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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의 감성과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8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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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난 1807년은 1결에서 12.78인이 먹고 살 식량이 생산되었다. 곧 14세기 말을 100으로 본다면 19세기 초인 1807년의 생산은 185로 85% 가량의 식량이 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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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찬한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시 찬요초’에는 간기(刊記)가 없어 언제 누가 편찬한 것인지 의문스러웠으 나 일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에는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강희맹의 편찬이라 밝히고 있다. 하여간 이 ‘사시찬요 초’의 2월의 춘분(春分)에 할 농사일을 보면 여러 밭작물의 파종을 풀이 하면서 대나무 재배법이 풀이되어 있다. 대나무의 성질은 서남쪽을 좋아 함으로 서남쪽을 향한 동북쪽 높고 평평하며 배수가 잘되는 곳에 2월초 에 심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식 적기를 실기하였을 때에는 음력 5월 13일이 가장 좋은 재식일이라 하였다. 그날은 대나무가 취(醉)하는 날이기 때문이란 것이 다. 취하여 감성이 없는 죽취일(竹醉日)이란 것이다. 대나무가 취한 날이 란 뜻은 옮겨 심어도 옮겨 심었는지 대나무 스스로 이를 감지하지 못한 다는 뜻이다.

음악소리에 포도나무는 반응을 하였는데 대나무는 평소에 있던 감성 이 죽취일에 한하여 없다는 뜻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식물도 감성(感性) 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기록으로 같은 ‘사시찬요초’의 나무재배(種木類)법을 보면 모든 나무는 정월에 심는 것이 가장 활착이 잘되고 2월은 버금가며 3월은 너무 늦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심할 것 은 나무를 옮겨 심어도 “나무 스스로 옮겨 심은 줄을 모르게 하라.”는 것 이다. 이것도 나무가 감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때 가장 민감한 것은 나무 의 음양(陰陽)이니 남쪽으로 뻗은 가지는 옮겨간 곳에서도 남쪽으로 향 하도록 심으면 백 그루를 옮겨 심어도 모두 활착이 잘된다는 것이다. 이 는 곧 나무의 햇빛을 향한 감성을 음양의 이치에서 풀이한 것이다.

15세기의 감성은 17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 로 활동한 류성룡(柳成龍)의 셋째아들 류진(柳袗)이 1618년 위빈명농기 (渭濱明農記)라는 체험적 농서를 편찬하였다. 그는 낙동강 지류인 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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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渭川江)변의 갈대밭을 개간한 경험을 이책에 기록하고 있다. 갈대는 뿌리가 억세어 아무리 뿌리를 잘 제거하여도 다음해 숨은 뿌리에서 새싹 이 다시 돋아나는 강한 성질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여름에 개간한즉 다시 재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한기인 봄과 겨울에 개간한 곳은 이 듬해 새싹이 돋아나는데 한여름 한더위 때 개간한 곳에서는 신통하리만 큼 땅속에 일부 잠복해 있던 뿌리에서 조차 전혀 새싹이 돋아나지 않았 다는 것이다.

그 까닭이 한더위에 뿌리가 지쳤거나 노여워서 그러한지에 대해서 유 진은 그 까닭을 밝히고 있지 않으나 필자의 풀이로는 남은 뿌리에 이듬 해 재생할 양분이 고갈되는 시기가 바로 한여름이기 때문이라 이해된다.

하여간 유진이 갈대의 재생이 환경변화에 반응하는 감성을 알아낸 것 은 17세기 농학이 이룩한 큰 성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소 련의 Lysenko는 1920년대 가을보리를 춘화처리(春化處理)를 통해 봄보 리로 실용화 한 것을 세계적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우리나라 고상안 (高尙顔)이 1619년에 편찬한 농가월령(農家月令)을 보면 원리가 같은 Lysenko의 춘화처리를 그보다 3백년 앞서 고상안이 먼저 밝히고 있다.

이것도 식물의 감성에 관한 기록들이다.

작물의 감성뿐 아니라 ‘사시찬요초’에는 15세기 농학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과학적 내용들이 곳곳에 풀이되어 있다. 예컨대 “초하 룻날 새벽닭이 울 때 횃불을 들고 뽕나무나 과일나무 주간(主幹)의 아래 위를 쬐어주라.” 하였다.

이는 가장 추운계절의 가장 추운시각에 가장 뜨거운 횃불로 갑자기 잠복중인 벌레나 병원균에 뜨거운 충격을 주어 효과적으로 병충해를 방 제하라는 것인데 그 발상이 주목되는 병충해 방제법이다.

또 정월초에 “해가 뜨기 전 과일나무 가지 사이에 벽돌을 끼워두라.”

하였다. 이를 가수(嫁樹)라 하여 나무 시집보내기라 하였다. 부연설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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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나 이는 열매를 맺지 않고 웃자라기만 하는 도장지(徒長枝) 사이에 벽돌을 끼워 도장을 억제함으로서 결과지(結果枝)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기술이다.

현대 과수학에서 도장하는 가지에 고리모양으로 돌려가며 상처를 내 어 도장을 억제하며 결실을 유도하고 있는데 이를 환상박피(環狀剝皮)라 한다. 벽돌을 끼우는 것도 환상박피와 같은 원리다.

또 위빈명농기의 소과문(蔬果門)에 풀이된 과수재배법을 보면 환상박 피와 유사한 내용이 풀이되고 있다. 과수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으 로 의인화(擬人化)하여 정월에 과일이 많이 맺히도록 재촉하기 위해 두 사람이 과일나무아래 마주서서 한사람이 도끼를 들고 “열리지 않는 이 나무 베어버리겠다고 소리치며 나무에 돌려가며 얕은 상처를 내면 또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아서 금년에는 많이 열릴 것이니 그대로 기르자고 말 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그해의 결실이 풍작이 된다는 것이다. 유진은 과목도 감성이 있음을 믿고 쓴 농서라 이해되나 과목에 상처를 내는것은 곧 생육을 억제하는 일종의 환상박피인 셈이다.

15세기에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오늘날의 환상박피와 같은 결실의 원리를 밝혀냈다는 것은 놀라운 농학적 성과다. 또, 춘분(春分)에 오이씨 파종에 관한 기술도 매우 과학적이다. “한구덩이에 네 개의 오이씨를 파 종하되, 그 곁에 콩씨 3개를 심어둔다. 대체로 오이씨는 약해서 싹이 틀 때 흙을 뚫고 나오기 힘이 드나 힘이 센 콩씨는 덮어준 흙을 쉽게 뚫고 나오므로 이때 콩씨는 오이씨의 발아를 도와주게 된다.”는 것이다. “오 이씨가 싹이 터 두어 개의 본 잎이 나오면 콩의 묘는 잘라준다.” 하였다.

이 약삭빠른 농업기술을 읽으면서 엷은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이상에서 식물의 감성에 관한 기록과 한겨울의 병충해 방제나 나무 시집보내기, 그리고 강한 콩씨의 발아력으로 약한 오이씨의 발아를 돕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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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들을 간단히 요약하였다. 그 뜻은 15세기 후반의 조선조 농학의 수 준을 음미코자 예시한 것이다. 이로 보아 15세기 우리 농학의 수준은 원 리면에서 최신과학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현대의 농업과학이 더 정밀하게 과학화 하였다는 차이 뿐이다.

그렇다면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어떤 분이기에 농학에 그토 록 밝은 분이었을까? 그의 가계는 농학 가문이었다. 그의 증조부인 강시 (姜蓍)는 1372년(고려 공민왕 21) 합천(당시 江陽)군수로 있을 때 원(元) 나라에서 편찬된 농상집요(農桑輯要) 한질을 읽어보고 이를 경상감사 설 장수(偰長壽)의 재정 지원으로 합천에서 복간하여 널리 권농교재로 쓰도 록 전국에 배포한 훌륭한 농학자였다.

또 강희맹의 친형인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1460년경 우리나 라 최초의 화훼원예서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을 편찬하였다. 소록이라고 하였지만 그 내용은 소록이 아닌 알찬 분량이다. 또 그의 이모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昭憲)왕후로 세조와는 이종(姨從)사촌간이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이조의 판서 등 고관대작을 두루 거친 관료였으나 양부(養父)의 상을 당하여 관리에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며 금양잡록(衿 陽雜錄)이라는 체험적 농서를 편찬하였다. 금양이란 현재의 시흥과 양천 의 일부를 아우르는 당시의 지명이다. 1492년 강희맹의 아들 구손(龜孫) 이 금양잡록을 출판하면서 쓴 발문을 보면 “농부의 차림(野服)으로 농사 를 지으며 농부들과 담론하였다.” 한 것으로 보아 강희맹이 몸소 농사를 지으며 의문스러운 점은 농부들과 토론하면서 농업지식을 쌓은 것 같다.

따라서, 강희맹은 증조부 이래의 농학가문에서 태어나 영농경험을 통 해 실용적인 농업지식을 갖춘 농학자였다. 그러나 ‘금양잡록’은 주곡 중 심의 농서라 원예, 축산, 양잠 등을 수록한 농서가 필요하였다. 그것이 바로 ‘금양잡록’의 하편(下篇)격인 ‘사시찬요초’라 이해된다.

이 ‘사시찬요초’의 초(抄)란 본래의 ‘사시찬요’에서 초록하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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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모본인 ‘사시찬요’는 누가 언제 편찬한 어느 나라 농서일까?

‘사시찬요’는 당나라 말기에 한악(韓鄂)이 편찬한 월령식(月令式)농서다.

월령식 농서란 한 작물의 재배법을 풀이할 때 일반농서와 같이 파종에서 거둘 때까지 일관되게 기록하지 않고 파종은 봄철의 농사를 풀이할 때 기록하고 중경․제초는 여름철, 거두기는 가을철의 농사를 기록할 때 풀 이함으로서 월별로 농사일을 기록하는 편찬방식의 농서다. 그래서 사시 (四時) 찬요초인 것이다.

그렇다면 강희맹은 한악의 ‘사시찬요’에서 얼마나 많은 분량의 내용 을 초록하였을까? 그것은 원본대조가 있어야 알 수 있는데 그 원본이 중 국에서 조차 소실되어 한악의 ‘사시찬요’는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알았 었다. 그러다가 1961년 일본의 야마모도(山本) 서점에서 처음으로 발견 되어 모리야(守屋美都雄)의 해제(解題)를 붙여 발표함으로서 비로소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책은 중국에서 출판된게 아니라 1590년 우리나라 현재의 울산군 하상면(下廂面)에 주둔하고 있던 경상도 좌병영의 좌병사(左兵使 종2품) 박선(朴宣)의 발문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복간된 것이었다. 결국 본래의 ‘사시찬요’는 중국에서 저술되고 우리나라에서 복간되어 일본에서 발견된 꼴이 되어 동양삼국의 농업사학도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최근인 2017년 6월 17일 경북대 문헌정보 학과 연구팀이 또 다른 ‘사시찬요’를 발굴하였다. 그것은 뜻밖에도 태종 3년(1403)인 계미년(癸未年)에 주조된 활자로 인쇄된 ‘계마자본 사시찬 요’였다. 이 활자는 세종 3년(1420)까지 사용 되었으므로 이 ‘계미자본 사시찬요’는 1403년에서 1420년 사이의 어느 해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 되며 강희맹의 사시찬요초는 그의 생존 년대로 보아 바로 이 ‘계미자본 사시찬요’에서 초록한 것으로 믿어지게 되었다. 이 ‘계미자본 사시찬요’

는 2017년 12월 부산대 최덕경에 의해 역주본(譯註本)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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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주본 사시찬요’와 강희맹의 ‘사시찬요초’를 대조한 결과 강희맹 은 한악의 원본 사시찬요에서 극히 일부분만 인용하였을 뿐 대부분은 농 상집요(農桑輯要) 쇄쇄록(瑣碎錄), 월암종죽법(月庵種竹法) 등 중국의 여 러 농서에서 초록하고 이에서 부족한 것은 우리나라의 관행농법을 보태 어 편찬한 것이었다.

결국 강희맹의 ‘사시찬요초’는 편찬방식만 월령식농서로 한악의 ‘사 시찬요’를 따랐을 뿐 주된 내용은 중국의 다른 농서와 우리의 재래농법 을 인용한 것이다.

끝으로 강조할 것은 15세기 후반의 우리 농학이 식물의 감성(感性)이 나 가수(嫁樹) 등 높은 수준의 농업과학을 농업교재로 ‘사시찬요초’에서 밝혔다는 것은 비록 그 내용이 중국농학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높 이 평가해야할 내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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