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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마소의 대명(對明)교역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116-123)

조선 태조 1년(1392)부터 태종 18년(1418)까지 3대에 걸친 왕들의 재임기간은 모두 27년간이다. 이 기간 중 조선왕조실록에 가축이나 들 짐승 그리고 맹금류 등 축정(畜政)이나 동물에 관련된 기록들은 모두 189개 항목이나 된다. 그러나 연평균으로 보면 1년에 겨우 7개 항목으 로 농정(農政)의 타 분야에 비해 매우 희소한 편이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가축은 소, 말, 양, 염소, 돼지, 개, 닭, 오리, 거 위, 매, 꿀벌 등 11종이며 들짐승은 사슴, 노루, 코끼리, 기린 등 4종류 다. 그러나 가장 빈번하게 기록된 축종은 말(馬)이며 그 빈도는 27년간

3.1. 조선초기 마소의 대명(對明)교역 3.2. 조선시대의 우역사(牛疫史) 3.3. 원(元)나라의 제주목장 100년 3.4. 비싼 수업료 치른 대단위 한우목장 3.5. ’70년대 양돈파동에서 얻은 것 3.6. 경제개발초기, 일거양득이었던 잠사업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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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개 항목 중 모두 233회 이상이나 된다. 한 항목 중에서도 두 번 또는 세 번씩 말이라는 용어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 다음으로 빈번히 기록된 축종은 소로 모두 45회, 양이 10회, 돼지 가 6회, 오리가 4회, 닭이 3회, 염소가 3회, 개가 3회, 거위가 2회 등이 며 기타의 동물은 한 번씩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무엇 때문 에 실록에 기록된 축종별 기록의 빈도를 살피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축의 명칭이 많이 기록된 가축일수록 당시의 축정의 초점이 집중된 가 축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초기의 축정은 말과 소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고(本稿)에서는 조선초기의 축정으로 마소에 관해서만 풀이코자 한다.

말의 용도를 먼저 밝히면 말은 승마(乘馬)용, 짐을 나르는 타마(馱馬) 용, 통신용 치마(馳馬) 등으로도 쓰이나 조선시대에는 전투용 전마(戰馬) 로의 역할이 가장 컸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마정(馬政)은 일관 되게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兵曹)의 승여사(乘輿司)와 직속기관인 사복 시(司僕寺)에서 담당하였고 각 도에서는 해당도의 병마절도사가 담당하 였다. 만일 말이 가축으로의 역할이 더 컸었다면 일반 농작물과 재정경 제를 다루는 호조(戶曹) 판적사(版籍司)가 담당하였을 것이다.

이제 조선 초기 말의 국가적 이용을 살펴보면 첫째가 말의 외교적 이 용이었다. 예컨대 태조원년(1392) 10월 25일의 실록에 “정도전(鄭道傳) 을 명경(明京 연경)에 보내 말 60필을 바치다.”라는 기록과 태조원년 12 월 계해일의 실록에 “사은사로 연경(燕京)에 가는 우인열(禹仁烈)이 말 30필(匹)을 바치고 왔다.”는 기록들을 시작으로 태조3년(1394)9월 무오 일의 실록에 “중추원부사 손흥종(孫興宗)을 경사(京師 연경)에 보내 종마 (種馬) 50필을 바치다.” 하였다든가 태조 5년(1396) 6월 신축일의 실록 에 “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 등을 경사에 보내 좋은말(良馬) 12필을 바 쳤다.” 하였다.

제3장 축잠고금󰋸109

태종 7년 9월 을해일의 실록에는 “세자(世子)가 명경(明京 연경)에 가 서 황제에게 50필의 말을 바치고 명나라 동궁(東宮 세자)에게 10필을 바 치다.”라고 한 것과 같이 말은 연례적으로 중국에 공물(貢物)로 보냈는데 이를 현대적 용어로는 외교용으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말은 우리나라가 강대국인 명나라에 바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규모는 적어도 이웃 일본에서 공물로 받기도 하였다. 예컨대 태종 5년(1405) 6 월 3일의 실록에 “일본의 지좌전(志佐殿)이 도군(道君)이라 이름하는 중 을 보내 말 2필과 토산물을 왕께 바치다.” 하였다든가 태종 8년(1408) 4 월 10일의 실록에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사신을 보내 말 3필을 바 치다.”라고 한 기록들이 그 예에 속한다. 이 경우 말은 이웃 나라간 선린 외교의 매개체였다. 말의 외교적 기증은 비단 국제간뿐 아니라 국내에서 도 행하여졌다. 태조 4년(1395) 7월 갑진일의 실록을 보면 “제주왕자(濟 州王子) 문충보(文忠甫)가 와서 양마 7필을 바쳤다(濟州王子文忠甫來獻良 馬七匹)”라고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인 것은 제주왕자라 고 기록할 만큼 이 시기 제주가 조선조정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섬 지역 이었던가 하는 의문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이 시기 말은 누가 어떤 이유로 주든 누구나 싫어하 지 않고 수용하는 값진 재화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간 이소사대(以小 事大)나 선린외교의 손쉬운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말의 국제간 교역품으로의 이용이다. 태조-태종년간 명나라가 우리나라에 말을 요구한 횟수는 모두 5회에 걸쳐 42,880두였다. 그 이 유는 주로 명(明)나라에 쫓겨 몽고로 옮겨간 북원(北元)정벌을 위한 요구 였다. 명나라의 그 요구는 강제성이 있었지만 일단 이 요구에 응해 보낸 말에 대해서는 무상이 아니라 대부분 보상이 뒤따랐다.

강제성이 있었다는 뜻은 말 얼마를 언제까지 보내라고 일방적으로 통 보하였다든가 태종 1년 9월말 일만 필을 보내라고 하였을 때 4천 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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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무렵 일만 필을 오천 필로 줄여달라고 요청한 것을 명나라가 들어 주지 않은 데서도 이해할 수 있다. 또 보상을 요구하거나 적절한 가격을 제시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말을 보내라는 징마(徵馬) 요구나 말 가격을 정하여 보내는 것 등 모두가 강대국인 명나라가 일방적으로 결정 한 것이다. 따라서 이를 최근의 무역관행에 비추어 보면 말의 정상적 교 역으로 보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일단 말을 보내고 그 대가를 지불해온 대로 받은 셈이 되니 이를 일응 말의 교역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된 다. 그러기 때문에 실록에도 징마(徵馬)라 하지 않고 역환마(易換馬)라 하여 물물교역으로 바꾼 말이라고 표기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명나라에 보낼 말의 국내 수집은 기록은 없으나 제1차로 국영목장에 서 가려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믿는 까닭은 고려시대 전마(戰馬) 육성을 위해 10개 국영목장이 있었고 태종 5년의 기록에 국마(國馬 국영목장의 말)이라는 용어가 보일뿐 아니라 후일의 기록이긴 하지만 현종 4년 (1663)의 조선시대에도 138개소의 국영목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영목장에서 가려내도 부족할 경우 태조 3년 4월 을해일의 기록을 보면 현직 관료들이나 전직관료(散官)에게도 말을 공출(供出)토 록 명하고 있다. 이렇게 수집된 말들은 수집 되는대로 초운(初運) 500필 (匹), 이운(二運) 1,000필 하는 식으로 일정규모씩 일정간격으로 나누어 보내되 도착지는 매양 중국의 요동(遼東)이었다. 보내는 시기는 명나라 가 지정한 시기보다 늦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통사(通事 통 역)를 일시 유배시킨 경우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어려움은 실록상 기록 이 없었다. 명나라가 정한 액수의 말이 모두 인도 되었을 때 명나라가 일 방적으로 정한 마가(馬價)가 현물로 보내져 왔다. 예컨대 태조 2년 (1393) 6월 경진일의 실록에 9,880필의 말을 보낸데 대하여 사면포(絲 緜布 햇솜실로 짠 면포) 19,880필, 면포(緜布) 9,880필을 현물로 보냈 다는 통보(咨文)를 받고 우리 정부 중추원사 조림(趙琳)이 중국 요양(遼

제3장 축잠고금󰋸111

陽)에 가서 이를 받아 가지고 와서 출품자들에게 출마수대로 나누어 주 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 1필당 사면포 2필과 면호 1필씩이 된다.

또 태종 원년(1401) 9월 15일의 실록을 보면 명나라의 국자감생(國 子監生) 송호(宋鎬) 등 4인이 면포(緜布) 9만여 필과 약재(藥材)를 용차 (用車) 150량(輛)과 우마 3백 마리에 실어 가져왔다고 하였고, 태종 3 년(1403) 5월 1일자의 실록을 보면 말 1천 필씩 일곱 번째(七運馬) 보 냈을 때 단자(段子?) 1,500필(匹), 비단(絹) 13,000필, 면포 6,500필 을 말 값으로 주고 가며 단자 928필, 비단 5,380필, 면포 308필을 더 두고 가면서 역마(易馬) 909필을 추후에 보내주기로 하였다고 기록되 어 있다.

이상 세 가지 경우의 말 값이 면포나 비단 등 모두 현물로 결제 되었 는데 그 말 값이 적절한 가격이었는지 아니면 억울하고 참기 힘든 헐값 이었는지는 말 값으로 준 현물이 그때마다 다르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 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명나라가 강대국이라고 우리나라 말을 억울하 게 무상으로 강탈한 것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이에 더 추가할 것은 말을 요구대로 모두 보냈을 때 말값 이외에 명나 라 황제가 우리나라 임금에게 치하하는 감사품(포상품)이 주어졌다는 사 실이다. 예컨대 태종 8년(1408) 4월 16일의 실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 등이 와서 역환마(易換馬) 3천 필을 모두 보낸데 대하여 그 사 례로 화은(花銀 장식품) 40개와 저사(紵絲 모시실) 50필을 드렸다(呈)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은 국가 간의 교역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국경을 넘어 매매된 것 같 다. 태종 6년 2월 4일자의 실록을 보면 평안도 민간인이 압록강을 건너 마필을 매매함을 금한다 하였고 또 동북면(함경도)의 말은 연령, 털빛 등 을 기록한 마적(馬籍)을 만들어 그 말에 낙인(烙印)을 찍어 허락 없이 말 이 왕래함을 금하며 이에 위반한 자는 베 50필을 벌금으로 거두어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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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한 자에게 주고 마주(馬主)는 법대로 처단한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 문이다.

조선초기에는 말 뿐만이 아니라 소(牛)도 명나라와 역환(易換)의 대상 이 되었다. 태종 4년(1404) 4월 18일자의 태종실록을 보면 “명나라 사 신 한첩목아(韓帖木兒)가 명나라 예부(禮部)의 외교문서를 가져왔다. 그 문서에 조선에 소가 많이 산출되니 갈이소(耕牛) 1만두를 요동에 보낼 것 이며 그 댓가로 소1두당 비단 1필, 포(布) 4필, 착(着?) 2부(部)를 이미 요 동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조선조정은 같은 4월 28일 1천두 를 비롯, 매회 1,000두씩 10회에 걸쳐 동년 6월 16일까지 도합 1만두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시절에 2개월 미만에 평균 6일 간격으로 기 다렸다는 듯이 1만두의 소를 압록강 건너 요동까지 송출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기동성 있는 작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로 보면 당시 태종의 업무 추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이 간다. 1970년대 낙농진 흥을 위해 외국에서 젖소를 도입할 때 선박이나 화물차로 도입했어도 이 렇게 신속히 도입할 수 없었다. 다시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11월 6일자 의 실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 유경(劉璟)이 칙서(勅書 황제의 친서)를 가져 와 “갈이소(耕牛) 1만두를 보낸데 대하여 치하의 뜻으로 저사(紵絲) 30 필, 숙능자(熟綾子) 30필, 채견(彩絹) 1백 필을 상(賞)으로 가져왔다. 왕 은 이것을 조정 고관들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15세기 초 마소의 보호육성을 위해 조선조정은 어떤 시책을 베풀어 왔을까?

첫째는 우수한 종축(種畜)의 확보와 보호였다. 태종 7년(1407) 3월 29 일자 실록을 보면 사복시(司僕寺)에서 제정한 마정사목(馬政事目 마정규 칙)에 “말을 모두 거세(去勢)하면 좋은 말의 씨가 절종될 위험이 있으니 거 세하지 말 것이며, 병들어 거세하여야 할 말이라도 병조(兵曹)나 수령(守 令)에게 고하여 심사를 받아 낙인(烙印)을 찍은 후 거세토록” 엄격 규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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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이는 현대 과학으로 양질의 유전자 보존을 위한 보호규정이다.

둘째는 마소의 증식이다. 태종 7년(1407) 11월 갑진일의 실록을 보면

“관찰사가 수령들의 근무상태를 평가하여 포폄(褒貶)할 때는 그 고을 마 필의 번식여하를 참고하여 평가하라”고 하였다. 또 태종 6년 7월 9일의 실록을 보면 제주목장 사의(事宜 준수사항)에 “4세 이상의 암말은 10필 당 7~8필의 새끼 말을 생산할 때 이를 상(上)등으로 평가하여 그 담당자 를 영전시키고 5~6필을 생산할 때 이를 중등으로 하여 고실마(故失馬) 6 필에 한필을 보상토록 하고 4필 이하를 하등으로 하되 고실마 4필에 1 필을 보상토록 규정”하여 마필증식에 힘쓰고 있다.

셋째로 마소의 보호육성이다. 마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말라는 것이 다. 태조 7년(1398) 9월 15일자의 실록을 보면 임금께서 “사사로이 마 소를 도살함에는 마땅히 이를 금지하는 법령이 있어야 한다.” 하였고, 12월 무신일의 실록에는 “마소도살을 금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태 조 4년(1395) 7월 1일자 실록을 보면 “금후 말린 말고기를 세공(歲貢)으 로 바치지 말라.” 하였는데 제주 풍속에 매년 12월이면 살찐 암말을 잡 아 포(脯)를 만들어 진상한데 대하여 임금께서 마소 보호상 금후 이를 금 한 것이다. 말고기 뿐 아니라 우유나 말젖(馬湩)도 절약토록 하고 있다.

태종 16년(1416) 3월 임인일의 실록을 보면 “궁중 각 전(殿)에 올리 는 우유와 말젖도 감하고 각 전 이외에는 일체 공급을 금하라.”는 왕명 이 기록되어있다. 모두 마소 보호 때문이다.

이 무렵에는 달단(韃靼)족의 유민인 화척(禾尺 재주놀음꾼)이나 양수 척(楊水尺 남사당패)들이 생업으로 마소를 훔쳐 도살하며 생활하였던지 태조 원년(1492) 9월 24일자의 실록과 태종 6년(1406) 4월 24일자의 실록에 “이들의 마소 도살을 금하여 마소를 보호토록 하되 유랑하는 그 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도록 유도하라.”는 기록이 있다.

또 이 무렵에는 호랑이가 자주 마소를 물어죽였던지 태종 5년(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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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자 실록을 보면 “매도(煤島) 목장에 큰 호랑이가 침입하여 국마 (國馬)를 상하게 하였다. 이 무렵엔 외딴섬에도 호랑이가 있었던 모양이 다. 강화부사가 호랑이를 포획하니 태종이 상을 주었다.”고 되어 있다.

상은 호랑이를 잡아 국마를 보호한 공로 때문이다.

이상 조선초기의 마소의 종축확보와 증식, 그리고 보호에 대하여 요 약하였다. 그 방법은 비록 현대에 비하여 미숙한 점이 있으나 그 생각(사 상)의 방향은 현재와 다를 바 없다. 문명을 향한 사고의 방향은 예나 지 금이나 다름이 없다. 다만 얼마나 더 과학적이냐 하는 차이 뿐이다.

이 글은 강면희(姜冕熙)가 실록에서 축정부분을 초록하고 번역하여 1973년 고대(高大) 농림논총 제13집에 게재한 내용을 필자가 체계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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