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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림서원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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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제주오현 교육사상의 사상적 연원과 귤림서원의 형성

3) 귤림서원의 성립

본래 서원이란 강학(講學)과 존현(尊賢)의 두 가지 기능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교육기관이다. 따라서 단순히 글만 가르치는 서당이나 서재(書齋), 정사(精舍) 등 과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우(祠宇), 향현사(鄕賢祠)와는 다르다.105) 귤 림서원인 경우는 바로 서원으로 건립된 것이 아니라 존현의 기능과 장수(藏修)의

105) 정만조(1997)에 의하면 17세기 이후에는 사실상 이러한 구분이 사라져 뒤섞여 사용되었다(정만 조, 1997: 89-97 참조).

기능이 각각 따로 건립, 운영되다가 하나로 합쳐져서 서원으로 발전된 형태를 보 인다.

그런데 귤림서원의 성립과 관련해서 각종 제주도 관련 향토지류 등에서는 충 암묘(冲庵廟)와 장수당(藏修堂), 귤림서원의 건립과 제주오현의 봉안 연도를 다르 게 또는 다소 헷갈리게 기록해 놓고 있다. 여기서는 그 기록들을 모두 확인한 후 귤림서원 건립과 제주오현 봉안 시기를 특정(特定)해 보고자 한다.

(1) 충암묘의 건립

귤림서원은 충암 김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건립한 것에서 출발한다. 그 내용 은 임제(林悌)의 「충암묘기(冲庵廟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趙仁後)가 충암 선생의 적거지를 찾았으나, 방치된 것을 확인하고 충암을 추모하기 위해 당시 제주목사 임진(林晋)과 의논하여 충암 묘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임진에게 문과 합격을 알리기 위해 내도(來島) 했던 임제에게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임제는 사우(祠宇)의 건립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예로부터 사우는 두 가지 경우에 세웠다. 공로가 족히 보답을 받을 만하면 세웠고 덕이 족히 세상을 깨우칠 만하면 세웠다. 그 사우를 받드는 것은 대체로 영원히 존경 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니, 그 아름다운 정령(精靈)의 발자취를 오 랜 세월 동안 제사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 여러 대를 통틀어 드물게 특출하게 살았으 니 그 삶과 죽음이 다 운수[氣數]에 따른 것이다.106)

사우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는 이유에 대해 ‘영원히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 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조인후 판관이 충 암묘를 건립하게 된 이유와 충암의 공적에 대해서 언급한다. 또한 충암묘를 위한 재정확보 방안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한다. 임제의 「충암묘기」는 『임백호 집(林白湖集)』에 실려 있으며, 이후 제주의 향토지류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

106) 『林白湖集』, 卷4, 「濟州金冲庵祠宇新修文」. “古之祠者有二焉, 功可以受報則祠, 德可以警世則 祠. 其祠也, 蓋將以圖不朽, 起敬慕, 而其英靈精爽, 足以廟食乎千秋者, 必也間世挺生, 而其生也, 其死也, 有關於氣數者矣.”

다.107)

(2) 장수당의 건립

장수당은 1660년(현종 1)에 제주목사 이괴(李襘)가 제주유림 김진용(金晉鎔)의 건의를 받아들여 건립하였다.108) 1841년(헌종 7) 윤3월부터 1843년(헌종 9) 6월까 지 제주목사를 지냈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재임 중 저술한 『탐라지초 본(耽羅誌草本)』에 이괴의 기록이 실려 있다.

내가 같은 해(1658년) 4월 제주에 도착하였다. 임금님의 덕화(德化)를 펴는 데는 흥 학(興學)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먼저 제주․대정․정의 세 고을의 향교 유생들 을 모아, 경전을 배우는 것을 살피니, 손수 농사를 짓는 여가에 사서·소학을 읽고 두루 음과 해석이 통할 수 있는 이가 많았다. 그 읽는 소리가 청아하고 낭낭하며 기질이 맑 고 수려한 이 20인을 골라, 관청에서 책과 식량을 지급하고, 향교 곁에 여섯 칸 초가집 을 지어 그들로 하여금 거접(居接)하도록 하였다. 또 일찍이 경서를 읽은 이들을 차출 하여 훈장으로 삼고 이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중략) 이곳 사람인 진사 김진용은 여러 번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식년시의 강경(講經)에서 모든 과목에 점 수를 얻어 참봉이라는 보직을 받았으나, 벼슬하려고 하지 않고, 귀가 먹었다고 하여 스 스로 가리고 물리쳐, 산야에 숨어 사는 사람이다. 그가 옛사람의 책들을 많이 읽었으므 로, 좌수(座首)로 삼았다. 나의 임기가 다 되어갈 무렵에 김진용이 나를 가리키며 다음 처럼 말하였다.

“사또가 부임하신 이래, 여러 유생을 뽑아 모으고 학업을 권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여러 유생도 좇아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고, 문학이 크게 변하였는데, (목사님의) 덕을 입음이 큽니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이만 해 두고 그냥 돌아가게 되 면, 여러 유생이 다시 의지하여 돌아갈 바가 없습니다. 모두 장차 그 학문을 포기하고 농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어찌 애석함이 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자, 김진용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주 성 남 쪽에 버려진 집터가 하나 있는데, 옛날 한성 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집터입니다. 고득종 의 두 아드님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현달하였으니, 본디 ‘이름난 집터’라고 일컬어집니다. 여기에 몇 채의 집을 지어 공부하는 곳으로 삼으시고, 약간의 책과 식량

107) 李元鎭, 『耽羅志』.; 李源祚, 『耽羅誌草本』

108)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초본』에는 장수당이 1658년(효종 9)에 건립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괴 의 장수당기(藏修堂記)를 보면 1658년 4월에 제주목사로 부임, 내도하였고 2년이 지난 후인 1660 년에 김진용의 건의로 장수당을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을 조처해 주신다면, 가히 영세토록 잊히지 않을 은성한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 다. (중략) 이에 장인들을 부르고 재목을 모아 12칸 학사(學舍)를 마련하고, 이름을 걸 어 장수지당(藏修之堂)이라고 하였다. 어린아이 15인을 더 뽑아, 앞 해에 20인과 함께 아울러 더하여서, 35인이 되었다. 또 제주에 조적의 더 받아둔 모곡 외에 또한 3백 곡 (斛)의 모곡 회록의 일이 대정․정의 등 다른 고을에 없는 바이었는데, 연유를 갖추어 임금께 잘라 주기를 청하여 아뢰었고, 거접생들에게 줄 양식으로 삼았다. 또 모자랄까 걱정하여 콩 1백곡(斛)․전미(田米) 50곡․모(牟) 50곡․목면(木棉) 2동을 조달하여 지 급하였고, 배 1척을 정해 주어 육지로 나아가 무역하며 쌀을 잇도록 하였다. 유사 두 사람을 뽑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대략 창시한 본말을 적었다고 말할 따름이 다.109)

제주목사 이괴가 부임하여 흥학(興學)을 위해 학생들을 고강(考講)하고 우수한 학생 20명을 골라 향교 옆에 초가집을 지어 거접하도록 하였다. 또한 경서에 능 한 사람을 골라 훈장으로 삼고 가르치게 하였다. 그 2년 후가 되자 많은 학생이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그때 제주유림 김진용이 이괴 목사에게 청하여 제주 출신 고득종의 집터에 공부하는 곳을 지어줄 것을 청하고 이를 받아들인 이괴 목사가 12칸의 학사를 지어 ‘장수지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동몽 15인을 더 선발하여 앞서 뽑은 20명과 함께 거접하게 하여 학생수는 35명이 되었다. 이 기록을 보면 장수당은 이괴 목사가 부임하고 2년이 지난 후인 1660년에 세워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수령의 7가지 책무[守令七事]에 ‘흥학교(興 學校)’를 포함하면서 향교를 비롯한 학교를 정비해 나가는 데 힘을 기울였다.110)

109) 李源祚, 『耽羅誌草本』. 「藏修堂」. “余以同年四月到州上訖, 以爲欲宣聖化, 莫如興學, 首集三邑 校生考講, 則自手畊農之暇, 能讀四書小學, 多通音釋. 擇其讀聲淸朗, 氣質明秀者, 二十人, 官給書 糧, 搆草屋六間於鄕校傍, 使之居接. 又差曾讀經書者, 爲訓長, 以敎之. … 土民進士金晉鎔, 乃累擧 不中, 以式年講經連畫, 補參奉, 不肯仕, 聾病自廢屛, 伏山野者也. 以其多讀古人書, 署以爲座首.

余將瓜熟, 晉鎔指余言曰, 使道下車以來, 招集諸生, 勸課不怠, 諸生亦從化勤學, 文學丕變, 蒙德 大矣. 然若但如此而棄歸, 則諸生更無依歸之所擧, 將棄其學而歸之農, 豈非可惜之甚乎. 余曰, 奈 何. 晉鎔曰, 城南有一廢基, 乃故判尹高得宗之舊址也. 高判尹之兩子, 皆登文科, 顯于朝, 素稱爲名 基. 若於此搆數椽屋, 以爲藏修之所, 措置如干書糧, 則可爲永世不朽之盛事云. … 於是, 召匠鳩材, 築學舍十二間, 揭名曰, 藏修之堂. 加抄童蒙十五人, 益之並前年二十人, 爲三十五人矣. 且本州有糴 穀三分耗外, 又以三百斛耗穀會錄之事, 乃他邑之所無也. 具由啓聞請減, 以爲居學糧料. 又恐其不 足, 則辦給太一百五十斛, 田米五十斛, 牟五十斛, 木棉二同, 定給船一隻, 以爲出陸, 貿遷繼糧之地.

差有司兩人, 以主其事. 略記創始本末云.”

110) 지방관 평가의 기준이 되는 ‘수령칠사’는 당초 1406년(태종 6)에는 ‘존심인서(存心仁恕), 행기렴 근(行己廉謹), 봉행수령(奉行修令), 권과농유(勸課農桑), 수명학교(修明學校), 부역균평(賦役均平), 결송명윤(決訟明允)’ 등이었으나 1483년(성종 14)에는 ‘농상성(農桑盛), 호구증(戶口增), 학교흥(學 校興), 군정수(軍政修), 부역균(賦役均), 사송간(詞訟簡), 간활식(奸猾息)’ 등의 7가지 사항으로 개

사림파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학교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실현의 문제였지, 그것 이 관학이냐 사학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황금중, 2006a:

403-404). 이는 풍기 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으며, 역시 풍기 군수 였던 퇴계가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을 통해 조정에 건의하 였고, 심통원이 퇴계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수령칠사의 흥학교는 관학과 사학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제주에 부임 한 목사 역시 수령칠사의 임무에 따라 향교에서 학생 고강을 시행하였고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풍의 진작을 위한 충암묘의 설립과 장수당의 건립 그리고 귤 림서원의 건립까지 주도하였다.

(3) 귤림서원의 건립

귤림서원은 장수당 건립 7년 후인 1667년(현종 8)에 제주판관 최진남(崔鎭南) 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역시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 최진남의 기록이 실려 있다.

내가 을사년(1665년, 현종 6) 봄 2월에 이 고을의 판관에 제수되었다. 5월을 지나 비 로소 바다를 건너 관청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먼저 향교에 도착하여 삼가 문묘에 절하 였고, 이어서 충암 김정 선생의 묘당에도 절을 하였다. 첨배(瞻拜) 한 뒤에 집채들을 둘러보았는데,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장차 무너지는 것을 면키 어려웠다. 또 그 터자리 가 좁고 막히었고, 공자 위패를 모신 문묘의 문밖에 바짝 붙어 있어, 서원을 세워 공부 하는 땅으로서는 실로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곧 옮겨 지으려는 뜻을 품었으나, 그 터 로서 가히 합당한 곳을 얻지 못하여, 늘 마음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하루는 여러 유생의 강론을 점고하는 일로 장수당에 가 보았다. 이른바 장수당이라 고 부르는 곳은 이괴 목사가 제주를 다스릴 적에 여러 유생을 위해 지은 바이다. (중 략) 이에 좋은 곳을 기쁘게 얻어 드디어 서원을 옮길 계책을 세웠다.

3년이 지나 정미년(1667년, 현종 8) 봄 3월에, 장인들을 불러 설계를 하고, 날을 점쳐 서 일을 시작하였다. (중략) 이어 서원의 이름을 걸어 ‘귤림서원’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서원이 귤 숲속에 있기 때문이다. 묘지기 14명을 모집하고 그 신역을 면제하여 교대로 지키도록 하였다. 또 원장 1인과 유사 2인을 정하여 서원의 모든 일을 주관하게 하였 정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등재되었다. (『경국대전』, 卷1, 「吏曹․考課」 부분 참조.). 박종배 (2006a: 307).

다. 또 유생 가운데에서 가히 배울 만한 이들을 골라 서원의 학적(院籍)을 따로 만들어 서, 어진 이를 받들어 알게 함으로써 공부해 나아가는 데에 목표가 있게 하였다. 무릇 유생들 가운데 이 원록에 들어 있는 이들은 가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학자의 길을 다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오호라, 김정 선생의 사적은 대략 만력 무인년(1578년, 선조 11)에 쓰인 임제의 묘당 을 세우는 기록에 실려 있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므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선생이 이 고을에 유배 와서 사람을 일깨우는 데에 게으름이 없었고, 멀리 떨 어진 황량한 곳의 특이한 풍속을 크게 바꾸어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고을로 만들었으 니, 어찌 선생의 덕이 지극함이 아님이 없겠는가? 뒷사람들이 우러러 사모함을 그치지 않음도 마땅하다. 이에 대략 서원을 옮긴 전말을 적어 뒷사람들이 보는 데에 갖춰 둔 다고 하겠다.111)

위의 기록에는 최진남 판관이 부임 후 귤림서원 건립과정이 상세히 드러나 있 다. 충암묘가 너무 오래되고 터가 좁고 막혀있어서 서원 건립에 좋은 입지 조건 이 아니었다. 반면에 장수당은 한라산의 정맥이 뻗어 내려오고 아래로 바다가 훤 히 드러나서 서원을 세우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진남 판관 부임 후 3년이 지난 1667년(현종 8) 귤림서원이 건립되었다.

귤림서원 건립 과정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충 암 김정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충암묘를 세웠다. 그리고 1660년(현종 1)에 제주목 사 이괴가 제주유림 김진용의 건의를 받아들여, 옛 한성판윤 고득종의 집터에 장 수당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667년(현종 8)에는 판관 최진남이 서원 건립 계획을 세웠으나 충암묘의 입지적 조건이 좋지 않아 충암묘를 장수당으로 옮기고 서원 을 건립해 귤림서원이라고 원호를 지었다.112) 이로써 제향공간과 강학처(장수당)

111) 李源祚, 『耽羅誌草本』. 「崔鎭南記」. “余於乙巳春二月除拜本州通判. 越五月, 始得渡海上官. 翌 日首詣鄕校, 祗謁文廟, 因謁冲菴先生廟, 瞻拜之餘, 顧見棟宇, 歲月已久, 未免將圮. 且其基址狹隘, 而逼在聖廟神門外, 立院藏修之地, 實非其所, 卽有移建之志, 而不得基地之可合處, 常慨然於心矣.

一日因諸生考講事, 往于藏修堂, 所謂‘藏修堂’, 卽李公禬按島時, 爲諸生所搆也. … 於是, 喜得其嘉 處, 遂定移院之計. 越三年, 丁未, 春三月, 召匠計之, 卜日經始. 而于斯時也, … 乃揭其院號曰, ‘橘 林書院’. 盖取其有橘林也. 募入廟直十四名, 除其身役, 交遆守直. 且定院長一, 有司二, 主管其院中 凡事, 又於儒生中, 擇其可學者, 別錄爲院籍, 使知尊賢, 趨向之有所, 凡儒生之入於是錄者, 可不惕 念, 而盡學者之道乎? 嗚呼, 先生事蹟, 畧載於萬曆戊寅, 建廟之記, 至于今日, 不必更擧, 而先生淪 謫本州, 誨人不倦, 使遐荒殊俗, 丕變絃誦之鄕者, 何莫非先生之德之至也? 後人之景慕不已也, 宜 哉. 於是略記其移院顚末, 以備後觀云.”

112) 그런데 각종 제주도 관련 향토지류 등에서는 충암묘와 장수당, 귤림서원의 건립 연도를 다소 헷 갈리게 기록해 놓고 있다. 즉,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서도 충암묘의 건립을 1577년(선조 10)이 라고 하였고, 귤림서원의 건립 역시 1665년(현종 6)이라고 하였다. 이는 조인후 판관과 최진남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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