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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 송인수의 이기심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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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규암 송인수의 교육사상

2. 규암 송인수의 이기심성론

송인수의 이기심성론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부족하지만,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 음기」에 “선생께서 사사의 명 을 받을 때가 49세였으므로 미처 논술하여 밝힌 바가 많지 않았고, 문인들이 또 능히 남긴 학술을 수습하여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다.”297)라고 언급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아들 응경이 후손이 없어 후사가 두 번이나 끊겨서 문헌들이 전하지 않는다.298)

연구자가 『규암집』과 실록의 기사를 모두 살펴본 바로도 이기심성론이라 이 를 만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규암이 올린 상소문과 약간의 시에서 심성론에 대한 언급이 보이는데, 이를 토대로 송인수의 이기심성론을 고찰해보고 자 한다.

송인수가 남긴 저술은 없지만, 송인수가 이기심성론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한 흔적은 엿볼 수 있다.

296) 윤영선도 학맥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윤탁의 스승을 신영희로 연결시킨 것이 다르다 (『朝鮮儒賢淵源圖』, 25-26/ 안동교, 2018: 7 재인용).

297) 『圭菴集』, 卷3, 「神道碑陰記(己酉六月. 從曾孫時烈撰)」. “先生就命時, 年四十九, 不及有所論著.

門人子弟, 又未能收拾緖餘, 以傳諸後.”

298) 『圭菴集』, 「年譜跋(追跋[宋志洙])」. “先生歿後, 屢經兵燹, 嗣承再絶, 舊籍不傳.”

심성(心性)과 이기(理氣)는 혼연히 하나의 사물이건만 옛날에 학문한 사람은 혹 이를 나누어 말하기도 하고 혹 선후(先後)로 말하기도 하였다. 대개 체(體)로 논하면 리(理) 가 기(氣)에 앞서고, 용(用)으로 논하면 기(氣)가 리(理)에 앞선다. 송인수와 이언적의 설은 분명 이로 인해 혼동하여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선후의 구분을 알지 못 하게 한 것이다. 그들의 학문은 ‘분간하기는 했으나 정밀하지 못한’ 병폐를 면할 수 없다.299)

이 인용문은 이항이 허엽(許曄)에게 보낸 서신인데, 여기에서 송인수와 이언적 이 이기심성론을 논하였음을 알 수 있고 심지어 그들의 이론이 학계에서 논의가 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보에 의하면, 일재 이항은 1543년(중종 38) 송 인수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태인현(泰仁縣)에서 방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00) 이정형(李廷馨)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이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재 이항은 서울에서 자라났다. … 나이 30이 넘어서 비로소 깨달아 학문을 하여, 『대학』을 읽고 물러가 태인(泰仁)에 살았다. 스스로 나이 가 이미 많았는데 다른 책을 널리 보면 정력이 분산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대학』만 가지고 읽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평생의 사업으로 삼아서 미묘한 것 을 깊이 통달하기를 목표로 삼았다.301) 송규암이 전라감사로 갔을 때 그의 집에 까지 가서 찾아갔더니, 이로 말미암아 유명해졌다.”302)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 한 내용으로 볼 때 이항은 송인수와 교류했으며, 또한 『대학』을 중시하면서 성 리학적 철학 탐구에 깊이 침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호남 유학의 사표로 일컬 어지는 이항이 송인수를 방문하여 학문적 논의를 했음을 볼 때 송인수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기대승이 이황의 문목(問目)에 답한 내용이다.

299) 『一齋集』, 「答許參議書」. “心性與理氣, 渾是一物, 而古人爲學者, 或分而言之, 或先後言之. 蓋 自本體以論之, 理先於氣, 自用工以論之, 氣先於理. 夫宋麟壽李彥迪之說, 想必因此而混言, 使人莫 知先後之分, 其爲學問, 未免擇焉而不精之病.”

300) 『圭菴集』, 「年譜(二十二年癸卯,先生四十五歲)」. “訪一齋李公于泰仁縣.”

301) 송인수가 일재 이항에게 준 시가 『규암집』에 남아있다. “벼슬도 구하지 않고, 가난도 근심하지 않으며 『대학』의 참된 맛을 맛보고 있다고 하였다[海之南有一人, 不求榮宦不憂貧. 閒中日月工 夫在, 大學書中味更眞].”

302) 『東閣雜記』, 「本朝璿源寶錄[二]」. “李一齋恒, 長于漢師. … 年踰三十, 始悟爲學, 乃讀大學, 退 居于泰仁, 自以年紀已多, 若泛觀他書, 恐分精力, 只就大學上, 俯讀仰思, 爲終身事業, 期於洞貫微 妙. 宋圭庵按察湖南, 就訪其廬, 由是有名.”

이공(李公, 이언적)은 송규암(宋圭菴)과 ‘심(心)·성(性)’이 먼저 동한다는 말을 논했습 니다. 저는 일찍이 비난하기를 “마음이 동하는 데는 ‘먼저’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하고, 주자의 말씀에 “동하는 것은 이 마음이요, 동하게 하는 것은 이 성(性)이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밝혔습니다. 사우(士友)들 사이에서는 혹 제 말이 거의 옳다고 하였 습니다. 송규암은 이름이 인수(麟壽)이고 자는 미수(眉叟)입니다.303)

위의 두 인용문으로 볼 때 이기심성의 선후와 동정이라는 성리학적 핵심 문제 를 둘러싸고 송인수와 이언적 간에 상당한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두 사람의 문집에서는 직접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안동교, 2018).304)

송인수와 이언적이 주고받은 시에서도 그들이 이기심성론을 논했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보인다. 이언적과 송인수는 1544년(중종 39)에 백장사에서 만나 서로 강론하였다. 이때 주고받은 시가 『규암집』과 『회재집』 모두에 남아있 다.

먼저 이언적이 시 중 2수의 내용이다.

산속에서 하룻밤을 등불 아래 함께하니 靑燈一夜共雲泉 늘그막의 만남이라 마음 더욱 망연하네 晩景相逢轉惘然 소균의 음악 끊겨 풍속 변화되지 않고 韻斷韶鈞風不變 염락의 물결 다해 한갓 말만 전해질 뿐 波殘濂洛語空傳 나라 위한 걱정으로 머리 빨리 세지마는 安危入念頭催白 득실을 다 잊으니 도가 절로 온전하네 得喪忘機道自全 인간 세상 변덕스레 모이고 흩어지니 聚散人間無定態 우선 그저 물가에서 천도를 논해야지 且須臨水細論天305)

아래는 송인수가 차운한 시 중 역시 2수이다.

303) 『高峯集』, 卷3, 「答先生問目」. “李公與宋圭奄, 論心性先動之說, 某嘗非之, 以爲心爲之動, 不可 着先字, 引朱子說以動處是心, 動底是性者以明之, 士友間或以某之言, 爲庶幾云. 宋圭菴名麟壽, 字 眉叟.”

304) 안동교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이유는 아직 연구자가 『晦齋集』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기 때 문이다.

305) 『晦齋集』, 卷3, 「白場寺吟得二律錄呈眉叟求和(與宋眉叟約會此寺)」.

돌아가길 생각하여 고향 산천 이야기뿐 思歸苦說舊林泉 손을 잡고 마주 보니 도리어 슬퍼지네 把手相看却悵然 대도 듣길 원하지만 나는 이미 늙었는데 大道欲聞嗟我晩 사문 아직 건재하니 공이 전해주시리라 斯文未喪要公傳 고요히 관찰하며 연어만을 즐기시니 靜觀只有鳶魚樂 통달한 식견 어찌 목안 따위를 논하리오 達識何論木雁全 바둑에서 인간 세상 이치 이미 알았으니 棋局已知人世理 만사를 하늘에다 물으려고 말지어다 休將萬事問蒼天

이언적은 소균의 음악이 끊겨 풍속이 변화하지 않음을, 송대 성리학적 유학의 정신[濂洛]이 실현되지 않고 말로만 전해짐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송인수는 사문(斯文)이 아직 건재하니 이언적에게 그것을 이어달라고 언급하고 있다. 둘 다 마지막 연구(聯句)에서 천도(天道)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시의 내용 만 보더라도 이들이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만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문에 대한 걱정과 나라에 대한 걱정, 그리고 천도를 논하며 도학에 대해 강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545년(인종 1) 4월 송인수는 상소를 올려 새로이 등극한 인종에게 치도(治道) 의 방안을 상소한다. 여기서 송인수의 심성론의 일단이 보인다.

몸이 베풀고 조치하는 것은 하루에도 천만 가지에 이르는데 이를 주재(主宰)하는 게 형상이 없는 마음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 체(體)는 지극히 허(虛)하고 그 용(用)은 지극히 묘(妙)하여 잠시 사이에도 변화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출입이 일정하지 않 으니, 마음이 고요할 때 그것을 붙잡아 키우고, 마음이 요동칠 때 성찰하고 삼가는 데 진정으로 매진하지 않으면, 칠정(七情)이 어그러지고 백행(百行)이 거꾸러져서 당연의 법칙에 벗어나 몸이 닦아질 수 없을 것입니다. 몸이 닦아지지 않고서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306)

위의 상소문에서 송인수는 심(心)의 주재(主宰)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성리학에

306) 『仁宗實錄』, 卷2, 인종 1년 4월 13일 乙巳. “身之設施注措, 日至千萬, 而宰之無形者, 心也. 心 之爲物, 其體至虛, 而其用至妙, 頃刻之間, 變化不測, 而出入無常, 苟不操存而養其靜, 省察而謹其 動, 則七情謬戾, 百行顚倒, 失其當然之則, 身不可得修矣. 身之不修, 而有能治國家者乎”

서 심은 지각 능력과 주재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주자는 심이 능히 만사에 응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심이란 사람의 지각인데 몸에서 주재하 며 사물에 응하는 것이다.”307)라고 하였다(진래, 1987/이종란 외 역, 2002: 243).

또한 주희는 “심의 온전한 본체는 담연허명(湛然虛明)한데, 만리(萬理)를 갖추고 서 한 터럭의 사욕(私欲)도 없다. 두루 유행(流行)하여 동(動)과 정(靜)을 관통하 니, 묘용(妙用)이 있지 않음이 없다.”308)라고 하였다(황금중, 2000: 93). 그런데 본 체로서 지극히 허령(虛靈)한 그 마음이 사물에 응하면 칠정(七情)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여기서 그 드러나는 정(情)이 성(性)에 맞지 않아 치우치거나 막혀 버리 면 사욕(私欲)이 생기게 된다. 그러한 사욕의 기질을 바꾸는 것이 공부이고, 수양 이다.

규암은 1541년(중종 36)에 재변이 발생하자 중종에게 상소를 올려 군주의 수신 을 강조하였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은 궁궐 안에서 지기(志氣)가 청명(淸明)할 때, 정신을 맑게 하고 생각을 안정하여 자신을 돌이켜 고요히 살펴보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기점을 살펴서, (보편적인) 천리를 확충(擴充)하고 (편협하고 사사로운) 인욕을 막는 공력을 들이신다면, 의리가 확실해지고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확립되고 일욕(逸欲)이 경계될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일을 처리하고 다스리며 사람을 등용하고 백성을 다스 리면, 가진 것은 간단하고 요약된 것이지만 파급되는 효과는 광범위할 것이니, 위로는 천심(天心)이 돌아오지 않겠으며, 아래로는 인심이 감동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몸을 닦는 진실함은 자연 곡진하게 되고 가정을 바르게 하는 도는 자연 지극하게 될 것입니 다.309)

규암은 이 글에서 천리와 인욕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리란 사람이 부여받은 성(性)이다. 이는 도심(道心)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선한 본연지성을 의

307) 『朱文公文集』, 卷65, 「大禹謨解」. “心者人之知覺, 主于身而應事物者也.”

308) 『「朱子語類』, 卷5, 76條. “心之全體湛然虛明, 萬理具足, 無一毫私欲之間. 其流行該遍, 貫乎動靜, 而妙用又無不在焉.”

309) 『中宗實錄』, 卷96, 중종 36년 11월 28일 庚戌. “伏望殿下, 於宮門深邃之中, 志氣淸明之際, 澄 神定慮, 反己靜觀, 察天理人欲之分, 致擴充遏絶之功, 則義理於是乎判, 敬畏於是乎立, 逸欲於是乎 戒. 由是而制事出治, 由是而用人臨民, 所操者簡約, 而所及者廣博, 天心其有不回於上乎, 人心其有 不感於下乎? 修己之實, 自無不盡, 而正家之道, 自無不至矣.” 이 상소문의 하단에 사신은 “이 소 (疏)는 오겸(吳謙)이 지은 것인데, 내용은 모두 송인수(宋麟壽)의 뜻이다.”라고 기록 하고 있다.

미한다. 반면에 인욕은 인심(人心)으로서 선악(善惡)과 선불선(善不善)이 혼재된 기질지성을 말한다. 천리가 아닌 사사로운 개별적 인욕으로 치우치려 할 때 인간 은 공부와 수양을 통해서 천리를 확충하고 인욕을 막아야 하며, 이것이 성리학에 서 강조하는 ‘존천리거인욕’의 교육목적이다. 이 글을 통해 송인수는 심성론의 영 역에서 분명하게 도심과 인심을 구분하면서도 사사로운 인욕에 빠진 인심을 도 심으로 회복해야 하며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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