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충암 김정의 교육사상
4) 향약의 시행
성리학의 이념과 윤리로써 국가와 사회질서를 재편하려 한 조선 왕조는 초기 부터 향촌사회 교화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5세기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향사례나 향음주례 같은 향촌 의례의 보급, 유교윤리서의 보급, 정표정책, 향약보급운동 등은 성리학적 향촌사회 교화를 위한 시도들이었다. 그 런데 이렇듯 다양한 향촌교화체제는 16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향약제도로 초점이 모아지는 양상을 보이는데(황금중, 2006a: 423), 충암은 기묘사림 중에서도 적극 적으로 향약의 시행을 추진한 인물이었다.
중종 14년 기묘년 11월 15일, 기묘사화가 발발한다. 기묘사화 발생 3일 후인 11월 18일 사신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조광조의 학문은 김굉필(金宏弼)에게서 나왔으며 외모가 단정하고 말 이 분명하며 풍채가 남들을 감동하게 하므로 사류가 사모하여 문하에 가득히 모여들었 다. 김정(金凈)은 시(詩)에 능하다고 세상에 이름났으며 나이 34세 형조판서가 되어 향 약(鄕約)을 시행하기에 힘썼다.229)
충암에 대해 시에 능해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향약을 시행하기에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충암은 중종 13년 9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이 외방에서 보니 『여씨향약(呂氏鄕約)』이 교화에 크게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보 다 앞서, 불화하던 형제가 뉘우칠 줄 알아서 화합하고 패역(悖逆)하던 자가 고쳐서 양 229) 『中宗實錄』, 卷37, 중종 14년 11월 18일 戊申. “又曰, 光祖之學, 出於金宏弼, 而貌端語辨, 風
彩動人, 士心欽仰, 趨附盈門. 凈以能詩名於世, 年三十四, 而爲刑曹判書, 力行鄕約.”
순하여 졌으니, 사람마다 알아서 행하면 윤기(倫紀)를 후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이 루는 방도에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 그러나 시골의 소민(小民)들이 조정의 뜻을 모 르고 감사의 한때의 영으로 여기기 때문에 모두 말하기를 ‘지금 감사가 갈려가면 그만 둘 것이다.’ 하며, 수령 중에서 더러 모르기도 하니, 이 뜻을 단단히 일러서 조정에서 힘쓰고 있는 뜻을 알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230)
『여씨향약』으로 인해 지방의 교화가 크게 진작되어 백성들의 심성이 순해졌 으며, 윤리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곧이어 충암은 감사에 의한 향약 실시 는 감사가 바뀌면 중단될 우려가 있고, 백성들도 조정의 뜻인 줄 모르니 조정의 뜻임을 알게 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중앙 정부 차원에서 향약 실시에 적극 적으로 나서야 함을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향약 확대에 대한 논의 끝에 중 종은 중종 14년 4월 5일 『여씨향약』을 권면시키도록 전교하였다.231)
충암이 외방에서 보았다는 『여씨향약』은 김안국에 의해 시행된 『여씨향약 언해』 본이었다. 김안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여씨향약』을 보급하고 있었다.
중종 12년 3월,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김안국이 배사(拜辭) 하자 사관은 “그가 영남에 있을 적에는 더욱 교화에 치중하여 유생들에게 먼저 『소학』을 강독(講 讀)하도록 하여 순순(諄諄)히 이끌어 주었다. (중략) 『여씨향약』을 인출(印出) 배포하여 고을 사람들을 권면하고, 충신과 효자의 후손을 찾아내어 예(禮)로 우 대하였다.”232)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중종 13년 4월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 시 지역의 인심과 풍속을 교화하 기 위해 옛 책 중에서 언해를 붙여 반포하여 가르쳤음을 밝히고 있다.233) 김안국 은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에서 체임(遞任)한 다음 조정에 건의하여 각 언해서의 교정본을 전국에 간행·반포하도록 하였다. 이 언해서들 가운데 『여씨향약』은 곧바로 충청도에서 가르치고 어린아이들까지 읽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
230) 『中宗實錄』, 卷34, 중종 13년 9월 14일 辛亥. “金淨曰, 臣於外方, 見呂氏鄕約, 大有關於敎化.
前此兄弟不和者, 知悔而和; 爲悖逆者, 改而順人. 皆知而行之, 則厚倫成俗之道, 豈小補哉. 然鄕曲 小民不知朝廷之意, 而以爲監司一時之令, 故皆曰, 今監司遞去, 則止之云, 雖守令亦或莫之知也. 當 申諭此意, 使知朝廷軫念之意, 可也.“
231) 『中宗實錄』 , 卷35, 중종 14년 4월 5일 戊辰.
232) 『中宗實錄』, 卷27, 중종 12년 3월 15일 庚寅. “其在嶺南, 尤重於敎化, 令儒生先講小學, 諄諄誘 掖, … 印頒呂氏鄕約, 以勸鄕里, 求忠臣, 孝子之後, 優而禮之.”
233) 『中宗實錄』, 卷32, 중종 13년 4월 1일 己巳.
며,234) 다소 논란이 일기는 했으나 결국 명종조 이후 경향을 막론하고 전국에 유 포되었다(김경용, 2017: 9-10). 김안국이 『여씨향약』 언해본을 인출, 배포하였다 는 점은 그것이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했음을 의미한다(윤인숙, 2016).
충암이 향약 시행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이유는 그가 교화를 통한 도덕적인 향 촌 사회 건설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충암은 그의 시 곳곳에서 백성 교화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그러한 점들은 그의 교육사상의 최종 지향점은 치인(治人) 의 대상인 민(民)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충암은 1514년(중종 9) 순창군수를 청하고 외직에 나갔다. 그때 충암은 백성들 의 삶을 보고 크게 우려하고 한탄하는 시를 적었는데 당시 백성들의 삶에 대한 현실인식과 교화를 언급하는 부분만 간추려 인용하고자 한다.
남쪽 변방에 좌천되어 내려오니, 황폐한 산이 바다의 만에서 다하네. … 의관은 도성 과는 거리가 멀고, 도깨비들이 인간 세상의 반이로구나. … 큰 사기꾼이 오히려 곧은 이를 속이고, 여러 포악한 이가 간혹 나약한 이를 짓밟네. 산과 수풀엔 도마뱀과 물여 우가 교차하고, 길거리엔 승냥이와 들개가 다투어 지난다. 누가 다잡아 이를 재목으로 만들까? 순후한 풍속은 아득하여 돌아오지 않네. 근본이 서 있지 않으니, 구차함이 어 떻게 없어지겠는가? 채찍으로 지도해도 마음은 물이 끓듯 하고, 법대로 가르쳐도 머리 가 빠지려 하는구나. 조정에선 국시가 어지럽고, 지방에서는 베풀기가 어렵구나. … 견 식이 비루하나 교화하는 데 보태고, 재잘대면서 봉황에 기탁해 보네. … 곧 인으로 풍 속을 몰아야, 숨은 간사한 무리를 이끌 수 있나니. … 군주를 그리워하면서도 몸은 멀 고, 시대를 아파하면서도 눈물도 흘리누나. … 생민들은 날로 궁핍해져 가는데, 조정의 뜻은 상관없이 한가하구나. … 시대는 어지러움이 이미 극에 달했으니, 태고시대가 정 말 돌아옴인가? 슬피 은나라 주나라 때를 바라지만, 아아 다시 교화되기 어려워라. … 담백하게 하늘이 부여한 것을 따르리니, 높고 맑으면 귀신이 엿볼 게 두렵다네.235)
다소 긴 이 시에서 충암은 당시 백성들의 풍속의 어지러움과 교화의 어려움을
234) 『中宗實錄』, 卷33, 중종 13년 6월 19일 丁亥. “韓忠曰, 臣見忠淸監司, 刊印呂氏鄕約, 以敎鄕中 年少之士. … 監司又擇其耆老, 爲一鄕之所推者, 爲都約正·副約正, 以興勵一鄕. 其所以善俗作民之 道, 無過於此. 臣見鄕中小兒所讀鄕約, 乃金安國所校諺解者也. 須廣印鄕約, 頒于八道可也.”
235) 『冲庵集』, 卷2. 「復用韻述懷, 增至五十八韻, 奉寄昌世文右希和敎」. “謫宦天南徼, 荒山極海灣.
… 衣冠遠王國, 魑魅半人寰 … 大詐還欺直, 群強或暴孱. 山林交蜴蜮, 里巷競豺豻. 誰秉栽成棅, 淳風窅不還. 本原未有立, 婾末詎能刪. 鞭撻心如, 程書髮欲鬝. 巖廊國是惑, 州縣展施艱. … 蒙陋 資開牖, 嚶鳴擬托鸞. … 卽用仁驅俗, 能將道伏姦. … 戀主身同遠, 傷時涕共潺. … 生民日窮蹙, 朝 意任安閑. … 淆漓時已極, 太古儻回環. … 淡泊隨天賦, 高明怵鬼瞯.”
직접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교화가 덜 된 지역이기에 도깨비들이 세상에 반이라 고 인식하고 있으며, 간사한 무리가 나약한 사람들을 짓밟는 등 의롭지 못한 세 상을 한탄하고 있다. 순후한 풍속이 아득하여 돌아오지 않고, 근본이 서지 않음 을 걱정하고 있다. 결국 인(仁)으로 풍속을 몰아야 함을 알지만, 조정에서는 국사 가 어지럽기에 지방에서 베풀기는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시에서 충암은 백 성들의 삶이 궁핍해져 감을 걱정하면서 자신의 재주가 부끄럽다고 하고 있다.
이후에도 비슷한 시들이 이어지는데 예를 들어 “눈(眼)이 있어 시대를 걱정하 지만 할 말이 없다.”236)고 하거나 “호량(濠梁)에서 지난날에 물고기조차 즐겁게 뛰어놀았나니, 교화와 은택이 지금은 어찌하여 두루 돌지 않는가?”237)라고 하며 백성들에게 교화가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고 있다.
다음은 경연에서 충암이 교화의 중요성을 언급한 내용이다.
김정이 아뢰기를, “지방 수령이 누가 교화의 방법을 알겠습니까? 간혹 교화에 유의 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한 고을만을 맡을 뿐이고 다른 고을에는 미치지 못하는 형편 이니, 그 교화의 범위가 넓지 못합니다. 그 나머지는 대부분이 공(公)을 빙자하여 사 (私)를 영위하는데 많은 군·읍의 수령을 모두 고를 수도 없는 일입니다. 감사가 교화에 유의하면 수령들이 반드시 감사의 뜻을 본받아 백성을 선(善)으로 인도할 것이요, 이웃 고을의 수령들도 따라서 본받게 된다면, 그러한 다스림은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들으 니, 경상도 감사가 교화에 유의하여 『소학』을 부지런히 가르침으로써 백성을 감동을 주매 뜻있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본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유임시킬 수 는 없습니다. 1년 동안에 정치와 교화가 어찌 흡족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 재임 기간이 길어야만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238)
충암은 교화를 위해서 감사가 중요하며 당시 경상도 관찰사인 김안국이 『소 학』을 가르침으로써 교화가 크게 진작되었으니 그의 재임 기간을 늘려야 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충암이 『소학』과 『향약』을 교화의 중요한 교육과정으로
236) 『冲庵集』, 卷3, 「奉和昌邦仍贈行, 兼示昌世案右.(甲戌仲冬). “有眼傷時無口言”
237) 『冲庵集』, 卷2, 「無題」. “濠梁昔日儵然躍, 風澤今何未周回.”
238) 『中宗實錄』, 卷31, 중종 13년 1월 14일 甲寅. “淨曰, 外方守令孰知敎化之方哉. 間有留心於敎 化者, 只一邑而已, 不踰他境, 則其化不廣矣. 其餘率皆憑公營私, 而許多郡邑守令, 不可盡擇. 監司 留意於敎化, 則守令必體監司之意. 導之以善, 隣邑之守〔令〕 亦從而觀感, 則治有效矣. 聞慶尙道監 司致意於敎化, 勤誨小學, 聳動觀贍, 有志之人爭慕效之, 不可使人人而仍任也. 一年之間, 治化何能 洽然. 必久於其任, 然後有成效矣.”
인식함이 잘 드러나 있다.
충암은 조광조와 함께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1517년(중종 12) 이후에 는 지치주의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낸다.
성군께선 늦은 밤에도 일을 멈추지 않으니/ 시들시들 왕의 풍모가 말이 아니구나/
천하를 향한 마음은 온화하니/ 공경하는 마음이 흐르고 있음을 바랄만하구나/ … 선비 가 관대하고 굳세지 않으면/ 멀리 감에 장차 장애가 될까 두렵네/ 구차함과 나약함 그 리고 자세히 살핌과 지혜로움은/ 정치에 있어서 함께 쇠퇴할 수 있다네/ 마음을 간직 하며 멈추지 않는다면/ 이는 옛사람들이 시간 따지기를 중히 여김일세/ 삶을 바쳐 백 성들을 일으키고/ 손을 움직여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을 구해보리/ 온화한 덕을 베풀어, 우러러 비바람과의 약속에 화답하리/아득한 서주의 백성들은/ 저 감당나무 아래서 쉬 던 성군을 그리워하네/ 좋은 때는 다시 얻기 어려운 법/ 힘쓰면서 학이 꿩 새끼가 됨 을 가슴 아파하네/ 위대한 법도에 탄식을 발하며/ 글을 엮어 소매 잡고 위로함을 대신 하네.239)
앞에서 보았던 시와는 사뭇 다른 현실 인식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삶을 바쳐 백성들을 일으키고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충암의 이상 (理想)이 잘 표현되고 있다. 충암은 백성들이 모두 인(仁)을 행하고 예로써 서로 도우며 화목한 삶을 사는 시대를 꿈꾸었으며, 그 교육적 방법의 하나로『소학』
과 향약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