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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내용과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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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청음 김상헌의 교육사상

2) 교육내용과 방법

선생은 천품(天稟)이 매우 고상하여 어려서부터 『소학』을 즐겨 읽었고 평생 수용 (受用)함이 이 밖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대요(大要)는 지경(持敬)과 역행(力行)으로 주 (主)를 삼아 가정에 있을 때는 그 도리를 곡진히 하여 윤리(倫理)는 반드시 바르게 하 고, 은의(恩義)는 반드시 독실하게 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임금 섬기기에 예를 다하여 털끝만큼도 예사로이 넘기지 않았다. … 그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 어렵고 쉬운 절차는 하나같이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유법(遺法)을 따랐다. 대개 그 도(道)는 수신(修身)·제가(齊家)로부터 미루어 나갔으므로 본말(本末)이 겸비되고 내외(內外)가 다 이루어져서, 말로서는 다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457)

청음이 『소학』을 내면화하여 지경(持敬)과 역행(力行)으로 강상윤리의 도리 를 다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소학』의 강상윤리를 중요시했다는 점은 청음이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비판한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김상헌은 1625년 (인조 3) 인조에게 올린 차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과거에 광해(光海)가 덕을 상실하여 윤리(倫理)를 무너뜨리고 간신(諫臣)과 보상(輔 相)을 내쫓아 귀양보냈으며 온 나라에 포학한 독을 뿌렸으므로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 리가 드높은 상황은 도탄 속에 빠진 것보다도 더 참혹하였습니다.458)

광해의 잘못 중 두패이륜(斁敗彛倫)을 가장 우선하여 들고 있다. 강상윤리를 가장 근본으로 한 청음의 입장에서 광해군의 폐모살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청음은 폐모살제 당시 이에 반대하다 북청(北靑)으로 유배된 이항복(李恒福)을 위해 「양산야인담록(楊山野人談錄)」을 저술하여 그 뜻을 기렸다. 그 내용에는 선조대 어진 인재들이 여럿 있었는데,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필운(弼雲) 이항복이 대표적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시 큰 공을 세워 나라를 다시 중흥시키는 일을 했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폐모론이 일자 세 신하는 모두 유배되어 쫓겨났음을 서술하고 있

457) 『宋子大全』, 卷182, 「石室金先生墓誌銘」. “先生天分甚高, 而自少喜讀小學書, 平生受用, 不外於 此, 大要以持敬力行爲主, 居家曲盡其道, 倫理必正, 恩義必篤, 立朝則事君盡禮, 一毫不敢放過. 其 進退難易之節, 一遵晦翁餘矩, 蓋其道自修齊推而進之, 故本末兼該, 內外殫盡, 言蓋有所不能究也.”

458) 『仁祖實錄』, 卷10, 인조 3년 9월 7일 壬子. “向者光海失德, 斁敗彝倫, 竄逐諫輔, 毒虐四方, 萬 姓嗷嗷, 慘於塗炭.”

다. 청음은 이항복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서인(廢庶人)의 불가를 논한 것을

『춘추』의 의리라고 하였다. 이어서 청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가령 이미 사그라진 천리(天理)가 장차 다시 회복되어 밝아지고 이미 무너진 이륜 (彛倫)이 장차 다시금 펴지게 된다면, 또한 두려워할 바가 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 다. 사람들은 필운공의 이 의논이 『춘추』의 의리를 얻은 것이라고들 하는데, 아닙니 까? 옛날에 한 위공(韓魏公)은 자애와 효성에 대한 설로써 황제와 태후를 잘 이끌어 주어 끝내는 능히 모자간의 은혜를 보전하게 해 송나라 황실의 미덕이 되게 하였습니 다. 공의 마음은 한 위공과 더불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한 위공의 일을 이 루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유독 공만의 불행일 뿐이겠습니까. 아, 애석한 일입니 다.459)

천리가 다시 회복되고 무너진 윤리가 다시 회복된다면 이항복을 죄주자고 했 던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항복의 의논이 『춘추』의 의 리이며, 송나라 때 명재상(名宰相)인 한기(韓琦)의 사례를 들어 모자간의 윤리를 지극히 하는 것이 이항복의 뜻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청음은 김지수(金地粹) 에게 준 시에서도 “동강 어른 이제 죽어 의로운 일 끝났건만, 높은 풍모 아득 멀 어 날로 더욱 유유하리.”460)라고 하면서 동강(東岡) 이항복의 행동을 의로운 일 [義事]이라고 하였다.

청음은 또한 『종덕신편(種德新編)』을 읽고 난 뒤 쓴 글에서, 김육(金堉)은 차 마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인인군자(仁人君子)이며, 이 책은 김육이 그러 한 마음을 행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쓴 책이라고 평가하였다.461) 『종 덕신편』은 1644년(인조 22)에 김육이 『소학』을 읽고서 도덕 함양을 목적으로 지은 책이다. 『소학』이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인(仁)의 마음을 닦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청음의 강상윤리를 중시하는 모습은 다음의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조반

459) 『淸陰集』, 卷39, 「楊山野人談錄.(丁巳年贈別白沙李相公).」. “使旣熄之天理將復明, 已斁之彝倫將 復敍, 亦不可謂無所懼矣. 人以爲公之此議, 得春秋之義者非耶. 昔韓魏公, 以慈孝之說, 導帝與太 后, 卒能全母子之恩, 爲宋室美德, 公之心, 與魏公無異, 而獨不能成魏公之事, 此則豈獨公之不幸而 已乎. 吁可惜哉.”

460) 『淸陰集』, 卷2, 「贈鍾城府伯金去非/(二首. 名地粹.)」. “岡老云亡義事休, 高風緬邈日悠悠.”

461) 『淸陰集』, 卷39, 「書金侍郞伯厚種德新編後」.

정 직후인 1623년 청음은 반정공신인 김류(金瑬)에게 서찰을 보내, 폐비(廢妃)의 병세를 돌보게 하고, 폐비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은덕을 베풀 어야 한다고 하였다.462)

송시열은 묘지명에서 청음의 출처의리(出處義理)도 소학에 근거하여 행했음을 밝히고 있다. 청음의 출처관은 “훌륭한 신하(大臣)는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고, 그 도를 실현할 수 없으면 그만둔다.”463)라는 『소학』의 말을 근본에 두고 있다.

이러한 청음의 사상은 병자호란을 통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는데, 청음 은 「풍악문답(豊岳問答)」에서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의리를 따르는 것이 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사군자(士君子)의 진퇴는 오직 의(義)일 따름 이다”464)라고 하여,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할 때 어가(御駕)를 호송(護送)하지 않은 이유를 의(義)에 따른 행동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청음의 사상은 송시열의 언급에서처럼 『소학』과 주자의 유법(遺法)을 따른 행동이었 다.

청음은 『소학』과 함께 『예기』를 매우 중시하였다. 성리학과 예학은 서로 표리의 관계에 있다. 예가 사회의 객관적 규범이라면 성리학은 이 규범을 지키기 위해 인륜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며, 성리학의 최고 가치 기준인 리 (理)는 예의 실천을 통하여 구현되기 때문이다. 주자는 “예는 천리(天理)의 절문 (節文)이요, 인사(人事)의 원칙이다.”465)라고 하였으며, 천리는 예의 원리이니 천 리의 실천이 바로 예라 할 수 있다(최영성, 2006b: 326-334).466) 다시 말해서, 성 리학이 도학을 실현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심성론적 근원을 구명하려는 이론체계 라 할 때, 예학은 도학을 실현하려는 실천적 규범의 학문이라 할 것이다. 성리학 이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면, 예학은 치인(治人)·안인(安人)의 외적 실천에 비중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鄭仁在, 1982/최영성, 2006b: 328 재인용).

그런데 조선 전기에는 예학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였

462) 『淸陰集』, 卷40, 「與北渚金判書.(癸亥)」.

463) 『小學』, 「明倫」. 54章. “大臣, 以道事君, 不可則止.”

464) 『淸陰集』, 「年譜」, 卷2, 「숭정 11년 무인(1638, 인조16) 선생 69세」. “著豊岳問答. 古人有言, 臣之於君從其義, 不從其令.”

465) 『論語集註』, 「學而」, 12章. “禮者, 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也.”

466) 『禮記』, 「樂記」. “禮者也, 理之不可易者也.”라고 하였으며, 「仲尼燕居」에서는 “禮也者, 理也.”

라고 하였다(최영성, 2006b: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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