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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농촌사회와 향약(鄕約)

문서에서 농업사 산고(散稿) II (페이지 158-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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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에는 민주화 바람이 계급타파에 부채질을 하였다. 예컨대 5.16 후 혁명군부가 그들의 결속력을 득표수단으로 이용코자 전국구 의 원을 미끼로 축산기업조합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손, 사돈의 팔촌까지 수백만 표를 득표수단으로 연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사당패는 오늘날 극단이나 배우, 가수 등 인기 직종으 로 발전하였고 백정인 식육상은 기업인으로 발전하여 조선일보 2021년 3월1일자 7면의 전면광고를 보면 “갈비 먹고 힘내세요.” 하는 억대의 광 고까지 내는 재력가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최하 천민이 민주화시대의 최상층 귀족이 된 것이다. 계급타파의 결정적 시기는 1970년대 제3차5 개년계획이 추진되면서 도시공업의 발전으로 농촌인구가 줄면서 사람이 귀해지자 농촌의 사민평등은 완전히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 원고 작성에는 이우성의 ‘한인(閑人)과 백정(白丁)의 신해석(1962 역사학보)’, 이세영의 ‘19세기 농촌사회의 계급구조(1991 한신대 논문 집)’, 이태진의 ‘고려 말 조선 초의 사회변화(1982 역사학보)’, 이능화의

‘조선관노의 기원(1930 조선)’, 이와사끼(岩崎繼生)의 ‘조선의 백정(1932 조선)’, 다나까(田中德太郞)의 ‘조선의 사회계급(1921 조선)’, 하마나까 (濱中昇)의 ‘여말선초의 한량에 대하여(1967 조선)’ 등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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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까닭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고려시대이래 조선조의 소년교육 중심의 교육정책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정부의 공식교육기관인 서울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 (鄕校), 그리고 사학(私學)인 서원이나 서당 등에서 가장 초보적인 교재 로 쓰이는 게 천자문에 이은 동몽선습(童蒙先習)이다.

그 내용에 가장 강조된 내용이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가정과 국가 를 지키는 삼강에 사회기강을 밝히는 오륜이 더해진 것이다. 곧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가 삼강이며 부자간, 군신간, 부부간, 장유(長幼)간, 친구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가 오 륜이다. 이 초보적 교육을 통해 굳게 지켜온 삼강오륜은 조선사회 성인 들의 체질화된 덕목이 되었다. 그것이 조선사회를 법 없이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한 덕목이라 여겨진다.

이에 더하여 고려 말에 도입된 주자(朱子) 중심의 성리학이 도입될 때 이에 묻어 들어온 중국의 향약(鄕約)이 조선시대의 도덕적 사회규범을 더욱 공고하게 다졌다고 믿어진다.

그렇다면 성리학에 묻어 들어온 중국의 향약(鄕約)이란 무엇이었던 가? 이를 한마디로 요약할 때 주민자치로 마을사회가 서로 지켜야 할 사 회규약이다. 이 향약의 기원은 중국 송(宋)대의 람전여씨향약(藍田呂氏 鄕約)에서 비롯된다. 람전이란 중국 섬서성 서안의 동남방에 위치한 람 전현의 고을이름으로 여기에 살던 여씨(呂氏)가 창안한 것이다. 이름하 여 「람전여씨향약」이라 부른다.

여씨네는 대충(大忠), 대균(大均), 대방(大防), 대림(大臨)의 사형제가 모두 출중한 유학자들로 덕이 있는 형제들이었으나 둘째인 대균이 주민 자치의 향약을 만들어 그 형제들의 협력으로 고을의 기풍 순화에 성공적 기여를 하게 됨에 급기야 온 나라에 이 향약실천이 전파되게 되었다.

그 향약의 내용은 네 가지로 대별된다. 그 첫째는 “덕이 되는 일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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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행하기를 서로 권하며(德業相勸), 과실이나 허물은 서로 규제하고 (過失相規), 미풍양속은 서로 교류(장려)하며(禮俗相交), 어려운 일들은 서로서로 돕자(患亂相恤)는 네 가지 덕목이다.

이 덕목이 더욱 빛나고 실천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은 남송(南宋)의 주 자(朱子 1130~1200)가 이를 현실에 맞도록 증보하고 이를 널리 시행토 록 권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라고 이름한다. 그 내용 을 정조 10년(1786)에 편찬된 우리나라의 향약절목(鄕約節目)에서 찾아 보면 “각 면(面)마다 덕이 있는 원로 한 분을 대표격인 도정(都正)으로 추 대하고 또 학술과 덕행이 있는 한 분을 부정(副正)으로 추대한다. 또, 행 실이 좋은 자 한두 명을 직월(直月 오늘날의 간사 또는 총무)로 선임하되 직월만은 1년 임기로 매년 교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면단위 향약모 임의 조직과 구성이다.

여기서 밝힐 것은 수장인 도정은 학문은 없어도 덕행이 있는 원로로 고령자가 그 추대조건이고 부정은 연령에 관계없이 학술에 밝으면서 덕 행이 추대요건이다. 또 간사격인 직월은 학문이나 연령에 관계없이 덕행 만이 선임 조건인데 임기는 도정과 부정은 종신직이고 직월만이 1년 임 기로 되어있다. 세 가지 직책의 공통점은 덕행이다. 향약의 사무를 보면 직월은 세 개의 장부를 비치하되 그 한 장부에는 모범된 덕행자의 명부 로 그 성명을 기록하고, 또 하나의 장부에는 허물이 있어 규제할 자의 명 부로 하라는 것이었다.

이어서 향약의 사업인 네 가지 덕목을 풀이하고 있는데 첫째인 덕업 상권(德業相勸)의 덕업을 주자의 증손향약에서 찾아보면 덕(德)과 업(業) 으로 나누어 “덕이란 착한 것을 보면 반드시 행하고 과실이 있음을 들으 면 반드시 고칠 것이며 능히 자기 몸을 다스리고 능히 그 집안을 다스리 며 능히 부형을 섬기고 능히 그 자제를 가르치며 능히 종들을 통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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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나라의 정교(政敎)를 엄숙히 지키고 어른을 섬기며 능히 친척 간에 화목하게 하는 등 무려 23개의 세세한 실천사항을 예시”하고 있다. 또, 덕업의 “업(業)의 내용도 집에 있을 때는 부형을 섬기고 자제를 가르치며 처첩을 화목하게 대할 것이다. 밖에 있을 때에는 어른을 섬기고 벗(友)을 덕으로 사귀며 이웃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독서와 농사에 힘쓰며 법령을 두려워하고 조세를 잘 납부하는 등 모두 13가지를 예시”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둘째의 과실상규나 셋째의 예속상교, 그 외 넷째의 환란상휼에 대한 주자의 세세한 예시는 생략하거니와 요컨대 향약 전체가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은근히 강제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두가 추대한 지도자의 통솔에 따라 서로 권면하고 서로 견 제하여 자기 고장을 법 없이도 살기 좋은 이상향으로 만들자는 것이 향 약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향약을 증보한 주자는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어 떻게 받아들여지는 존재였던가? 주자는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 이를만 큼 신유학을 집대성한 분으로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사서집주(四書 集註),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을 저술한 대유(大儒)로 조선사회 에선 군왕보다도 더 존중되고 공맹(孔孟)의 반열에 버금가는 존신(尊信) 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여씨향약은 주자가 증보하였기 때문에 주자의 학 덕에 힘입어 더욱 존중되어 조선의 유교사회에 깊이 침투될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향약이 국가의 권장사항으로 정책화한 시기도 도학정치를 표방하던 시기였다. 함양의 선비 김인범(金仁範)이 중종 12 년(1517) 향약의 시행을 왕께 진언하자 중종은 중신들에게 이를 연구 검토토록 하였고 다음해인 중종 13년(1518)에는 김안국(金安國)이 여씨 향약을 우리말로 번역한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를 편찬 배포하게 되었으며 중종 14년(1519)에는 대사헌 조광조(趙光祖)와 대사성 김식 (金湜) 등이 여씨향약을 전국에 권장토록 진언하여 드디어 전국에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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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된 것이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이나 향약뿐 아니라 주자의 말이라면 과하다 할 정도로 신뢰하고 추앙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공주목사 신속(申洬)이 1655년 농가집성(農家集成)을 출판할 때 신속은 송시열(宋時烈)에게 이 책의 서문을 의뢰한바 있다. 주자를 존 신하는 송시열은 주자가 현재의 중국 강서성 남강(南康)군과 복건성 장 주(漳州)의 행정책임자로 잠시 근무하면서 권농을 위해 지었던 권농문 3 개가 있는데 송시열은 이를 「농가집성」에 편입토록 권한 바 있다. 그런 까닭으로 「농가집성」에 주자의 권농문이 편입되게 된 것이다. 불행히 주 자의 권농문은 중국 양자강 이남의 농법을 다룬 것으로 자연환경이 우리 나라와 다른 강남의 농법은 우리 농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 다. 이 말을 여기서 굳이 밝히는 뜻은 조선의 유림사회는 주자의 말이라 면 그 내용 여하에 관계없이 덮어놓고 과신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히고자 함이다.

조선의 농촌사회는 계급사회였다. 최상층 계급이 주자를 존신하는 양 반, 사대부나 유림들이었다. 향약이 비록 민간의 자치적 활동이지만 지 배계급인 상층계급이 앞장서 선도한 향약이 대부분이 상민(常民)이나 천 민(賤民)으로 구성된 향촌사회에서 시행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조선시대 향약의 실행상황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향약이 시행된 최초의 기원은 기록상 태조 7년 (1398)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조는 친히 그의 향리인 풍패향(豊沛鄕)에 향헌(鄕憲) 41개 조항을 제정하여 시행하였다고 한다. 후일 이 41개 조 항은 태조의 손자 효령대군에 의해 증보되어 여러 향읍에 권하였다고 하 나 그 시행정도는 밝혀져 있지 않다.

향약이 가장 잘 시행된 사례를 들어보면 이퇴계(李退溪)의 예안향약 (禮安鄕約)과 이율곡(李栗谷)의 해주향약(海州鄕約)이 대표적이다.

먼저, 명종 11년(1556)에 제정 시행된 현 안동 예안면의 예안향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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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의 덕목인 과실상규(過失相規)의 세목만을 예시해 보고자 한다. 첫 째의 덕업상권(德業相勸)은 앞에서 예시하였기 때문에 둘째의 과실상규 를 예안향약에서 예시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부모에게 불손한자, 형제 간에 서로 다투는 자, 부부간 불화 등 집안이 어지러운 자, 관청 일에 간 섭하고 망령되게 위세를 부리는 자, 향장(鄕長)을 능욕한자, 수절하는 과 부를 꾀어 더럽힌 자들은 가장 무겁게 벌하고(極罰) 친척 간에 불목하거 나 본처를 소박하거나 이웃끼리 불화 하거나 무리지어 서로 꾸짖고 때리 는 자, 염치불구하고 풍속을 해치거나 약자를 침탈하거나 관청에 시비를 걸거나 거짓말을 지어 남을 함정에 빠뜨린 자, 어려운 이웃을 보고도 구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는 자, 이웃의 혼사나 초상 때 무심히 보내는 자, 관청에 순종하지 않거나 향론(鄕論)에 반대하고 원수를 짓는 자 등은 중벌(中罰)로 다스린다.

또 공회(公會)가 있을 때 뒤늦게 오거나 제때에 와도 제자리에 앉지 않 고 순서를 문란하게 한 자, 좌석이 시끄럽게 떠들거나 빈자리에 드러눕 거나 무고히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는 자는 하벌(下罰)로 다스린다 는 내용이다. 여기서 벌의 수준은 극벌, 중벌, 하벌로 이해되나 벌을 무 엇으로 어떻게 주느냐 하는 것은 밝혀져 있지 않다. 곤장을 치는지, 친다 면 벌의 수준에 따라 몇 번씩을 차등 있게 치는지가 의문이다. 필자의 경 험으로 1940년대 초 마을(부여 홍산 조현)의 풍기문란자를 벌할 때 곤 장이 아니라 온 동네가 나서서 살림을 모두 꺼내어 거리에 쌓아두고 마 을에서 떠나도록 한 사실을 목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퇴계 가 주도한 예안향약은 퇴계의 제자 중심의 퇴계학파에 의해 영남지방에 널리 확산 보급되었다.

예안향약 이후 십여 년이 지나자 가장 완비된 해주향약(海州鄕約)이 이율곡(李栗谷)에 의해 시행된다. 율곡은 선조4년(1571) 청주 목사로 재 직시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어 시행한 바 있다. 그 후 파주, 해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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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그러하였다. 그중 가장 충실한 것은 황해도 관찰사와 부제학을 거 친 후 해주 석담(石潭)에 은거하던 선조10년(1577)에 입안 실시한 해주 향약이 으뜸이라 한다.

율곡은 해주 고산(高山)면 석담리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여기 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는 한편 해주향약을 지어 실천하였다. 또 석담리에서 남쪽 2킬로 지점인 가좌면(茄佐面) 야 두취야리(野頭翠野里)에 사창(社倉)을 지어 곡물을 비축하였고 절량농가 를 돕기도 하였다.

해주향약도 향약의 첫째 덕목인 덕업상권에 부모에게 효도하기 등 모 두 11개 조항이 예시되어 있고 둘째 덕목인 과실상규도 불효자 상전을 배역(背逆)한 하인, 형제간 불목한 자 등 6개 종목에 걸쳐 해당자는 상벌 (上罰)에 처하는 등 수많은 예시들이 있으나 지면관계상 모두 생략하고 향약의 셋째덕목인 예속상교(禮俗相交)만 풀이코자 한다.

첫째 둘째 덕목은 앞에서 주자나 퇴계의 향약풀이에 예시하였기 때문 이다. “무릇 자기보다 20세 이상인 분은 존자(尊者)로 대접하고 10세 이 상인 분은 어른(長者)으로 대하며 길에서 같은 계원의 존자를 만나면 말 에서 내리되 존자가 내리지 말라고 할 때는 말 위에서 부복한다. 어른을 만났을 경우 반드시 절하고 장자(長者)는 공손히 손을 들어 읍(揖)만으로 답례한다. 자신보다 연령이 많지 않더라도 덕이 있는 자는 어른 대접을 한다. 어른들에게 반드시 세배하고 자녀나 손자녀 혼사 시에는 쌀 3두를 주되 하인에게는 그 반만을 준다. 향약 계원 중 70이상의 고령자나 사마 시(司馬試 진사 생원시험) 급제자로 관리가 된 자는 각기 과일 한 가지를 가지고 공처에 모여 하례한다. 계원 중 삼년상(喪)을 마친 자를 위로한 다. 계원 중 초상이 나면 모두 가서 문상하고 장례, 소상, 대상(大祥) 때 도 위문한다. 이때 다소의 쌀을 가지고 간다. 계원 본인의 상일 때는 유 사(有司 간사)가 계원들에게 알리어 각자 쌀 한말 씩을 내도록 하고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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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문(祭文)도 지어 도와준다. 상인(喪人)들은 한달이 지난 다음 술을 마실 수 있으나 사대부들은 삼년상중 계속 술을 금한다.”는 내용들이다.

모두 필자가 어릴 때 고향에서 행하거나 보았던 내용들이다. 이와 같은 향약은 정기적인 춘추 모임 때마다 강약(講約)을 통해 반복 교육이 계속 된다.

조선사회는 정책으로 향약이 권장되기 이전인 성종20년(1489) 지방 자치기구로 군현마다 향청(鄕廳)을 두어 수령(守令)을 보좌토록 한 바 있 다. 그 우두머리를 향장(鄕長) 또는 좌수(座首)라 하며 지방의 덕망 있는 사람을 골라 수령이 임명하였는데 그의 업무가 풍속교정, 향리규찰(鄕吏 糾察), 정령시달(政令示達), 민정대표(民政代表) 등으로 그중 풍속교정은 향약과 유사한 내용들이다.

이상 향약에 대하여 개관 하였으나 법 없이도 조선사회가 안정되었던 것은 향약의 영향이 컸다고 믿어지며, 조선조 말기의 허약한 정부가 반 세기 이상 존속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 양보하고 서로 도우며 참고 기다 리는 향약사회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 아닐까 믿어진다.

이 원고는 마쓰다(松田甲)의 ‘이조시대의 향약’, 도미나가(富永文一)의

‘향약일반’, ‘향약절목’(鄕約節目 1786) 등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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