용으로 시비수요가 늘면서 개발된 신기술이다.

이에 더하여 덧거름 이삭거름 등 시비수요가 늘면서 17세기 중기에는 오늘날의 속성퇴비(速成堆肥)에 해당하는 유기질비료의 제조기술이 개 발되게 된다. 1655년 신속(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農家集成)의 올벼 못자리거름을 보면 “풀이나 버들가지, 그리고 떡갈잎 따위를 베어다 작 두로 썰어 외양간 오줌이나 사람의 오줌에 적시거나 마소가 외양간에서 밟은 거름들을 따뜻한 재와 섞어 쌓아두고 그 위를 거적으로 덮어 열의 발산을 막아주면 속히 썩어 못자리 밑거름으로 이용할 수 있는 속성퇴비 가 된다.” 하였다. 이때 오줌을 섞는 것은 오줌의 질소성분이 유기물을 썩히는 세균의 영양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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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벼농사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은 제초노력이 많이 드는 직파재배보다 제초노력이 적게 드는 모내 기(묘종법) 재배로의 전환이다. 앞에서 밝힌바 15세기 이래의 올벼무논 직파재배나 늦벼무논직파재배 그리고 건답직파재배 등 일체의 직파재배 는 온 논에 볍씨를 직파함으로써 발아에서 성묘가 될 때까지 온 논의 제 초관리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내기 재배는 본답 10분의 1의 좁은 모 판에서 모를 기르므로 제초노력이 10분의 1 밖에 들지 않게 된다. 이때 모내기재배는 직파 때보다 모내는 노력이 추가되는 흠이 있지만 그것을 상쇄하더라도 모내기 재배의 노력이 직파재배보다 덜 드는 것만은 확실 하다.

그러나 모내기 재배는 논에 물이 마르지 않아야 가능한 것이다. 따라 서 관배수가 조절이 가능한 수리안전답은 물못자리로 육묘하여 어려움 이 없지만 수리불안전답이나 비내림만 고대하는 천수답(天水畓)은 못자 리 육묘를 할 논물마저 없어 모내기 재배가 어렵게 된다. 우리나라는 6 월 중순 이후의 장마 이전에는 봄 가뭄이 상습화한 기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동생산성 제고를 위해 모내기 재배가 바람직하자 이에 새로이 개발된 것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개발된 밭모기르기다. 모만 기 를 수 있다면 장마에 모내기 용수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1770년경 홍만선(洪萬選)이 편찬한 산림경제(山林經濟)의 밭모기르기 (乾秧法)를 보면 “봄 가뭄으로 못자리 물이 없을 경우 마른 논을 흙덩이 가 없도록 곱게 다스려 이에 작은 골을 지어 분회에 버무린 볍씨를 파종 한다. 본답 한마지기에 심을 모가 필요할 경우 볍씨 7두(斗)를 파종한다.

비가 내려 본답에 물이 확보됨을 기다려 모내기 하면 물모자 때보다도 더 좋다.” 하였다. 이와 같은 밭모자리는 물모자리에 비해 성묘율이 낮 아 종자량이 많이 들고 모 뿌리가 양분과 수분을 찾아 깊이 뻗어 모를 뽑 을 때 노력이 많이 드는 결함이 있으나 물모자리보다 모가 억세어 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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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은 물모자리에 비할 바 아니다.

이 밭모자리의 단점인 모뿌리가 깊이 뻗지 않도록 18세기 중기에는 밑거름인 초목회를 얕게 집중적으로 많이 시용하여 모뿌리가 양분을 찾 아 깊이 뻗는 폐단을 예방하는 기술이 뒤이어 개발된다. 이로서 18세기 에는 천수답이나 수리불안전답에도 모내기 재배가 가능토록 모내기 재 배의 기술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또, 벼농사의 노동생산성 제고는 직파 재배를 모내기로 바꾸는 것 뿐 아니라 모를 제초하기 쉽도록 줄모(正條 植)로 심는 것이다. 「농사직설」이래 모심기는 허튼모(散植)를 심어오다 가 17세기 초에 모의 통풍채광(通風採光)이 잘되는 줄모심기가 새로이 개발되었다. 허균(許筠)이 1618년에 편찬한 한정록(閑情錄) 치농(治農)편 을 보면 “모 여섯 줄기를 한 그루로 하여 한 사람 당 여섯 그루를 한 줄로 줄모를 심어나가되 반듯하게 심어야 기옴매기에 편하며 모를 얕게 심어 야 발육이 잘 된다.” 하였다. 이로 보아 우리나라의 줄모심기는 17세기 초에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허균은 모 여섯 줄기를 한 그루로 하라 하였 는데 1429년에 편찬된 「농사직설」에는 “모 4~5개 줄기를 넘지 않게 한 그루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1655년에 편찬된 신속(申洬)의 농가집 성(農家集成)에는 “한 그루에 모 3~4줄기를 넘지 않게 심는다.”하여 「농 사직설」보다도 그루당 20%가 줄어든 3~4본으로 소주밀식(小株密植)이 풀이되어 있다. 벼모의 소주밀식은 벼농사 증산의 중요 요건인데 그것을 우리나라에서 17세기부터 시행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상에서 밝힌 벼농사의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은 직파재배 보다 는 모내기재배가 더욱 능률적인데 못자리 물마저 확보가 어려운 천수답 의 모내기 재배를 위해 17세기말경에는 밭모자리육묘기술이 개발되어 모내기 재배가 전국적으로 보편화 되게 된다. 또, 중경제초시의 노동능 률을 높이고자 15세기 이래의 헤쳐심기를 지양하고 17세기 초부터 줄 모심기와 17세기 중기부터 벼모의 소주밀식이 개발 시행되었다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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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끝으로 밝힐 것은 노동생산성을 높이는데 반드시 쓰이는 농기구가 있 다. 갈이(耕) 연장으로 따비, 쟁기, 괭이, 가래, 삽이 있고 삶이(정지) 연 장으로 써레, 쇠스랑, 곰방매, 번지, 나래, 고무래, 발번지, 통번지, 밭나 래 등이 있으며 거름내기 연장으로 장군, 새갓통, 귀때동이, 거름통, 삼 태기, 거름대 등이 있다. 씨붙이기 연장으로 고써레, 드베, 파종기 씨송 곳, 씨망태, 종다래끼, 끙게, 살번지, 궁글대 등과 김매기 연장으로 호미, 밀낫, 칼자매, 매번지, 보토괭이, 제초기 등이 있고 물대기 연장으로 두 레, 맞두레, 용두레, 무자위, 물풍구, 살포 등이 있다. 거두기 연장으로 낫, 전지, 도리깨, 댓돌, 개상, 홀태, 삼괭이 등과 말리기 연장으로 얼루 기, 멍석, 도래방석, 발, 거적, 채반 등이 있으며 고르기연장은 부뚜, 듸 림부채, 바람개비, 키, 이남박, 체 등이 있다. 갈무리 연장으로 독, 나락 뒤주, 쌀뒤주, 통가리, 섬, 가마니, 중태, 멱서리, 뒤웅박, 씨주머니가 있 으며, 방아연장으로 절구, 디딜방아, 물방아, 물레방아, 돌확, 맷돌, 매 통, 토매, 연자매, 기름틀, 국수틀, 물절구, 안반이 있다. 나르기 연장은 지게, 발채, 들것, 망태기, 소쿠리, 광주리, 바구니, 다래끼, 거지게, 걸 채, 옹구, 발구, 썰매, 수레, 달구지가 있으며, 기타 연장으로 갈퀴, 넉가 래, 함지, 매, 도끼, 까뀌, 톱, 반달낫, 도롱이, 태, 덫 등이 있으나 이들의 각종 연장은 15세기 것이나 개화기의 연장이 큰 변화가 없어 농기구 개 량에 의한 노동능률 향상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토지 및 노동생산성 향상으로 농가호당의 경영규모가 확대된 것 은 사실이지만 통계가 없어 시대에 따라 얼마만큼의 경영규모가 확대되 었는지도 밝힐 수 없다. 극히 조방한 수치지만 14세기말인 1392~1393 년의 농지(전, 답) 면적으로 당시의 인구수를 나누어 본 바, 1결(結)의 농 지에서 6.89인이 먹고 살 먹거리가 생산되었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592년은 8.05인이 먹고 살 식량이 생산되었으며, 그로부터 약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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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난 1807년은 1결에서 12.78인이 먹고 살 식량이 생산되었다. 곧 14세기 말을 100으로 본다면 19세기 초인 1807년의 생산은 185로 85% 가량의 식량이 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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