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개화기 농학에 기여한 김가진(金嘉鎭)과 장지연(張志淵)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103-108)

94󰋻농어촌 복지정책

으켜 수많은 카톨릭 신자와 외국인 신부들을 학살하였다. 그 수준은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의 경우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으로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恩彦君) 부부까지 처형하는 혹독한 수준이었다.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용어가 없다고 하지만 만일 쇄국주의나 종교탄 압이 없었다면 선교사나 외국인들의 빈번한 왕래를 통하여 더욱 일찍이 더욱 다양하게 우리 농업의 근대화를 앞당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제2장 농학과 농업기술󰋸95

개화기 우리 농업에 크게 기여한 김가진과 장지연이 들어있다. 이에 그 들의 개화기 농업에 기여한 활동을 밝혀 독자의 참고에 공하고저 한다.

그 중 김가진(金嘉鎭 1896~1922)의 약력을 살펴보면 그는 31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참서관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통리군국사무 아문의 농상사(農桑司)주사, 주일판사대신(駐日辦事大臣), 군국기무처의 원, 농상공부대신, 황해도관찰사, 중추원의장, 다시 농상공부대신, 충청 도관찰사, 대한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 를 강점한 후 그에게 남작(男爵)의 작위를 주었으나 반납하고 비밀결사 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로 추대되어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며 임시정부요인으로 활동하다 중국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 도 독립운동가다. 친일로 분류된 까닭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다는 것 인데 반납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사망한 것은 참작이 안 된 것인가?

그의 이력중 개화기 농정에 기여한 점을 요약하면 첫째로, 개화기 농 사시험 연구를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1882년 한미(韓美)수 호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 그 답례로 11명의 외교사절이 미국을 방문 하였다. 일행은 그곳에서 농사시험연구현황을 견문하고 돌아와 우리나 라에도 농사시험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고종의 재정지원으로 1884 년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을 개설하였다. 미국의 젖소, 종마, 채소의 셀러리 등 3백여 종의 종자, 종축, 농기구가 이때 도입되었다. 초 대장장은 사절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던 무관 최경석(崔景錫)이었으나 그 가 갑자기 병사하자 농상사(農桑司) 당상으로 재직 중이던 김가진이 뒤 를 이어 시험연구를 정착시키면서 고문으로 영국인 기사(技師) 재프레이 (R.Jaffray)를 초빙토록 조치하였다. 또, 시험장의 명칭을 종목국(種牧 局)으로 변경하고 시험장의 소속을 황실 소속에서 통리군국사무아문 농 상사 직속으로 하며 정식 정부기구화 하였다.

둘째로, 김가진이 두 번의 농상공부대신이 된 것이다. 첫 번째는

96󰋻농어촌 복지정책

1895년 4월 3일부터 8월 16일까지의 133일간이며 두 번째는 1904년 3월 8일부터 8월 21일까지 163일간으로 두 번의 재임기간을 합쳐도 모 두 10개월 뿐인 단기간 이었다. 그래도 이 경우는 당시로서는 긴 기간이 었다. 1898년에는 1898년 4월 24일부터 1899년 3월 14일까지 만11 개월 사이 무려 11명의 농상공부대신이 교체되어 평균 1개월간 재임하 는 망국적 교체였기 때문이다. 김가진이 두 번이나 농상공부대신에 재임 한 것은 그가 농정에 일가견이 있는 달인으로 객관적 정평이 있었기 때 문이라 믿어진다. 그것은 지난날 농무목축시험장 정착의 경력과 주일판 사대신으로 4년간 일본에 주재하는 동안 일본이 선진농법을 가능케 한 일본농정을 잘 알았기 때문이라 믿어진다.

셋째는, 개화기 서양농학을 도입코자 농서편찬을 선도하였다. 1904년 말 장지연(張志淵)이 농학신서(農學新書) 상하권을 편찬하였는데 그 말미 에 “농부대신(農部大臣)이 신농서를 편찬토록 명하여 인쇄에 넘길 무렵 로일(露日)전쟁으로 국내외가 복잡한데다 대신마저 교체되어 인쇄하지 못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이때의 농상공부대신이 바로 김가진이다.

넷째는 김가진이 우리나라 잠업진흥에 기여한 공적이다. 농상공부는 1901년 4월 잠업과에서 잠업시험도 할 수 있도록 잠업과시험장을 병설 하고 시험연구, 잠종생산을 겸하면서 2년제 잠업강습소(100명)도 겸하 게 하였다. 강습소 양잠교재로 후일 보성전문교장이 된 신해영(申海永) 이 1901년 잠상실험설(蠶桑實驗說)을 편찬하였는데 표제를 김가진이 쓴 것으로 보아 시험장과 강습소 개설을 주도한 것도 김가진이 일본을 본떠 추진한 것으로 믿어진다. 김가진이 1904년 다시 농상공부대신이 되자 잠업과시험장은 잠상(蠶桑)시험으로 분리독립 시켰고 대신 퇴임 후에는 몸소 장장이 되어 잠업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신을 두 번이나 거친 분이 산하기관의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일본도 우리와 같은 농업국임에도 우리보다 한발 앞서 서양문물을 도

제2장 농학과 농업기술󰋸97

입할 수 있었던 것은 잠업진흥으로 대량의 생사(生絲)를 유럽에 수출하 여 이에서 발생한 수출대전이 일본을 근대화하는 재정적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가진이 4년간 일본에 머무르면서 일본의 잠업을 배워 우리 나라도 근대화의 힘을 잠업에서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의 서 구식 신농서 편찬을 살펴보면 그는 31세 되던 1894년 진사가 되고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였다. 1897년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1898 년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약하였다. 1899년 시 사총보(時事叢報) 주필을 거쳐 1901년 황성신문 사장이 되었다. 이 황성 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그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 는 유명한 사설을 썼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乙巳條約) 때문이다. 그 내용은 국권침탈의 조약 을 폭로하고 일제침략과 을사오적을 규탄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총 궐기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 일로 그는 투옥되어 65일 후 석방되었 으나 황성신문은 정간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동참호 소문을 신문잡지에 계속 기고하였다.

1908년 2월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 그곳에서 발행하던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필이 되었으나 재정난으로 신문이 폐간되자 상해 남경등지를 유랑하다 귀국하였다.

1909년 진주에서 발행되는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되어 언론구국운동 에 종사하다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병탄함에 황현(黃玹)의 절명시 (絶命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신문이 폐간되자 활동 무대를 잃고 1911년 이후 향리에 칩거하다 1921년 마산에서 생을 마감 하였다. 그의 이력으로 보아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까닭이 없는데 구명의 방편상 순간적 변신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친일인사로 등재된 이유는

98󰋻농어촌 복지정책

확실히 알 수 없다.

장지연은 언론에 종사하면서 생전에 4종의 신농학서를 편찬하였다.

그중 1909년에 출판된 소채재배전서(蔬菜栽培全書)를 보면 이는 우리나 라보다 한발 앞서 서양의 채소재배법을 도입한 일본의 채소재배 교재를 원형 그대로 번역하여 만든 책으로 보인다. 그와 같이 믿는 까닭은 일본 식 용어를 우리용어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직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 컨대 민들레를 일어식으로 포공영(蒲公英), 대단히를 비상(非常)히, 시골 사람을 토인(土人), 지붕을 옥근(屋根), 채소를 소채, 손질을 수입(手入), 솎음질을 간인(間引) 등 일어식으로 직역하였기 때문이다. 또 번역이 잘 못된 곳도 있다. 예컨대 우엉은 배수가 잘되는 모래질 땅이 재배적지인 데 반대로 토양 중에 물이 정체된 곳이 적지라고 한 것들이다. 그래도 우 리나라 최초의 이 채소재배 전문농서를 통해 우리나라 고유의 신라가지, 발해가지, 의림지(義林池) 순채(蓴菜), 신라박하 등의 품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종래에 우리나라에 없던 온상(溫床)육묘법이 처음으 로 소개되었다든가 채소의 촉성재배법이 풀이된 것은 처음으로 소개된 신농업기술이다. 또, 십자화과 채소의 잡종강세(雜種强勢)나 인공수분 (人工授粉) 그리고 토양의 기지(忌地)형상 등을 풀이한 것도 처음으로 소 개되는 서양농법이다.

또, 화학비료에 인산질 비료로 과린산석회나 가리질비료 등을 소개하 고 채소농약으로 제충국(除蟲菊)이나 담배 삶은 물, 그리고 비눗물이나 유황가루, 석유유제(石油乳劑), 고래기름의 사용법을 풀이한 것은 조선 시대 농서에 없던 새로운 채소 농약이다. 이러한 새로운 농업자재의 소 개나 새로운 농법의 풀이는 이 책이 지니는 장점이면서 농업사적 의미가 큰 내용들이다.

장지연은 또 신농학서로 농학신서(農學新書)와 화훼원예를 다룬 위원 화훼지(韋園花卉志), 그리고 위암화원지(韋庵花園志)를 편찬하였는데 출

제2장 농학과 농업기술󰋸99

판이 안된 채 그 원고가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위원(韋 園)이나 위암(韋庵)은 장지연의 호(號)다. 농상공부대신의 위촉으로 1904년에 편찬한 농학신서(農學新書)의 특이한 내용을 요약하면 토성 (土性) 구별에서 중국식 화학기호를 표기하고 있어 일본의 신농서뿐 아 니라 중국의 신농서도 이책 편찬에 참고한 것 같다. 예컨대 산소(O2)를 양기(養氣), 수소(H2)를 경기(輕氣), 질소(N)를 담기(淡氣), 탄소(C)를 탄 기(炭氣)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제2권의 분저(糞苴)법은 각종 비료풀 이, 제3권은 밭갈이, 제4권에서 볍씨의 염수선(塩水選)이 처음으로 풀이 되고 있다. 제5권은 여러 곡식의 품종명, 제6~8권에 종예(種藝), 제9권 에 과수, 제10권에 식물총론, 제11권에 수확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위원화훼지」에는 국화, 치자화, 파초, 월계꽃, 옥잠화, 한연(旱蓮)화, 금계(錦葵)화, 채승(彩勝)화, 적앵(赤櫻)화(코스모스), 철단화(鐵團花) 등 10종의 꽃나무를 순한문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편찬년도는 미상하다. 또

「위암화원지」는 국한문 혼용으로 기록하되 화훼각론식으로 영춘화(迎春 化 개나리), 신이화(辛夷花 붓꽃), 산다화(山茶花 동백), 근화(槿花 무궁 화) 등 모두 169종의 화훼작물을 상하(上下) 2권으로 자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요컨대 이상에서 밝힌바와 같이 김가진은 농정분야에서, 장지연은 신 농서 편찬에서 개화기 우리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한 인사들이 확 실함을 그 근거를 들어 이에 밝히는 바이다.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103-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