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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 송인수의 귤림서원 배향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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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규암 송인수의 교육사상

2) 규암 송인수의 귤림서원 배향의 의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동안 제주오현으로서 규암 송인수에 대한 인식은

406) 『宣祖修正實錄』, 卷21, 선조 20년 9월 1일 丁亥. “臣聞, 麟壽之賢, 東國之寶, 其死之日, 知與 不知, 無不歎傷.”

407) 『武陵雜稿』, 卷2, 別集, 「贈眉叟」. “從來華國斯文柄, 畢竟天與其人擪, 黃金屋裏賜讀書, 白晝開 卷門長牐, 胸中文字富千萬, 往往緖餘振余乏, 嗟君所得有如此, 顧我區區何所挾.”

408) 『圭菴集』, 卷3, 「圭菴按湖南時歌謠, 河西」. “弱歲曾優學, 餘力早策名, 德存齊險易, 情定絶將迎, 頃値陰邪橫, 猶憑直道亨, 風波萬里外, 家國一身輕(公曾牧濟州故云), 大壑魚還縱, 朝陽鳳轉鳴.”

매우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연구자는 규암을 평가하기 위한 다양한 객관적 사실 들을 2절 2항(제주목사로의 부임과 체임)에서 정리하였으며, 여러 자료를 통해 규암 송인수의 교육사상을 규명하였다.

규암 송인수의 교육사상은 성리학의 요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기론에 관한 철학적 탐구와 논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심성 론의 측면에서는 ‘존천리거인욕’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다만, 앞서 살펴본 충암 김정과 달리 송인수는 수양론적 관점에서 거경(居敬)보다는 오히려 경전 등을 통 한 궁리(窮理)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는 규암 교육사상의 중요한 특징이라 여 겨진다. 그리고 규암은 교육에 많은 관심이 있었으며, 성균관의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특히 과거 공부의 폐단을 지적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 시절에는 도 학과 의리에 관한 공부를 강조하였다. 규암은 이러한 자신의 교육사상과 공부를 토대로 정치에 임했는데, 이는 모범을 통한 교화의 중시, 애민 정신 등의 형태로 실천되었다. 이처럼 규암 송인수의 도학자 면모와 의리 정신의 실천으로 볼 때 그가 귤림서원에 배향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 판단된다.

그런데 연구자는 송인수가 귤림서원에 배향될만한 인물이라는 점은 동의하지 만, 왜 귤림서원에 배향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특히 규암 송인수의 배 향 시기는 1678년(숙종 4)으로 남인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노론 집권 시기에 배 향되었다면, 서인 노론과 은진송씨 가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는 기존의 견해가 합리적이고 타당하지만, 숙종 4년의 배향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 이다. 따라서 연구자는 여러 가설을 설정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가설은 귤림서원 배향 인물의 다양성을 위해 송인수를 배향했을 것이 라는 추론이다. 이는 1675년(숙종 원년) 안무어사 이선이 귤림서원에 배향되어 있던 이약동의 위판(位版)을 철거한 점에서 추론한 것이다. 이약동은 제주목사로 서 제주에서의 선정(先正)으로 많은 제주유림이 그 덕을 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선이 사림(士林)에 의논하지 않고, 삼현(三賢, 김정·김상헌·정온) 위에 위판을 두었으므로 철거하도록 하였다. 당시 제주 삼현 중 제주목사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이약동을 철거한 후 제주목사 중 귤림서원에 배향할 수 있는 도통의 인 물을 찾았고 그 중 이미 추숭되고 시호가 내려졌던 송인수를 추배(追配) 한 것이 아닌가 추론해 본다. 앞서 사림에 의논하지 않고 이약동을 배향했다는 이선의 언

급을 역으로 추론해 볼 때 송인수의 배향은 제주 유림의 공론으로 결정하였을 것이라 판단된다.

두 번째 가설은 중앙의 집권 세력이 남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지방에서 서인 노론 세력의 확장을 위해 송인수를 배향했을 가능성이다. 이는 송인수의 배향이 중앙의 의도로 결정되었다는 입장이다. 이때 이 추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누 가 당시 제주목사였는지가 중요하다. 숙종 4년 연간의 제주목사는 절제사 윤창형 (尹昌亨)과 절제사 최관(崔寬)이었다. 윤창형은 1676년(숙종 2) 2월부터 1676년 (숙종 4) 8월까지 재임했으며, 최관은 1678년(숙종 4) 8월부터 1680년(숙종 6) 5 월까지 재임하였다. 두 사람의 기록을 살펴보면, 윤창형은 무인이었으며 제주에 서 뇌물을 바친 혐의로 하옥되고 조사받았다.409) 윤창형의 뇌물 혐의를 밝혀낸 사람이 후임 제주목사 최관이었다. 최관은 문신으로서 청렴하였으며, 벼슬은 도 승지·좌찬성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특히 1695년(숙종 21) 사망하자 청백리(淸白 吏)에 녹선(錄選)되었다.410)

최관의 당색(黨色)과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는 찾지 못했으나, 최관이 숙종 시 기 주(主) 요직(要職)에서 활동한 시기는 제주목사 재임 이후인 1680년(숙종 6) 이후이다. 숙종 6년 승지로 부임한 이후 대사헌·경기 관찰사·공조참판·도승지·지 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송시열의 『송자대전』에 최관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1673년(현종 14) 송시열이 화양동을 방문하는 여정에 최관이 찾아가 배웅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411)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볼 때 최관이 서인 또 는 노론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을지라도 친(親) 서인 세력으로서 송시열과도 인연 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678년(숙종 4) 송인수 배향 당시 제주목사는 서인계 인물 최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관이 제주목사로서 송인수의 배향을 결정하고 당시 제주 유림과 논의하여 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규암 송인수는 1678년(숙종 4) 제주목사 최관에 의해

409) 『肅宗實錄』, 卷8, 숙종 5년 9월 12일 甲辰.

410) 『肅宗實錄』, 숙종 21년 2월 2일 甲午. 「지중추부사 최관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최 관(崔寬)이 졸(卒)하니, 나이 83세였다, 최관은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고 나라를 위해 진력했 으며, 또 청렴결백한 지조와 조용하고 겸손한 절개가 있었다. 세상의 논의가 분파됨에 있어서 옛 견해를 확고하게 지키고, 부박(浮薄)한 논의에 동요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훌륭하게 여 겼다.”

411) 『宋子大全』, 卷134, 「癸丑日記」. “至甓寺少憩于東臺, 崔監司寬, 黃監司俊耇, 金遠明, 李擇之與 士人數輩皆同舟來別. 受台, 草廬, 雲擧亦乘舟追至, 遂別崔監司諸公.”

배향이 논의되었으며, 제주 유림의 공론으로 배향되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제주교육사의 입장에서 송인수의 귤림서원 배향의 의미 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우선 송인수의 배향으로 조선시대 사림의 계보가 시기별 로 연계될 수 있었다. 다음은 제주오현의 생몰년이다.

① 충암 김정 : 1486(성종 17)∼1521(중종 16)

② 규암 송인수 : 1499(연산 5)∼1547(명종 2)

③ 청음 김상헌 : 1570(선조 3)∼1652(효종 3)

④ 동계 정온 : 1569(선조 2)∼1641(인조 19)

⑤ 우암 송시열 : 1607(선조 40)∼1689(숙종 15)

규암 송인수는 충암 김정과 청음 김상헌 사이의 약 100년의 시기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인물이다. 시기별로 볼 때 충암 김정은 전기 사림이며, 규암은 퇴계 이 황·회재 이언적·남명 조식 등과 교류했던 후기 사림의 인물이다.412) 기묘사화 이 후 사림의 학문적 양상은 매우 달라지는데 일반적으로 기묘사림까지의 전기 사 림은 실천적 도학 정신으로, 16세기 퇴·율 이후 조선 성리학은 철학적 심화의 단 계로 발전한다고 설명한다. 규암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화로 생을 마감하여 학 문적 완숙기를 맞이하지 못했으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언적과 이기론에 대 해 논변을 하는 등 성리학의 철학적 문제에도 천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퇴 계·회재·남명 모두 학문적으로 대성(大成)했으나 처사적(處士的) 삶을 지향했던 인물들이며 이 역시 기묘사림 이후의 학문적 풍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규암은 수기치인을 교육목적으로 두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임하였던 인물로서 조선 전기 실천적 도학 정신과 후기 사림의 철학적 탐구의 영역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규암의 귤림서원 배향은 귤림서원의 도학 정신이 전기 사림과 후기 사림을 연결하여 사림파의 맥을 이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412) 이는 사림의 활동 시기를 15세기 중후반에서 17세기까지 설정한 황금중(2006a)의 견해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황금중(2006a)은 사림파의 활동 시기에 대해 성리학적 이상에 입각해서 개혁적인 경세 사상을 제기하고 실천했던 학자집단으로 특수하게 규정한다면, 그 활동 시기는 15세기 중후 반에서 17세기 후반까지로 설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사림의 후예가 기득권세력으로서 확고하게 정착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학문적 본질과 소명 의식이 아닌 당파의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18세기 이후에도 유학 및 성리학 정신의 본령 에 충실히 하고자 했던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림파가 아닌 별도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합 당할 듯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황금중은 초기(전기) 사림을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김안 국, 김정국, 이언적, 서경덕으로 구분하고, 후기 사림파를 이황, 조식, 이이로 보았다.

이는 규암의 학문적 네트워크를 볼 때 더욱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규암 송 인수는 제주오현의 인물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학맥과 학문적 네트워크를 형성 하고 있어, 제주오현을 하나의 사상체계로 수렴할 가능성을 지닌 인물이라 판단 된다. 이는 귤림서원에 송인수를 배향함으로써 제주오현의 사상적 영향 관계를 담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413) 송인수가 어떻게 제주오현과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우선 충암 김정과의 관계이다. 충암 김정은 은진송씨 가문의 사위로서, 은진송 씨 가문의 삼현(三賢)으로 추앙받는다. 즉, 정광필,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가 그 들이다.

송세충 송기수

송순년 송여해 송세량

송귀수 송인수 송용수

송여익 壻 김정

壻 정광필

[그림-2] 은진송씨 삼현(三賢) : 정광필·김정·송인수

위의 [그림-2]에서 제시한 것처럼, 송인수의 5촌 고모부가 충암 김정이 된다.

그리고 대고모부(大姑母夫)가 정광필이다. 이들은 회덕의 숭현서원에 1580년(선 조 13) 제향 된다. 그리고 후에 송시열도 추배 되었다.

두 번째는 청음 김상헌과의 관계이다. 청음 김상헌과는 임당 정유길과 상촌 신 흠으로 연결된다. 우선 임당 정유길은 청음 김상헌의 외할아버지로 청음은 어린 시절 정유길에게 학문을 배운다. 그런데, 임당 정유길은 정광필의 손자이다. 따라 서 규암 송인수와 임당 정유길은 육촌형제이다. 정유길은 송인수와 깊게 교유하 였는데, 규암이 종남산 아래 성희안의 옛집에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하는데, 이곳

413) 물론 송인수의 배향 당시에는 사현(四賢)이었다.

을 종남우사(終南寓舍)라 하였다. 임당 정유길은 종남우사를 방문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414)

상촌 신흠 또한 김상헌의 스승으로, 김상헌은 상촌에 대해 “자신을 친구로 대 하였고 자신은 스승으로 대했다.”415)라고 하였다.416) 그런데 신흠의 외조부가 추 파 송기수였다. 추파 송기수는 송인수의 사촌으로 신흠은 송인수의 7촌 조카가 되는 것이다. 신흠은 어려서 양친을 잃었기 때문에 줄곧 외가에서 자라면서 외조 부 송기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인연으로 상촌 신흠은 숭현서원 기를 지었다. 이 기(記)에 보면 신흠은 “내가 송씨 집안의 외손이라 하여 후세에 알리 는 글을 부탁하였다. 내가 사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417)라고 하였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월정 윤근수는 이준경, 기대승과 함께 적극적으로 송인수 의 신원 회복을 주장하는데, 월정 윤근수 역시 청음 김상헌의 스승이다. 월정과 의 관계는 자세히 파악되지는 않지만, 월정 윤근수 역시 규암 송인수를 흠모하고 있음은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규암 송인수와 청음 김상헌과의 관계는 [규암 송인수 → 임당 정유길·

상촌 신흠 → 청음 김상헌]으로 이어지는 영향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동계 정온과의 관계이다. 동계 정온은 남명 조식의 제자인 내암 정 인홍의 제자로, 남명 조식의 재전(再傳) 제자이다. 남명 조식은 규암 송인수의 절 친한 벗으로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남명이 과거를 거부하고 도학 공부에 뜻 을 두자 송인수는 『대학』을 선물하였다. 그리고 송인수는 남명 조식 어머니의 묘갈명(墓碣銘)을 작성하였다. 남명 모친의 묘갈명을 작성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교분은 매우 깊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동계 정온이 남명의 제자임을 생각할 때 동계와 송인수도 남명 조식을 고리로 영향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암 송시열과의 관계이다. 주지하다시피 우암은 송인수의 종증손 자(從曾孫子)이다.

414) 『圭菴集』, 卷4, 「年譜(43歲條)」. “又按先生是時 先生賃居終南山下成昌山希顏舊第, 有林園澗磎 淸邃之趣. 中表弟鄭林塘惟吉及一 啄.”

규암에게 준 임당 정유길의 시(『圭菴集』, 卷3, 「諸賢唱酬詩篇」. 次圭菴宋兄終南寓舍韻 林塘鄭惟 吉).

415) 『淸陰集』, 卷6, 「哭象村先生申公」.

416) 청음과 신흠의 관계는 청음 김상헌의 학문적 연원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417) 『圭菴集』, 卷3, 「崇賢書院記(乙丑十一月, 東陽申欽撰)」. “宋侯以欽爲宋之宅相, 屬以詔後之文, 欽不辭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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