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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 김정의 학문적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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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충암 김정의 교육사상

2) 충암 김정의 학문적 연원

충암 김정의 학문적 연원과 관련해서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대부분 가학(家學) 또는 자학(自學)으로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충암은 안정(安亭) 신영희(辛 永禧)에게 수학(受學)하였으며, 따라서 [안정 신영희 → 충암 김정]의 학통을 형 성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몇몇 연구에서도 충암을 신영희의 문인으로 보 는 경우가 있었으나,143) 대체로 충암의 학문 연원을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141) 『冲庵集』, 「年譜」. “十五年庚辰 先生三十五歲, 正月. 移配珍島.先生到錦山, 錦山之距報恩, 纔 百餘里, 時母夫人疾篤, 先生聞之, 請於本倅鄭熊往覲. 未及還, 聞禁府都事黃世獻以押移珍島下來, 卽馳還.”

142) 『冲庵集』, 「年譜」. “夏. 拿鞫. 裂衣三上疏陳情. 特命減死. 安置濟州.”

143) 김태영(1995)의 논문과 전지선(2013)의 논문이 있다.

충암의 생애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충암은 어린 시절에 할머니 황씨와 아버지 에 의해 학문을 배웠으며, 9세에는 향선생(鄕先生)에게 학문을 익혔다고 기록하 고 있다.144) 연보에서는 “『사우연원록(師友淵源錄)』에는 선생이 신안정(辛安亭) 에게 수학하였다고 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 우선 검토를 기다린다.”145) 고 표현 하고 있다. 연보가 비록 후대의 기록이라고 하나, 연보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매 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충암 연보에서는 안정 신영희에게 수학 한 것이 확실 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곧이어 안정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 덧붙였다.

안정의 이름은 송희(宋僖)이고 자는 덕우(德優)이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과 죽림우사(竹林羽士)였다. 문장 과 행동은 의로웠으며, 한때는 사림의 영수였다. 동남쪽을 지나는 벼슬아치들은 그 집 안에 들러서 예를 갖추지 않는 이가 없었다.146)

안정 신영희는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그는 시문에 매우 뛰어났다. 김종직의 동 문 남효온(南孝溫)은 참의(參議) 성현(成俔)이, “그(신영희)의 시는 소(蘇, 소식)·

황(黃, 황정견)의 경지에 출입하고 있다.”라고 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147) 또 한 신영희의 문집 『안정실기(安亭實記)』에서는 신영희가 43세인 1497년, 직산 에 은둔해 있을 때 “(내가) 한가로이 생활하고 있을 때 김정, 이행(李荇), 소세량, 소세양(蘇世讓), 장응두(張應斗), 신세호(辛世瑚), 신세련(辛世璉), 신희정(辛熙貞), 신억령(辛億齢) 등을 가르치고[敎授], 강학(講學)하였다. 한훤당의 글을 함께 읽었 다.”148)고 하고 있다.

충암의 문집에는 신영희와 주고받은 시(時)가 여러 편149) 보이는데, 충암은 신

144) 『冲庵集』, 「年譜」. “先生三歲, 始入學. 纔學語, 便知文字. 祖母黃夫人素博通經史, 不就外傅而 親自敎之.” : 『冲庵集』, 「年譜」. “七年甲寅. 先生九歲. 嘗受左氏傳於鄕先生”

145) 『冲庵集』, 「年譜」. “師友淵源錄以爲先生受學於辛安亭云而未詳, 姑俟更考.”

146) 『冲庵集』, 「年譜」. 安亭名宋僖, 字德優, 佔畢門人. 與南秋江, 洪裕孫爲竹林羽士. 文章行誼, 爲 一時士林領袖. 縉紳東南行者, 無不過禮其門.

147) 『大東野乘』, 「師友名行錄(南孝溫撰)」. “成參議俔以其詩爲出入蘇黃.”

148) 『安亭實記』, “閒居敎授, 金淨李荇蘇世良世讓張應斗 及 辛世瑚世璉熙貞億齢講學焉. 與寒暄堂 書.”

149) 신영희 선생과 주고받은 시는 다음과 같다. ① 細雨寄德優永禧, ② 秋興十首病中作示夢與明府 兼柬安亭. ②-1. 次韻元沖秋興十首 辛德優. ③靑龍寺次德優韻. ③-1. (德優詩) ④ 南山詩 序云.

美辛氏伯仲也. 此詩本和德優山海之篇. 而篇首有南山二字. 取小雅如南山之壽之義. 變稱南山. 時辛 氏世瑚. 世璉爲母老. 兄弟俱乞郡. 出守溫陽,沔川. 於其壽席. 安亭辛德優賦山海之篇以美之. 故云.

⑤ 安亭集

영희를 부자(夫子)로 표현하였다. ‘부자’라는 표현은 원래 남자를 높여 부르는 호 칭이었으나,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부자’로 부르면서 후대에는 ‘스승, 선생님’

의 칭호로 사용되게 되었다(김형찬, 2012: 223)150).

안정 신덕우의 시에 차운하여, 2수(安亭韻)

명예에서 달아나 자연에 머무나니 逃名放丘壑

발자취를 깃들여 향리에 섞이도다. 寄迹混鄕里

집이 헤어졌어도 가난이 병이 아니며, 室弊貧非病 배가 비어있어 부딪혀도 꺼리지 않네. 舟虛觸不忌

여유롭게 세상에 노니니, 優游以遊世

현명하도다, 신선생이여. 賢哉辛夫子151)

위의 시는 충암이 안정의 시에 차운한 것인데, 그 아래로 소세양과 소세량의 시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안정실기』의 기록과 같이 충암과 소세양, 소세량 등이 신영희와 사제의 연을 맺었다고 보는 것이 타 당할 것이다.152) 최근 김덕수(2019)는 충암이 제주 유배 시기에 쓴 시편 중 상당 수는 대상 인물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이 중 이덕우(李德優)라 는 인물은 실제로는 덕우(德優) 신영희에게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충암 과 신영희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충암 김정의 학통은 신영희를 통해 [김종직 → 신영희 → 김정]으 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학통은 조선시대 사림파의 정통 학맥을 잇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53) 충암이 신영희에게 사사(師事)할 당시 한훤당의 글을

150) 『충암집』에는 충암이 ‘부자’라고 칭한 표현이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 공자를 일컬어 세 번, 신 영희 선생과 윤광령(尹光齡)에게 한 번씩 표현하였다. 이 중 윤광령은 충암 선생보다 연소(年少)한 벗으로서 스승의 예로 표현한 것은 아니고, 벗을 높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冲庵集』. ①「詩」, 安亭韻, ② 「詩」, 戲寄尹彥叟. ③ 「文」, 女媧氏鍊石補天辨. ④ 「文」, 辭刑曹判書箚. ⑤ 「孤峯亂 藁」, 十一箴.))

151) 『冲庵集』, 卷1, 「安亭韻」

152) 윤영선의 『朝鮮儒賢淵源圖 乾』에도 신영희의 문인으로 충암이 등재되어 있다. 윤영선(1941).

『朝鮮儒賢淵源圖 乾』. 長水郡 : 東文堂. 21쪽.

153) 선행연구에서는 충암과 신영희의 사제관계를 밝히지 않고 충암의 사상적 성향 및 조광조의 관 계로 인해 충암의 학맥을 김종직과 연결 지어 논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논의가 잘못되 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충암이 신영희의 문인임을 확인할 때 김종직의 학통을 잇는 정당성은 더 욱 자연스럽다. 본 연구자도 충암 연보에서의 기록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나, 추후 연구를 통해

보고 강학154)하였다는 점 역시 [김종직 → 신영희·김굉필 → 김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연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더구나 충암은 조광조와 도의 (道義)를 결의한 교우(交友)로서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 인물들과 모두 사우(師友)의 연을 형성한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충암은 김종직에 대해 “정밀하고 심오한 것에 뜻을 둘 수 있다면, 비록 배움이 지극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하물며 학문이 지극한 사람이랴? (중 략) 점필재에 이르러 정밀하고 심오한 학문으로써 떨쳐 일어나 위대하게 일가를 이루었다.155)”라고 하였다. 김종직을 높게 평가하면서 그의 학문만으로도 스승으 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김종직은 문장을 매우 중시하였고, 뛰어난 문장가였다. 충암은 신영희를 통해 김종직의 문장을 익힐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 → 신영 희 → 김정]으로 이어지는 뛰어난 문장의 성과도 우연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처럼 충암은 15세기 사림파의 학통을 분명하게 잇고 있다. 충암의 학통이 분 명하게 밝혀져야만 그의 교육사상과 중종 대 조광조와 함께한 경세론(經世論)의 입장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즉, 당시 사림파 대다수가 『소학』과 『근사 록』을 중요시했다고 하나, [김종직 → 신영희·김굉필 → 김정]의 학문적 정통성 이 명확히 규정될 때 『소학』 중시의 학문적 배경은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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