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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호적제도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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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시대만 민란을 촉발한 곳이 아니다. 고려신종 3년(1200)에도 고을 아전들의 학대와 부패에 대항하여 아전들의 주택 50여 채를 불사르고 여러 사람이 희생된 바 있다. 또 1923년에는 백정들이 신분상승을 목적 으로 한 형평사(衡平社)라는 결사체가 진주에서 처음 결사하여 저항정신 이 강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데 김용섭(金容燮)의 ‘철종조 민란발생에 대한 시고(試考)(역사교육1)’, 한우근(韓佑劤)의 ‘18세기 전 반기의 조선사회경제의 일고찰(서울대 인문논문집7)’ 철종실록 등을 참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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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이조나 예조 등 다른 부처에 없는 이들 산학직 들이 호조에만 있는 것은 인구통계 뿐 아니라 생산통계, 세수(稅收) 통계 등 각종 숫자에 관한 행정을 전담한 까닭으로 보인다. 여기서 교수(敎 授), 훈도(訓導)등의 직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계수에 밝은 인재는 도제 (徒弟)식 교육으로 내부에서 육성하여 기용한 것 같다. 호적신고양식은 경국대전의 예전(禮典)에 호구식(戶口式)이라 하여 신고양식이 예시되어 있다. 이제 보존중인 7건의 호적을 기초로 그 작성방법을 풀이하면,

첫째 줄에 호적신고서를 작성한 년월일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는 대한제국 이전까지 중국년호를 썼기 때문에 도광(道光)17년(1837) 또는 함풍(咸豊)8년(1858)등의 년호와 년도에 이어 작성월일을 쓰고 관 할현인 부여현(扶餘縣)까지가 한 줄로 세로로 써 있다.

둘째 줄에 고정유식성적(考丁酉式成籍) 또는 고무오식성적(考戊午式成 籍) 등 작성당년의 간지(干支)상 년도를 표시하고 호적신고서를 작성하 되 호구장내(戶口帳內)라 하여 호구의 내용은 몽도면(蒙道面) 수락리(水 落里) ○통(統) 제(第) ○호(戶)까지를 한 줄로 써 있다. 여기서 통(統)이라 함은 경국대전 호전(戶典)에 규정 되어 5호(戶)를 한통으로 하는 5가작 통(五家作統)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통, 호의 숫자가 기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세기 이후 오가작통법은 유명무실해진 것 같다.

셋째 줄에는 호적신고하는 신고자의 직함, 성명, 연령, 출생년도의 간 지, 본관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 한자로는 유학(幼學) 김희현(金熙賢) 년 오십칠(年五十七), 경자생(庚子生), 본김해(本金海)도 되어있다. 여기서 유학이란 벼슬이 없는 유생이란 뜻인데 필자의 5대 조부시다.

넷째 줄에는 신고자(김희현)의 부친 조부, 증조부, 외조부의 직함과 이름, 외조부의 경우는 직함 및 성명과 본관까지 두 줄에 걸쳐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일러 사조(四祖)라 한다. 이를 한자로 표시하면 부학생여채 (父學生麗采)(필자의 6대조), 조가의대부(祖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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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樞府事) 중삼(重三)(필자의 7대조)이라 되어 있는데 가의대부는 종2품 의 품계명이고 중추부는 정3품 이상의 소임이 없는 관리들의 대기소 같 은 곳이다. 이어서 증조(曾祖)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 樞府事) 행운(行雲)(필자의 8대조) 다음에 신고자(김희현, 필자의 5대조) 의 외조부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僉知) 중추부사 김익찬(金益燦) 본경 주(本慶州)라 되어있는데 통정대부는 정3품의 당상관의 품계명이다. 당 산관은 망건을 쓸 때 옥관자(玉貫子)를 달 수 있다. 같은 정3품이라도 통 훈대부(通訓大夫)는 당상관이 아니라 당하관이다. 여기서 밝힌 사조(四 祖)(부, 조부, 증조, 외조부)는 호적신고자의 혈통을 밝힌 것이다.

다섯 째 줄에는 신고자의 배우자에 관한 기록이다. 한자로 처백씨(妻 白氏)(필자의 5대 조모) 령(齡) 59 무술생(戊戌生) 본수원(本水原)이라 되 어있어 신고자의 배우자가 두 살 연상으로 되어있다. 함풍(咸豊) 8년 (1858)과 동치(同治) 3년(1864)에 신고한 신고서에는 처의 사조(四祖)도 기록되어 있으나 도광 17년(1837), 광서 2년(1876), 광서 5년(1879), 광서 8년(1882), 광서 16년(1890)의 5회에 걸친 신고서에는 처(妻)의 사조(四祖)가 생략되어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처의 사조(四祖)도 기록토 록 되어 있다.

여섯 째로 솔자(率子) 응길(應吉)(필자의 고조부) 년27(年二十七) 경자 생(庚子生)으로 되어 있는데 족보상에서는 아들이 두 분인데 여기서는 장남만 기록하였다. 아마도 작은 아들은 분가하여 신고대상에서 제외시 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어서 며느리부(婦) 지씨(池氏) 령(齡)28, 기 사생(己巳牲) 적충주(籍忠州)라 하였다. 경국대전 호구식(戶口式)(양식)에 는 사위(女婿)가 있으면 성명, 연령, 본관을 기록하라 되어있는데 이는 데릴사위이다. 첨기할 것은 1864, 1876, 1879, 1882, 1890까지 26년 간 작성한 신고서에는 노복영(奴卜永)이라 하여 복(卜)씨 성의 종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경국대전 호구식에는 고공(雇工)(머슴) 비(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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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도 기록하라 하였다. 따로 한 줄에 등갑오호구상준(等甲午戶口相 準)이라 하여 3년 전인 갑오년(1831)과 같다 하였다. 그 밑에 부여현감 의 직인이 찍혀 있고,

일곱째로 끝줄에 행현감(行縣監)이라 쓰고 현감의 수결(싸인)이 있다.

여기서 현감 앞에 행(行)자가 있는 것은 현감으로 행한 사람의 뜻이 아니 다. 당시의 현감의 품계가 종6품인데 그보다 높은 품계의 인물이 현감으 로 재임하였다는 뜻이다.

이상이 조선시대의 호적제도에 의한 호적신고의 전부다. 호적신고의 목적은 인구동태를 수량적으로 파악하고자 함이요 남녀별 연령별 지역 별 등의 인구통계를 파악함으로서 국가나 지방의 식량수급, 병력자원이 나 취로인력 파악 등을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필요를 충족시키는 최 소한의 내용이면 충분함에도 7건의 호적신고서에는,

첫째로 필요 없는 기록이 너무나 많다. 예컨대 신고자의 직함이나 이 미 사망한 신고자의 부친, 조부, 증조의 직함과 외조의 직함 및 성명과 본관이 인구통계상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1837년도 신고의 경우 모두 143자(字)의 기록 중 36%에 해당하는 51자가 이에 해 당하고 처(妻)의 사조까지 기록된 1858년의 경우 모두 169자(字) 중 55%에 해당하는 73자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로 인구통계상 반드시 기록하여야 할 항목은 없는 게 많다는 것 이다. 예컨대 나의 조부의 경우 3남2녀의 5남매였고, 증조의 경우 4남1 녀의 5남매였으며, 고조부의 경우 2남이었는데 7건의 호적신고에 장남 이외에 다른 자녀나 손자손녀의 기록이 전무하였다는 사실과 여성의 경 우는 신고자의 처와 자부 이외의 딸이나 손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 을 지적할 수 있다. 곧 필요 없는 기록은 많고 필요한 기록은 없다는게 많다. 그래도 현감이 잘 되었다고 직인을 찍어준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의 호적신고는 형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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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이상의 사실에 비추어 조선시대의 호적은 인구통계를 위한 호 적이라기보다 신고자 가분의 문벌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호적신 고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쓰고 있는 조선시대의 인구통계는 통계청의 인구학적 이 론을 근거로 조선시대의 호구조사 자료를 평가하고 호당 가구 수, 인구 증가율, 특정지역 기준의 보정 등 완성도분석(完成度分析)으로 인구수를 추정한 수치다. 근대적 인구통계의 시작은 갑오개혁 이후 1896년(건양 원년) 9월 1일에 칙령 제 61호로 발포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에 의한 것이 처음이다(근잠회보 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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