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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지의(事理之宜)를 위한 공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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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규암 송인수의 교육사상

2) 사리지의(事理之宜)를 위한 공부론

진정한 의미의 학문은 실천을 바탕으로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학문을 통 해 명덕을 밝히고, 그것이 지어지선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대학』의 삼강령을 충실히 언급하고 있다. 규암에게 있어서 공부와 수 신은 곧 치인과 신민을 위한 실천적 도학 교육사상인 것이다.

직에서 물러나면 온 세상에 교화를 베풀어 학자에게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320) 라고 하였다. 율곡 이이가 말한 도학과 진유의 모습은 규암이 바라던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규암의 공부론은 도학자의 공부요, 진유의 공부였던 것이다.

송인수의 도학 범주에서 두드러지는 분야는 의리론(義理論)이다. 흔히 도학자 들은 자기 학문의 성향을 ‘의리지학(義理之學)’이라고 표현한다. 이때의 의리지학 은 천리(天理)에 기반을 두고 인간의 보편성으로 내재된 규범 원리[義]에 의하여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인식하고 동시에 지속적인 자기 개혁과 사회비판의식을 가지면서 구체적 현실에서 마땅함[宜]을 실현하는 사상이다(오석원, 2005: 25-26).

따라서 의리의 실천은 단순한 도덕성의 체현이라는 원리적 의미 이외에 자기 자 신의 능력은 물론 사물의 이치를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보충되어야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즉, 사물에는 정해진 분수가 있는데 이를 알아서 내가 마땅하게 처리하는 것이 의(義)인 바, 이를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를 정밀하 게 궁구하여 통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義)를 ‘사리지의(事理之 宜)’321)라고 한다(오석원, 2005: 21-22).

이러한 의리사상의 교육적 특징은 앞서 살펴본 김정의 교육사상과 다소 결을 달리한다. 다시 말하면, 충암 김정의 교육사상이 주리적 관점에서 ‘경’을 중시하 는 수양론을 강조한 것이라면, 규암의 교육사상은 의리사상의 내재적 원리로서 사물의 이치를 판단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관점에 기인하여 규암의 공부론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규암은 1523년(중종 18) 홍문관 정자에 옮겨져 신재 주세붕과 함께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322) 사가독서제는 현직에 있는 관리들에게 군왕이 특별 휴가를 주어 직책을 유지한 채 직무에서 벗어나 경서의 독서 및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 록 한,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한 권학진흥책(勸學振興策)의 목적으로 시행된 제

320) 『擊蒙要訣』, 卷15, 「東湖問答」. “夫所謂眞儒者, 進則行道於一時, 使斯民有熙皥之樂, 退則垂敎 於萬世, 使學者得大寐之醒.”

321) 蔡淸, 「折中」 注. “義字, 事理之宜.”

322) 이때 주세붕과 서로 주고받은 시와 독서당(讀書堂)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지어 바친 시문(詩文)이 『규 암집』에 몇 편 남아있다. (『圭菴集』, 卷4, 「年譜」. “二年癸未 先生二十五歲. 七月. 遷弘文正字. 賜 暇湖堂. 按先生妙年釋褐, 未數年, 膺是命, 乃極選也. 時周愼齋世鵬爲堂僚. 有唱酬詩什及湖堂月課 數篇.”)

도이다. 따라서 이 제도는 주로 세종, 성종, 중종 등과 같이 문치(文治)에 관심이 많았던 군왕들의 비호 아래 발생하고 발전하였다(서범종, 2003: 7).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젊고 재예(才藝)가 있는 문신이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통훈(通訓) 이하의 문신으로서 문학이 특이한 자’

로 사가독서의 자격을 규정하고 있다(서범종, 2003: 7). 1426년(세종 8)에 시행된 사가독서 제도는 세조 때 중단되었다가 성종 때 부활하여 1773년(영조 49)까지 이어진다. 이 기간에 한 해 평균 6명 내외가 선발되고, 총 선발인원은 300여 명 내외이다(서범종, 2003). 이렇듯 사가독서 제도는 약 300년 넘는 기간 동안 300여 명만이 선발된 것으로서, 젊은 문신들이 학문에 진력하도록 하는 특혜적 성격의 재교육(再敎育) 제도였다.323)

송인수가 사가독서제도에 선발되었다는 것은 송인수의 역량이 뛰어났음을 뜻 한다. 또한 송인수는 사가독서제도를 통해 독서와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고, 이 를 통해 학문적 역량이 더욱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규암은 수양의 공 부보다는 경전을 통해 의리를 탐구하는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다음의 시에서 이 를 잘 살펴볼 수 있다. 규암이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김제동헌에서 읊은 시이다.

경전을 들고 학자들을 맞이하네 執經迎學士

주미를 휘저으며 어찌 청담(淸談)을 논하랴 麾麈豈淸談

염계와 정자는 진정한 스승이요 濂洛眞師表

시경과 서경은 우리의 지남(指南)이라네 詩書是指南

과거와 미래를 마음으로 꿰뚫어서 去來心貫一

하늘·땅과 더불어 삼재(三才)가 되어야지 天地我參三 실추된 도맥(道脈)을 누가 이어갈 것인지 墜緖誰能續 어리석고 무지하여 낯빛만이 붉어질 뿐 倥侗面發慙324)

323) 사가독서제도는 정조대에 초계문신(抄啟文臣) 제도로 이어진다. 정조는 즉위 직후 규장각(奎章 閣)을 설치하여 학문연구의 중심 기관이자 자신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핵심 기관으로 운영하였 다. 그리고 과거를 거친 사람 가운데 당하관(堂下官) 출신으로 37살 이하의 젊은 인재를 뽑아 3년 정도의 특별 재교육인 초계문신제도를 실시하였다. 초계문신제도는 1781년 시작되어 정조가 사망 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총 138명을 선발하였다. 이들 명단은 『초계문신제명 록(抄啟文臣題名錄)』에 기록되어 있다. 초계문신의 대표적 인물이 정약용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 은 신병주(2012)와 최두진(2009)의 연구 참조. 신병주(2012). 「정조의 규장각 설치와 초계문신 제 도」. 『지방행정』 61(702). 대한지방행정공제회. 71-72. : 최두진(2009). 「정조대의 초계문신 교육 제도 연구」. 『교육사상연구』 23(1). 한국교육사상학회. 229-248.

324) 『圭菴集』, 卷1, 「次金堤東軒韻」.

규암의 경서(經書)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는 시이다. 주미(麈尾)를 흔들면 서 한담(閑談)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통해 의리를 탐구해야 하고 그 의리 의 지향은 송대 성리학자들임을 밝히고 있다. 염계·정자·횡거·주자를 사표로 삼 아, 의리지학에 침잠(沈潛)하여 실추된 도학의 맥을 잇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 고 있다.

특히 『시경』과 『서경』이 공부의 지침서라고 한 것이 주목된다. 주지하다시 피 『서경』은 도학 사상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경서이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순일함을 지켜서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 .”325)라는 『서경』의 경구(警句)는 도학자들이 늘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하는 지남(指南)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규암은 또한 주세붕에게 준 시에서 “아첨하는 말에서는 허식적인 공경임을 알 고, 경계하는 말에서는 진심으로 친애함을 알아, 아침마다 베어 내지 말고, 나날 이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言知貌敬, 警語識心親, 莫遣朝朝伐, 應須日日新].”326) 라고 하여, 『서경』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327)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서경』은 지치주의의 사상적 근원328)이 되는데, 송인수 역시 조광조 의 지치주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경』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329)

송인수는 인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조광조의 신원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그 는 “조광조의 직첩(職牒)을 도로 주기를 청하는 것은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 (侍從)·유생(儒生)의 말로 온 나라가 뜻을 같이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온 나라의 뜻을 어기고 이 사람(조광조)에 대해서만 치우치게 고집하시니, 신들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330)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기묘사림이 시행했던 현량과의 부활도 요청한다. 같은 상소에서

325) 『書經』, 「大禹謨」.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326) 『圭菴集』, 卷1, 「次景遊韻」.

327) 『書經』, 「商書」.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328) 지치(至治)라는 용어는 『서경』, 「군진(君陳)」에 나오는 말로 주공(周公)의 교훈 속에 들어 있다.

“지극한 정치는 향기로워[至治馨香] 신명에 감동되니 서직(黍稷)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 이 향기롭다[明德惟馨].”라고 하였다.

329) 기대승은 송인수가 평생 기묘사림을 흠모하였다고 평가하였다.(『高峯集』, 「論思錄」. 윤6월 7일.

“麟壽一生欽慕己卯之人.”

330) 『仁宗實錄』, 卷2, 인종 1년 4월 13일 乙巳. “ 趙光祖職牒還給之請, 大臣, 臺諫, 侍從, 儒生之 言, 可以知一國之同情. … 而違一國之情, 偏執於此人, 臣等之惑滋甚.”

그는 “얼마 전 기묘년에 있었던 천거과(薦擧科)는 참으로 옛사람의 뜻을 본뜬 것 이어서 애초부터 거짓되고 외람된 허물이 없습니다. … 까닭 없이 폐기하였습니 다.”331)라고 하여, 어진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서는 현량과와 같은 천거제를 활용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송인수의 의리사상을 위한 공부론은 위기지학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규암은 인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완고한 풍습을 엄격히 고치고 폐습을 바로잡아 위기지학으로 이끌어야 한다.”332)라고 하였다.

선비가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동기와 목적은 바로 인간존재의 자기실현에 있 는 것이므로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며, 출세를 위한 것은 더욱 아니다. 인간의 존재 원리가 본래 도덕적 삶을 살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최선의 힘으로 인간의 도리를 다하여 자기의 존재가치 를 구현하고 자기의 생을 마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논어』에서 공자가 언급 한 위기지학333)인 것이다(오석원, 2007: 349).

다음의 시는 규암이 연꽃의 모습을 통해 군자를 형상화한 시이다. 위기지학을 추구하는 규암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백 척의 사다리 타고 아스라한 누대에 올라 危樓一上百尺梯 거울 물속에 붉게 단장한 연꽃을 바라보니 紅粧明鏡望欲迷 곧은 것이 과연 군자의 성품임을 알겠으니 通直端知君子性 옥 같이 서서 끝내 진흙에 물들지 않았어라 玉立終不染淤泥 맑은 향기 거듭 맡으며 맑은 바람을 붙드니 三嗅淸香把淸風 겉만 화려한 부화 낭예와 비할 바가 아니니 不比浮華浪蕊紅

난간에서 자세히 읽는 애련설은 臨軒細讀愛蓮說

불현듯 염계옹을 떠올리게 하네 令人却憶濂溪翁334)

연꽃은 줄기가 비어있고 꽃대가 곧게 뻗었다. 속을 비워 물욕(物慾)에 얽매이 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군자의 성품에 비유하였다. 진흙탕 속에서 자랐으면서도

331) 『仁宗實錄』, 卷2, 인종 1년 4월 13일 乙巳. “頃在己卯, 薦擧之科, 實倣古人之意, 初無僞濫之 釁. … 無故而廢棄”

332) 『仁宗實錄』, 卷2, 인종 1년 4월 13일 乙巳. “今若痛革頑風, 釐正弊習, 倡以爲己之學.”

333) 『論語』, 「憲問」.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334) 『圭菴集』, 卷1, 「次求禮鳳城八詠, 樓頭賞蓮」.

연꽃은 조금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깨끗한 꽃을 피우는 것은 아무리 환경이 나 빠도 이를 다 극복하고 자신을 수양해 나가는 군자에 비유하였다. 연꽃의 맑은 향기 맑은 기풍(氣風)은 봄 햇살 속에서 겉모습만 화려하게 꾸미는 꽃들에 비교 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위기지학을 하는 군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규암은 연 꽃을 보고 군자다운 행신(行身)을 배우려는 의지를 다짐하였다고 볼 수 있다(허 권수, 2006: 123).335)

규암은 송대 유학자뿐만 아니라 공맹(孔孟) 유학도 매우 중요시 하였다. 앞서 시에서 『시경』과 『서경』이 지침서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김언거 (金彦琚)가 금산군으로 부임할 때 준 시에서 “배운바 이미 갈 길을 알아서, 말할 때면 늘 공자와 주자를 칭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마주 앉아 근심을 잊었었지.”336) 라고 하였다. 단순히 경전의 문구를 읽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통해 가야 할 바를 아는 것, 그것이 규암이 평생 공부에 매진한 이유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규암 공부론의 특징은 조선 전기에서 중기를 잇는 사 상사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수양론으로서의 ‘성(誠)·경(敬)’ 공부보다는 학문을 통 해 의리사상의 실천적 역량을 키우는 데 보다 천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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