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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김상헌의 학문적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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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청음 김상헌의 교육사상

2) 청음 김상헌의 학문적 연원

청음은 청음초고자서(淸陰草稿自敍)에 자신의 배움과 사우 관계 등에 관해 기 술해 놓았다.

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집안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외할아버지인 임당(林 塘) 상국(相國)을 섬기며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자 큰형님인 선원(仙源) 선생과 당형(堂 兄)인 휴암(休庵) 선생이 부지런히 가르쳐 주어 점차 나아갈 바를 알게 되었다. 그 뒤

열여섯 살 때 윤 문경공(尹文敬公, 윤근수)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였고, 또 현헌 신 공(玄軒申公, 신흠), 월사 이공(月沙李公, 이정구), 서경 유공(西坰柳公, 유근)의 문하에 서 노닐면서 들은 바를 더 넓혔으며, 학곡 홍공(鶴谷洪公, 홍서봉), 동악(東岳) 이자민 (李子敏, 이안눌), 죽음(竹陰) 조이숙(趙怡叔, 조희일), 계곡(谿谷) 장지국(張持國, 장유) 등과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419)

청음은 유년 시절 가학을 통해 공부하였다. 앞서 송인수의 교육사상(Ⅳ장 5절) 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임당 정유길은 정광필의 손자이다. 정유길은 1531년(중종 26)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중종 38)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출사하였 다. 1544년(중종 39) 이황, 김인후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 하였다.

정유길은 1560년(명종 15)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었다. 당시 사신은 “사 장(詞章)은 볼만한 듯했으나 학문의 공이 모자랐다.”420)라고 평하였다. 김상헌의 맏형인 선원 김상용 역시 정유길에게서 수학(受學)했는데, 청음은 김상용의 신도 비명에서 김상용이 정유길에게서 고문시(古文詩)를 배웠다고 기술하였다.421) 청 음은 외조부 정유길의 묘지명을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군께서는 문장이 섬부(贍富)하고 화려하였는데, 시에 있어서 더욱 뛰어났다. 붓을 들어 글을 지으면 마치 날아가는 것과 같이 빨리 지었는데도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한 시대의 종장(宗匠)이 되어 풍아(風雅)를 도왔다. 이에 소인(騷人)과 저객 (楮客)과 승려(僧侶)와 방외인(方外人)의 무리를 막론하고 정미(亭楣)와 관벽(館壁)에 부군의 글을 얻으면 영광으로 여겼고, 궁궐의 안과 한가로이 쉬는 곳에 있는 도화(圖 畫)와 병풍은 반드시 부군의 제영(題詠)을 거친 이후에야 중하게 되었다.422)

419) 『淸陰集』, 序, 「淸陰草稿自敍」. “余年九歲, 始學于家庭, 逮事外王父林塘相國, 獲承警咳, 伯氏 仙源先生, 堂兄休庵先生勤加提誨, 稍稍知向方. 十六謁尹文敬公請益, 又游玄軒申公, 月沙李公, 西 坰柳公之門, 以廣所聞, 與鶴谷洪公,東岳李子敏, 竹陰趙怡叔, 谿谷張持國相切劘.”

420) 『明宗實錄』, 卷26, 명종 15년 2월 24일 庚申. “大提學鄭惟吉, (詞章雖若可觀, 學問之功闕如 也.) 辭文衡之任, 不允.”

421) 『淸陰集』, 卷26, 「伯氏議政府右議政仙源先生神道碑銘」. “少讀二經四子通大義, 長學古文詩於外 王父.”

422) 『淸陰集』, 卷34, 「外王父左議政林塘鄭府君墓誌銘」. “文章富麗, 尤長於詩, 動筆如飛, 靡不合度, 宗匠一世, 羽翼風雅. 亡論騷人楮客釋流方外之徒, 亭楣館壁, 得之以爲光, 九重之內, 燕閑之所, 圖 畫屛障, 必經府君題詠然後爲重.”

청음의 평에서도 문장이 한 시대의 종장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임당 정유길 의 학문적 경향성과 여러 기록으로 볼 때 청음은 외조부인 임당에게서 특히 문 학과 관련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월정 윤근수는 가족 외에 청음이 직접 집지(執贄)한 스승으로 직접적인 청음의 학문적 경향성은 윤근수를 통해서 확인해야 한다. 윤근수는 기묘제현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윤근수에 대해 김상헌은 「행장」, 「제문(祭文)」, 「월 정집발문(月汀集跋文)」 등 많은 기록을 남기며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윤근수에 대한 면모들은 위의 기록에서 거의 다 확인할 수 있다.

윤근수의 아버지는 윤변(尹忭)이고,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는 동모(同 母)형이다. 윤근수는 이름난 인물이 별로 없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다만, 아 버지 윤변이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중 스승의 무죄를 변호하다 죄를 얻었다. 이 일로 1522년(중종 17)에 과거에 급제하 였을 때 기묘인(己卯人)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받았다(서한석, 1999: 6).

그리고 윤근수의 스승인 김덕무(金德懋)는 기묘팔현(己卯八賢) 중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아들이다. 윤근수는 김덕무의 묘갈명에서 “내가 어렸을 때 공의 맏 형인 이진(頤眞) 덕수(德秀) 선생께 수업을 청하였고, 이진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 는 공에게 사서(四書)를 배웠으니, 구두 떼는 것 외에 약간 식견이 있는 것은 공 에게 배운 것이다.”423)라고 하여 김덕무에게 사사(師事)했음을 밝혔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볼 때 윤근수는 기묘사림의 학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아버지를 통해서는 조광조를, 김덕무를 통해서는 기묘팔현의 한 사람인 김식 의 학맥을 잇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윤근수는 1562년(명종 17)에 조광조의 억울 함을 명종에게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다.424) 이 일로 결국 논핵(論劾)을 당해 과천 현감(果川縣監)으로 좌천되었다.425)

윤근수는 어려서부터 성리(性理)의 학문을 익혔으며,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 경세서(經世書), 「동명(東銘)」·「서명(西銘)」과 같은 글을 정통하 게 익혔다. 이황과 조식을 예방하여 주자와 육상산(陸象山)의 차이점을 논하여

423) 『月汀集』, 卷6, 「贈吏曹判書行顯陵參奉金公墓碣銘」. “余少也請業于公之伯兄頤眞先生德秀許, 頤眞旣沒, 又從公卒業四子, 至今口讀外稍有所見者, 固得之公者也.”

424) 『明宗實錄』, 卷28, 명종 17년 9월 21일 壬寅.

425) 『淸陰集』, 卷37, 「海平府院君尹公請諡行狀」.

인증을 받았는데, 이황은 “총명하고 영특하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바, 뒷날에 그 조예가 반드시 심원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우계 성혼과 율곡 이 이와도 종유하였고, 모두 윤근수의 문아(文雅)를 칭찬하면서 세상에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물다고 하였다.426)

이렇듯 윤근수는 당시 ‘진한고문론(秦漢古文論)’427)이라는 새로운 문장론을 형 성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청음은 『월정집(月汀集)』 발문(跋文)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대개 우리나라의 문단(文壇)은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이후로는 모두 당나라와 송나라의 문풍을 본받아 부드럽고 아름다운 문장을 익히기를 즐겼는데, 이를 관각체(館 閣體)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문사(古文辭)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 선생께서는 이를 탄식 하고 스스로 분발하여 사림(詞林)을 선도하여 적치(赤幟)를 손에 들고 바른길을 열어 보여주어 후세의 문장을 짓는 무리가 가야 할 바를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선진(先秦) 과 전한(前漢)의 문장을 다투어 숭상하게 되어 거의 문풍이 한번 바뀌게 되었으니, 명 나라에서 홍치(弘治)와 가정(嘉靖) 연간에 옛 도를 힘써 회복하여 선배들에 필적할 만 한 대가들과 비교해 보아도 그 공이 비등하다.428)

윤근수의 진한고문론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설명이다. 윤근수의 『주륙논란(朱 陸論難)』과 ‘진한고문론’은 당연히 청음 김상헌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병자 호란 당시 김상헌의 척화론이 강력한 주자학적 강상의식(綱常意識)의 사상적 실 천이라면, 최명길의 권도론(權道論)은 양명학에 기반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 다.429) 이러한 청음의 주자학에 대한 강력한 믿음은 스승 윤근수가 『주륙논란』

을 통해 양명학을 배척하고 주자학적 사상을 신봉한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 다.430)

426) 『淸陰集』, 卷37, 「海平府院君尹公請諡行狀」. “公少從事於性理之學, 如太極圖說, 通書, 經世書, 東西銘, 靡不師授精通. 訪文純公李滉,文靖公曺植, 論朱, 陸同異, 得其印證, 文純稱其聰穎邁倫, 他日造詣必遠,. 成牛溪渾,李文成珥相與爲知心友, 皆稱公文雅, 世罕其比云.”

427) 윤근수의 ‘진한고문론’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서한석(1999)의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428) 『月汀集』, 「月汀先生集跋(金尙憲)」. “竊槪, 我朝文苑自卞春亭以下, 率皆規唐藻宋, 樂習軟美, 號 爲館閣體, 顧於古文辭, 大有徑庭, 先生慨然自奮, 爲詞林倡, 手揭赤幟, 啓示指南, 使後來操觚之徒, 知所去就, 自是爭尙先秦西京之文, 幾乎一變, 視諸皇明弘嘉諸大家力回古道, 追配前烈者, 其功上 下.”

429) 김상헌과 최명길의 사상적 차이에 관한 연구는 박세한(1989), 정성식(2011), 송희경(2016) 등에 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청음은 소무(蘇武)를 매우 추숭하는데, 김상헌이 억류 기간에 남긴 시집 의 제목이 소무의 고사에서 비롯된 『설교집』이라는 점은 김상헌의 인식과 문 학관이 윤근수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설명할 수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우경 섭, 2013).431)

청음이 스승의 예로 대했던 신흠은 청음의 맏형 김상용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 다. 청음이 15세 때 신흠을 처음 만났는데, 그 이후 신흠은 청음을 아우처럼 잘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청음이 과거 공부를 할 때 몸이 쇠약해지자 신흠은 “몸이 매우 수척하므로 공부에 열중할 겨를이 없으니 탕제(湯劑)를 먹는 동안에는 시나 읊으면서 심성을 수양하는 것이 무방하다. 의당 먼저 온유(溫柔)의 가르침부터 받아야 한다.”432)라고 하였고, 이에 청음은 시를 지어 신흠에게 보이고 화답을 받 았다. 청음은 신흠의 도움으로 많은 성취를 보았다고 하였다.433)

청음은 신흠의 만사(挽詞)에서 문장은 한유(韓愈)와 맹교(孟郊)를 좇았고, 학문 은 이정(二程)과 주희를 따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평생토록 교분 맺어 서로 깊 이 알았는데, 친구로 날 대하였고 난 스승으로 대했네.”434)라고 하여 스승의 예를 갖췄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신흠은 젊은 시절에 이미 문명(文名)을 떨쳐 문형(文衡)을 잡은 인물로서, 육경(六經)에 바탕을 두고, 만년에는 『좌씨(左氏)』·『사기(史記)』·『장자(莊 子)』·『이소(離騷)』·『예기(禮記)』와 고락부시(苦樂府詩)·이백시(李白詩)·두보 시(杜甫詩)와 명나라 의고파(擬古派) 문인들의 문체를 아주 좋아하였다.435) 상촌

430) 조선의 학계에서 양명학에 대해 배척하기 시작한 것은 퇴계가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을 저술 한 1566년 이후이다(우응순, 2000: 222). 따라서 청음이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의 학계에서 양명학 이 이단으로 규정된 이후로, 주자학을 신봉하고 양명학을 이단시했던 것이 청음의 사상적 독창성 이나 윤근수의 영향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인 윤근수의 『주륙논란』과 김상헌과 최명길의 강(綱)·권(權) 의식의 차이가 닮아 보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부분에 관 해서는 추후 연구를 통해 보완하고자 한다.

431) 그런데, 청음 김상헌의 문학관을 다룬 선행연구에서, 청음 문학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특징을 규명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청음의 문학을 의리사상의 범주로 분류하여 고찰하고 있는 연구 가 대다수인데, 윤근수의 진한고문론과 연결하여 청음 문학의 형식적 특징을 규명하는 연구가 요 청된다.

432) 『淸陰集』, 卷38, 「象村集序」. “謂余瘁甚, 未暇蛾述, 湯劑間, 不妨陶寫, 宜先服溫柔之敎.”

433) 『淸陰集』, 卷38, 「象村集序」.

434) 『淸陰集』, 卷6, 「哭象村先生申公」. “先王盛際冠名臣, 今上初元領搢紳. 楊綰當朝爭見喜, 皐陶擧 右盡歸仁. 文兼道妙追韓孟, 學自心傳契洛閩. 諸葛庶幾興禮樂, 東人無祿奈蒼旻. 平生托契最深知, 公視爲朋我請師. 天地倒廻心自靜, 榮枯遞換道常隨. 漸當筋力消殘日, 同結桑楡進退期. 舊約未成人 事變, 白頭孤絶欲依誰.”

435) 『象村稿』附錄 一, 「行狀(金尙憲)」, “公爲文章, ,本於六經, 幼嗜昌黎, 旣壯悉取古文讀之. 晩乃自

의 이러한 문학관과 명나라 의고파를 배워 진한고문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은 청 음의 문학론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김하윤, 2013: 26).

청음은 이 밖에 월사 이정구, 계곡 장유, 서형 유근, 학곡 홍서봉, 동악 이안눌, 죽음 조희일, 백사 윤훤, 택당 이식 등과 교유(交遊)하였는데, 모두 당대 뛰어난 문사들이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사대가(四大家)’로 알려진 이정귀 · 신흠 · 장유 · 이식과 모두 각별한 친분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문집에 실린 그들과 주고받은 다수의 시436)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송희경, 201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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