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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정신과 중의경리(重義輕利)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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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규암 송인수의 교육사상

3) 애민정신과 중의경리(重義輕利)의 실천

끊어진 학문 새로운 맹세로 이어지네 絶學屬新盟 고루한 몸 뜻 뜻만 크고 일은 거칠어 孤陋嗟狂簡 공연스레 거문고 당겨 줄을 튕겨본다네 空操點瑟鏗.369)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학교가 성대하게 흥하였고, 쇠퇴한 풍속이 다시 일 어났으며, 끊어졌던 학문이 새로운 도약을 맹세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규암의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풍속 교화와 『소학』의 장려는 도학자 로서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1586년(선조 19) 중 봉(重峯) 조헌(趙憲)은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김안국·송인수는 양남(兩南)에 관찰사로 나가 은택과 교화를 베풀어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덕택을 입고 있습니 다.”370)라고 하였는데, 김안국과 송인수가 사제관계였음을 고려할 때 사제동행(師 弟同行)의 전형이라 평가할 수 있다.

『대학』에 ‘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다.’했는데, 만일 덕을 두고 말한다면 재물 은 진실로 말단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재물은 없어서도 안 되고 또한 모여서도 안 되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생산하는 길을 논하는 대문(大文)에 ‘생산자가 많고 소 비자가 적으며, 바삐 생산하고 천천히 소비한다면 재물이 항시 족할 것이다.’ 한 것입니 다. 대개 나라에 노는 백성이 없으면 생산하는 사람이 많게 되는 법인데, 지금 농사를 힘쓰는 백성은 적고 말단만 추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민(四民) 중에 오 직 농민이 가장 고생하여 비록 한 해 동안 부지런히 노력하여도 모두 관가(官家)에 수 납(收納)해야 하므로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지만, 말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이 놀아도 이익이 남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몰리니, 이런 일을 성상께서 진념(軫 念) 하신다면 자연히 그런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372)

『대학』을 인용하여 재물의 필요충분조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비록 재물은 말단이기는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농민들이 농사를 통해 생산하는 것은 근본이나, 현재는 그 근본이 부족하여 말단만 추구하여 이록에 힘쓰는 자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이어 국가의 저축을 통해 적정량의 세금을 취렴하고, 항상 근본에 힘써서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373)

1528년(중종 23)에는 풍년이 들어 고을 수령이 연분(年分)을 한 단계 올리고, 관찰사가 또 한 단계 올리며, 여러 해 밀린 공적(公糴)을 거둬들이고 있음을 비 판하였다. 그러면서 송인수는 “백성을 돌보려고 생각지 않아서 거둬들이는 데에 법도가 없다면, 아마도 백성이 풍년의 경사는 보지 못하고 또 흉년보다 심한 것 이 있을 것입니다.”374)라고 하면서, 백성의 처지에서 조세 세도를 살펴야 함을 간 언하고 있다.

1529년(중종 24)에는 옹주의 집을 사치스럽게 건축하는 것에 대해 여러 대신의 의논이 있었다. 이에 정광필은 왕자녀(王子女)의 집을 사치스럽게 하면, 자손들이 잘 보존하지 못하여 무너진다는 논리를 들어 옹주 집의 건축을 간소하게 할 것

372) 『中宗實錄』, 卷56, 중종 21년 4월 11일 癸亥. “檢討官宋麟壽曰, 大學曰, ‘德者, 本; 財者, 末 也.’ 若以德而言, 則財固末也. 然財者不可無, 而亦不可聚也. 故論生財之道而曰: ‘生之者衆, 食之 者寡; 爲之者疾, 用之者舒, 則財恒足矣. ’蓋國無遊民, 則生之者衆, 而今則務農之民小, 而逐末者 多. 何者, 四民之中, 惟農最苦, 雖終歲勤勞, 而盡輸官家, 故未免飢餓. 逐末者, 游手無爲, 而其利 有餘, 故人皆趨之. 如此之事, 自上常加軫念, 則自無此弊矣.”

373) 『中宗實錄』, 卷56, 중종 21년 4월 11일 癸亥.

374) 『中宗實錄』, 卷64, 중종 23년 윤10월 30일 戊戌. “守令亦以爲豐稔, 而不思恤民, 徵斂無褻, 則 臣恐百姓未見豐年之慶, 而又有甚於凶年也.”

을 청하였다. 그런데 송인수는 다른 이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재목 하나 돌 하나도 운반해야 하니, 백성들의 고생이 어떻겠습니까? 대저 임금도 집을 높이 짓고 담장을 조각하면 마침내는 어지러워져 멸망하는 법입니다. 더구나 공 주와 옹주의 저택을 어찌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며 높고 사치스럽게 지을 수 있겠습 니까? 이 일이 비록 궁실(宮室)을 지나치게 치장하는 것과는 다릅니다만,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사치하는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은 일반입니다. 외부 의논이 어찌 우연만 하게 헤아리고 아뢴 것이겠습니까?375)

정광필과 송인수는 모두 궁중 사치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논리 와 어법은 두 사람을 비교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인다. 정광필이 『주역』 등, 경 전을 기반으로 도리(道理)와 예(禮)를 지켜야 왕실의 보존이 가능하다는 논거로 간언하였다면, 송인수는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걱정하면서 직접적으로 간언하고 있다.

송인수의 애민정신은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더욱 도드라진다. 관 찰사로서 지방의 고달픈 백성의 삶을 직접 경험하게 되고, 정치와 현실의 괴리로 인한 자괴감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들은 여러 시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진산동헌의 시에 차운하여[次珍山東軒韻]」라는 다 음의 시에 잘 드러나고 있다.

산과 물이 두르고 안은 외진 이곳에 山圍水抱地幽偏

관가가 들어선 것이 언제이던가 經始官居問幾年

척박한 땅 세금은 의당 가볍지마는 瘠土租庸宜薄矣

시골의 생계 걱정에 한숨지으니 孤邨生業可歎焉

남계(南溪)에서 물을 보며 근심을 녹이고 銷愁最愛南溪漲 안개에 쌓인 북악(北岳)을 바라보다가 拄笏還憐北岳煙 게으르게 늦잠도 잘 수 있으려 만은 無事定應開眼懶 밤이 짧도록 바쁜 까닭에 낮을 쪼개어 잠을 잔다오 忙緣夜短晝分眠376)

375) 『中宗實錄』, 卷65, 중종 24년 5월 20일 甲寅. “持平宋麟壽曰, 其一木一石之輸, 民之困弊爲何 如也. 夫人主峻宇, 雕墻, 終必至於亂亡. 況公主, 翁主第宅, 豈可勞民力, 務爲崇侈哉? 此事, 雖曰 與崇治宮室不同, 然其勞民力, 啓侈心則一也. 外議豈偶然計而啓之乎.”

376) 『圭菴集』, 卷1, 「次珍山東軒韻」.

척박한 땅에 세금이 과하지도 않으나 백성들은 생계 걱정에 한숨짓고 있다. 관 가가 들어서 있으나 백성들의 삶을 개선해 주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백성들의 한숨만큼 규암 자신도 근심하고 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밤낮없이 정사에 힘쓰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용담동헌의 시를 차운한 시[次龍潭東軒韻]에 서는 “박한 땅 백성들 먹을 것 없어, 관아는 가난하여 객 아니 반기지만, 예의로 가지런하길 가르쳐야지, 풍속이 어리석다 괴이타 생각하지 마오.”377)라고 하여 백 성들의 생계를 걱정하면서 또한 예(禮)로써 교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 다. 조정의 대신일 때나 관찰사일 때나 늘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는 송인수는 군 수로 나가는 김연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나, 백성의 굶주림을 슬퍼하나니, 그대 가서는 응당 굶게 하지 마시고, 나 백성의 헐 벗음을 슬퍼하나니, 그대 가서는 응당 따뜻하고 기름지게 할 것이니, 어찌 그대가 고을 백성의 부모가 되어, 아전과 백성들이 감히 속이겠는가?378)

송인수의 애민정신이 직접적이면서도 감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자신은 백성 들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싫어한다는 표현에서 그의 애민정신이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송인수의 이러한 인식은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유학의 가르침이다. 공자는 백성들이 많으면 무엇을 더 해야 하느냐는 염 유(冉有)의 물음에, “부유(富裕)하게 해 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염유가 부유해지면 또 무엇을 더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가르쳐야 한다.”라고 하였다.379)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송인수의 경세관(經世觀)은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 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물질적 안정을 바탕으로 교화를 통해 풍속의 변화를 일 으키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세관이자 배움에 대 한 실천으로써 교육사상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또한 송인수는 항상 의(義)와 이(利)의 분별을 염두하고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377) 『圭菴集』, 卷1, 「次龍潭東軒韻」. “土瘠民無食, 官貧客不歡. 只敎齊以禮, 休怪俗嚚頑.”

378) 『圭菴集』, 卷1, 「以中心藏之分韻, 送子由之郡」. “我哀民無食, 君歸應不飢, 我哀民無衣, 君歸 應煖肥, 豈弟爲父母, 吏民安敢欺.”

379) 『論語』, 「子路」.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 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송인수는 1531년(중종 26) 석강(夕講)에서 『맹자』 양혜왕(梁惠王) 장의 ‘이(利) 로써 서로 엿본다.’라는 설을 설명하면서, “이(利)는 국가를 해롭게 함이 큽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이욕(利慾)의 마음을 품으면 아랫사람이 본받으므로 반드시 기 강이 혼란되어 망하는데 이르게 됩니다.”380)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은 반드 시 인의(仁義)로써 다스림의 기본으로 삼아야 합니다.”381)라고 하였다.

다음의 시에서 위의 내용이 단순히 『맹자』를 읽고 해석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내면화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한 규암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사가독서 시절 에 주세붕에게 준 시 5수 중 2수이다.

화씨(和氏)의 구술이 보배가 아니고 不寶和氏璧

조거(照車)의 구술도 귀하지 않도다 不貴照車珠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苟非吾之有

맹세코 한 눈금도 취하지 않으리 誓不取一銖

외물에 흔들림이 없어야 外物不能淫

바로 대장부라 일컬어지는 것 方稱大丈夫

오로지 급암(汲黯)의 곧음을 본받을 것이지 端能效汲直 어찌 평진후(平津候)의 아첨함을 배울 것인가? 豈學平津謏382)

내 소유가 아니면 절대 취하지 않겠다는 표현은 공자가 말한 “부유함과 고귀함 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식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려서 는 안 된다.”383)라는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또한 외물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 는 맹자가 말한 “천하의 넓은 집에 거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대 도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귀가 그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그 절개를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무가 그 지조를 굽히게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대장부이다.”384)

380) 『中宗實錄』, 卷70, 중종 26년 2월 29일 甲申. “侍讀官宋麟壽, 因相覿以利之說曰, 利之害於人 國家也, 大矣. 爲人君而懷利欲之心, 則其下效之, 必至亂亡焉.”

381) 『中宗實錄』, 卷70, 중종 26년 2월 29일 甲申. “故王者, 必以仁義爲治也.”

382) 『圭菴集』, 卷1, 「東湖書堂, 寄景遊」.

383) 『論語』, 「里仁」.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384) 『孟子』, 「滕文公下」.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 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고 한 가르침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함께 갖추고 있는 존재이므로 생리적 차원에서는 물질 적 가치[利]가 요구되지만, 도덕적 차원에서는 정신적 가치[義]가 요구된다. 이 (利)는 그 본질 자체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질적 요소로써 필요한 것이지 만, 이것이 의(宜)에 맞지 않는 상황이 되거나 외물을 취하는 상황으로 나아가 사욕으로 기울어지게 되면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利)는 마땅함[宜]

을 갖출 때만이 그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오석원, 2005: 27-28).

이(利)와 의(義)의 가치 갈등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 다. 규암은 주세붕에게 준 「차경유야음운(次景遊夜吟韻)」이란 시에서 “언덕에 올라 공적과 이익을 구하지 말고, 때에 따라서 뛰어나게 처신하여 타고난 성정을 회복해야지[不登斷隴求功利, 聖處時中復性情].”385)라고 하였다. 공리(功利)를 시중 (時中)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규암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지금까지 논 의한 바와 같이 규암은 합당하지 않은 이로움을 취하지 않고, 의(義)를 취하는

‘중의경이(重義輕利)’386)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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