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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에 우리 농업을 도와준 외국인들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9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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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공급에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가장 크게 기여한 셈이다.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 초기에 서울과 부산에 영세한 규모의 화학비 료공장이 있었다하나 이를 확인할 자료는 없다. 암모니아는 독가스로도 이용할 수 있어 일제는 조선에 비료공장 설립을 꺼려 왔다고 한다. 그러 다가 1931년 만주 침략을 앞두고 그 전진기지인 조선의 경제기반을 다 지고자 1927년에 함경남도 함흥에 대규모의 질소비료공장을 건설하였 다. 조선의 질소비료 80%는 이 공장에서 생산 공급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특히 동란 후의 한국은 극심한 비료부족에 시달리다가 1964 년 삼성이 대일차관으로 울산에 한국비료를 건설하였으나 삼성의 사카 린 밀수가 탄로나자 여러 곡절 끝에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였다.

그 후 충주비료를 거쳐 1970년대에 영남화학, 남해화학 등의 대규모 화학비료공장이 속속 건설되어 화학비료 수급의 어려움은 해소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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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재하면서 농원을 경영하거나 자기자본을 가져와 기업적 농원을 경 영함으로서 부수적으로 우리 농민이 이를 보고 배우게 된 불로소득의 경 우들이다.

첫째부류에 속하는 외국인들을 들어보면 인조실록에 인조 23년 (1645) 볼모로 청나라에 가있던 소현세자가 돌아오면서 중국의 채소재 배 기술자(菜園夫) 2인을 데려온 사실이 있다. 궁중에 양질의 채소를 조 달코자 데려온 것으로 믿어지나 이것이 우리 역사상 외국 농업기술자를 초빙한 최초의 기록이다. 개화기인 1884년에는 독일인 매텐스 (M.Maetens 麥登司)가 조선 조정의 초청으로 당시의 국영기업인 잠상 공사(蠶桑公司)의 견직(絹織)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추천인은 독일인으 로 개화기구였던 통리아문(統理衙門)의 협판(차관)으로 있던 묄린드로프 (Möllendorf, Paul George Von 穆麟德)였다. 그러나 잠상공사는 낯선 기업경영의 부실로 수년 후 문을 닫았다. 또 1888년에는 영국공사의 추 천으로 제프레이(R. Jaffray 爵佛雷)가 1884년에 개설한 농무목축시험 장(農務牧畜試驗場)의 고문으로 초빙되어 농사시험지도를 하면서 2년제 농업학교 설립을 추진하던 중 전염병으로 부임 1년 만에 갑자기 사망하 였다. 또, 미국인 크룸(Raymond Krumn 巨廉)은 1894년 미국 공사의 추천으로 토지측량기관인 양지아문(量地衙門)의 고문으로 초빙되었으나 그 측량실적은 현재 찾아볼 수 없다.

조선정부는 1895년 강화도 갑곶이에 해군사관학교격인 한 학년 30 명의 조선수사해방학원(朝鮮水師海防學院)을 개설하고 영국인 해군대위 코웨이를 교수로 초빙하였는데 그의 부인이 영국에서 순무씨를 가져와 주택 인근에 재배한 것이 오늘날 강화순무의 기원이 되었다.(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1898년에는 불란서인 농학자 쇼트(M.Shott 蘇特)가 주한 불란서 공 사 플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의 추천으로 종목국(種牧局 농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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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시험장의 후신)의 고문으로 초빙되었으나 1902년 젖소 20두가 전염 병으로 모두 폐사하자 그 책임을 물어 그해 10월 해촉하였다. 그는 재임 중 현 광진구 자양동(락천정 일대)에 있던 종목국의 축산시험 부분을 도 심에 가까운 신촌역 근처로 옮긴 사람이다.

1904년에는 일본인 아까가베(赤壁次郞)가 농상공학교 농과교수로 초 빙되었다. 강의 통역은 일본 구마모도(熊本) 농업학교 출신의 이장로(李 章魯)교관이 담당하였다. 아까가베는 1906년 일제가 권업모범장(농촌진 흥청의 전신)을 개설코자 할 때 현 수원시 서둔동이 적지라고 선정한 사 람이다. 또 같은 1904년에 일본인 수의사 스가누마(管沼源之助)가 경성 부 공수의(公獸醫)로 공중위생을 담당한 고문으로 초빙되었으나 그 실적 은 알 수 없다.

다음으로 두 번째 부류의 외국인들은 1905년 을사조약이후 일제 통 감부가 설치되자 사실상 이 통감부가 선임한 일본인들을 대한제국이 피 동적으로 위촉 임명한 외국인들이다. 일제 통감부는 1906년 혼다(本田 幸介 독일유학자, 축산전공)외 16인을 권업모범장 개설요원으로 위촉하 였는데 이들은 1907년 권업모범장이 정식으로 개장되자 우리정부가 임 명한 농사시험연구의 기간요원이 되었고 혼다는 장장이면서 1908년부 터 농상공부 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의 전신)의 3대 교장을 겸임하였 다. 또 같은 1906년에 오시기리(狎切祐作) 등 4인의 일인 농학자가 뚝섬 에 개설하였던 원예모범장(1910년 수원 권업모범장에 흡수통합) 연구 요원으로 초빙되었고 같은 1906년 일본인 도요다(豊田眞理)외 6인의 일 인 농학자들은 농상공부 농림학교의 교수로 초빙되어 농업교육에 종사 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인 스미요시(住吉正喜) 등 12명을 농상공부 기술행 정요원으로 초빙하였고 같은 해 미야모도(宮本政蔣) 등 4인을 권업모범 장에, 하야시(林弛作)를 원예모범장의 연구원으로 추가 초빙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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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는 일본인 기시(岸秀次) 등 2인을 농림학교 교수요원으로 추가 초빙하고 이노(井野勇太郞) 등 5인을 권업모범장 연구원으로 재추가 초 빙하였다. 또 1910년에는 사와미야(澤宮四郞)를 농림학교 교수로 재추 가 초빙하여 을사조약(1905) 이전에 7인, 을사조약 이후에 58인 등 모 두 65인의 외국인 농학자 또는 농업기술자들을 초빙하였다. 이들에 대 한 처우는 어려운 정부 재정임에도 고액 급료 이외에 주택비와 연료비, 그리고 부임 및 귀국 여비까지 모두 우리정부가 부담하였다.

이상에서 밝힌 외국인 초빙의 특징을 요약하면 을사조약 이전에는 주 한 해당 외국공관장의 추천을 받아 우리의 자주적 결정으로 대부분 구미 제국의 인사들을 초빙하였고 그 이후에는 일제의 영향 때문에 모두 일본 인 일색으로 초빙되었다. 또, 대부분 농사시험연구나 농업교육에 필요한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농업의 과학화나 서구의 신농업기술 도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부류는 우리정부와 상관없이 선교 목적으로 왔거나 기업인으 로 우리나라에 와서 농원을 경영하거나 새로운 농작물의 품종을 도입함 으로써 우리 농업에 기여한 외국인 들이다. 조선농업발달사를 보면 선원 (船員)으로 우리나라를 왕래하던 성명 미상의 중국인 선원이 선원을 그 만두고 1887년 인천에 채원(菜園)을 개설하였다. 채원경영을 하면 성공 할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산동성에서 속이 노랗게 차는 지부(芝罘)라는 품종의 결구(結球) 배추씨를 가져와 재배 판매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속이 차는 결구배추의 재배 기원이 되었다 한다.

그 이전에는 우리나라에 속이 노랗게 차는 결구배추가 없었던 것 같다.

1889년에는 캐나다인 선교사 펜위익(M.C.Fenwick 한국명 片爲益) 이 양배추, 셀러리 등 서양채소 종자를 가져와 황해도 소래(蘇來)에서 채 소농원을 경영하다가 1896년부터는 원산에 미국의 사과와 배나무 묘목 을 들여다 과수원을 경영하였다. 또 황성신문(皇城新聞 경성신문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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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광무 6년(1902) 5월 29일자 과수수리(果樹收利) 제하의 기사를 보면

“원산항에 거류하는 영국인 모씨가 넓은 택지를 구입하여 능금과 포도 등 과수를 많이 재배하였는데 매년 이익이 2천 원이 넘는다 하더라.” 하 는 기사가 있다. 이 영국인은 아마도 1880년에 개항한 원산세관에 초빙 되어온 관세고문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의 2천 원은 목수(木手) 10년간 의 월급과 맞먹는 액수라 하니 꽤 큰 돈이다.

또 1892년에 캐나다인 선교사 하디(R.A.Hardie 河鯉泳)도 원산에서 미국종 사과와 배나무 묘목을 들여다 과수원을 경영하였다는 기록이 있 다. 1901년에는 일본인 하라다(原田鐵策)가 일본에서 사과 왜금(倭金), 축(祝), 홍옥(紅玉), 홍괴(紅魁) 등의 묘목을 가져와 평안남도 남포(南浦) 에서 사과농원을 경영하였고 같은 1901년 불란서인 신부 안토니오 곰 베루(공안국)는 미사 때 쓰는 포도주를 만들고자 안성 구포동 성당에 포 도품종 마스켓을 가져다 재배한 것이 안성포도의 기원이 되었다 한다.

1902년에는 제주에 와있던 불란서인 신부 에멜타케가 제주에 자생하 는 왕벚꽃나무를 일본에 와있던 식물학자로 신부인 불란서인에게 알리 자 그가 감사한 나머지 일본에서 개량된 중국 원산의 온주밀감(溫州蜜 柑)묘목 14그루를 보내왔는데 이것이 제주의 재래품종보다 우수한 오늘 날의 제주감귤의 원조가 되었다.

1904년에는 일본인 모리시다(森下仙吉)가 일본에서 사과 홍괴와 중성 자(中成子) 품종, 그리고 배 명월(明月)품종 등의 묘목을 일본에서 가져 와 원산에서 과원을 경영하였는데 이로써 앞에서 밝힌 세 사람까지 모두 4개의 농원이 원산에 개설된 셈이다. 원산은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인 원산학사(元山學舍)가 개교하여 서양농학서인 농정신 편(農政新編)을 교재로 쓴 바 있는데 이러한 신식교육에 4개의 농원개설 등이 농업선진지가 되어 현재 북한 제일의 농대가 평양에 있지 않고 원 산에 있게 된 원인의 하나가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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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04년에는 일본인 가게야마(影山秀樹)가 사과 홍괴, 축, 유옥(柳 玉), 홍옥 등의 묘목을 일본에서 가져다 대구에서 과원을 개설함으로서 대구 능금의 기원이 되었고 대구가 사과 명산지가 된 것이며 1905년에 는 일본인 후지다(藤田明)가 일본에서 사과 홍괴, 축 등의 묘목을 가져와 황해도 황주에서 과수원을 개설함으로서 황주가 사과 명산지가 되는 기 원이 되었다. 또 같은 1905년 일본인 도가와(戶川龜喜相)는 일본에서 품 종미상의 사과와 배 묘목을 가져와 경남 구포에서 과수원을 경영하였다 는 기록이 있으며, 1906년에는 일본 마쓰후지(松藤田六)가 일본에서 배 금촌추(今村秋), 명월 적용(赤龍) 품종 등의 묘목을 들여와 전남 나주에 서 배나무 과수원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나주 배 명산지가 된 기원이다.

그 후 1911년에도 불란서인 신부가 일본에서 다시 개량된 온주밀감 의 묘목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부의 성명이나 그루 수는 밝혀져 있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 산야에 널리 분포되고 있는 북미 원산의 아카시아 (acacia)나무는 독일총영사 크루거가 1915년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 에게 권고하여 중국 산동성 친다오(靑島)에서 수만 그루의 묘목을 들여 와 부지공사로 붉게 노출된 용산의 일본군 사령부 부지에 사방용으로 심 은 것이 최초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아카시아나무 재배의 기원이다.

그러나 이때 프랑스어 학교장이었던 에멜마텔은 총독에게 아카시아가 번식력이 지나치게 왕성하여 원하지 않는 곳까지 자라나가니 심지말라 고 권고하였으나 허사였다는 일화가 있다. 아카시아는 광복후 산림녹화 의 좋은 조림수(造林樹)였고 현재 목재나 연료뿐 아니라 밀원(蜜源)식물 로 더욱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1918년에는 경성(서울)수사원(修士院)에 와있던 독일인 신부 퀴겔겐 (具傑根 1884~1964)이 꿀벌 기르기에 관해 양봉요지(養蜂要誌)라는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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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현대식 양봉교재를 편찬, 150부를 인쇄 배포하였다 한다. 그 내용 은 독일식 양봉기술이다.

또, 현재 잘 알려진 임실(任實)치즈는 1967년 임실성당의 지정환(디 디에세스테벤스)신부가 산양 두 마리로 시작한 낙농(酪農)이 그 기원이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상에서 필자의 비망록에 틈틈이 기록해 두었던 외국인들의 활동을 간단히 여기에 초록하였다. 그 외국인들 중 특별히 고마운 분들은 우리정 부의 부담 없이 스스로 찾아와 새 품종의 농원을 경영함으로서 결과적으 로 우리 농민에게 시범농가나 전시농원의 역할을 하게 한 선교사들이다.

결구(結球)배추, 사과나 배의 여러 신품종 도입과 명산지 조성, 안성포도, 강화순무, 온주밀감, 밀원식물이 된 아카시아, 임실치즈 등이 모두 외국 인들에 의한 것이며 농원경영의 기법(技法)도 이들이 선도한 것이었다.

5.16후 경제개발기였던 ’60~’70년대 농촌지도의 한 방법이 수많은 시범포, 전시포, 모범농가 조성이었다. 시각을 통한 기술보급은 전달이 빠르고도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그 역할을 선교사 중심의 외국인들이 개화기에 앞당겨 실시함으로써 우리농업의 근대화를 선도하였다. 이러 한 모범농가를 통한 시각적 농촌지도는 우리 선인들도 일찍이 알았던 것 같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재정경제규정인 호전(戶典)에 장려하고 권장하 라는 장권(獎勸)조항이 규정되어 있다. 그 내용은 농업의 여러분야중 한 가지라도 특이하게 힘써 잘하는 자(力業特異者)가 있으면 이를 본받도록 다른 농민들에게 적극 권장하라는 조항이다. 5백 년 전에 이미 시범농가 를 본받도록 농업의 시각적 교육을 권장한 규정이다.

그런데 개화기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애석한 감을 금할 수 없다.

이 시각적 교육은 간데없고 일본은 외국문물을 적극 수용할 때 우리는 쇄국주의로 일관하였고 다섯 번의 종교탄압으로 처참한 사옥(邪獄)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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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켜 수많은 카톨릭 신자와 외국인 신부들을 학살하였다. 그 수준은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의 경우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으로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恩彦君) 부부까지 처형하는 혹독한 수준이었다.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용어가 없다고 하지만 만일 쇄국주의나 종교탄 압이 없었다면 선교사나 외국인들의 빈번한 왕래를 통하여 더욱 일찍이 더욱 다양하게 우리 농업의 근대화를 앞당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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