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재덕겸비(才德兼備)의 스승관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13-116)

III. 충암 김정의 교육사상

2) 재덕겸비(才德兼備)의 스승관

앞서 중종대 성균관의 위상과 퇴폐해진 사습에 대해 살펴보았다. 기준은 성균 관의 문제를 제대로 된 사장(師長)의 부재(不在) 때문이라고 보았다.

기준은 아뢰기를, “성균관의 일강(日講)·월강(月講)·제술(製述) 등의 일은 모두 과거

213) 『中宗實錄』, 卷29, 중종 12년 8월 12일 乙卯. “金淨曰, 學校, 首善之地, 而衣冠子弟所聚. 其人 趨向正然後, 外方傚之, 一歸於正矣. 不數三年之間, 出於朝廷, 爲國家之用, 則豈可以詞章爲擧業, 謀祿之資乎. 正其趨向, 在當今先務也, 自上正其趨向, 振起其心, 可也. 近日鄭夢周, 金宏弼從祀文 廟之議, 非特重斯人也, 如此則道學自明, 下之所趨, 一歸於正矣.”

214) 『中宗實錄』, 卷29, 중종 12년 8월 12일 乙卯. “金淨曰, 夢周之從祀, 斷然無疑, 而金宏弼, 道德 之功, 隱然於後學, 今時從祀, 亦可也.”

215) 『中宗實錄』, 卷29, 중종 12년 8월 6일 己酉. “金淨曰, 昨日延訪成三問, 朴彭年節義之事, 有或 言其今不可議爲者, 如此事, 當不以其人之言, 爲可信也.”

에 응시하기 위한 일이므로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는 등의 일이 무슨 일인지도 모를 뿐더러 하는 자가 없습니다. 방외(方外)의 뜻있는 자가 성균관에 유학(遊學)하고자 하 나 제생(諸生)에게 비웃음을 받고서 끝내 감히 유학하지 못하니, 사습(士習)이 한결같 이 여기에 이른 것은 그 허물이 사장(師長)에게 있습니다. 사장이 적격자였다면 이 지 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216)

충암은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조광조를 추천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참찬관 김정(金淨)이 아뢰기를, “경연의 직책과 대사성의 임무는 매우 중합니다. 혹 은 인재를 교육하고 혹은 군덕(君德)을 보양(輔養)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임자를 얻기 어렵습니다. 조광조(趙光祖)는 경연에 있을 때 보익(輔益)한 것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사림(士林)에서 모두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지금 승지가 되었습 니다. 승지도 반드시 경연에 출입하나 그 직책을 전임(專任)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성상께서 참으로 그 직책에 적합하다는 것을 아신다면 구태여 옮길 필요가 없을 것입 니다. 신은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 승지란 벼슬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진실로 다행한 일입니다만 일의 경중을 헤아려서 아뢰는 것입니다. … . 김정이 아뢰기 를, “대사성은 사림의 사표가 되는 직임이므로 정자·주자와 같은 인물을 얻은 뒤라야 적임자를 얻었다 할 수가 있는 것이니, 반드시 합당한 인재를 특별히 골라 써야 합니 다.“217)하였다.“

대사성이 사림의 사표이며 정자와 주자와 같은 이를 구하여야 적임자라고 한 점은 대사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조광조에 대한 추숭으로, 당시 사림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성균관의 개혁을 위해서는 적합한 인물이 대사성을 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2개월 후인 중종 13년 7월에는 성균관 동지사(同知事)의 임명을 놓고 조광조와 충암이 서로를 추천하는 논의가

216) 『中宗實錄』, 卷28, 중종 12년 7월 27일 辛丑. “遵曰, 成均館日講, 月講, 製述等事, 皆爲要擧科 第之事也. 若夫治心, 修己等事, 則不知爲何事, 而莫有爲之者. 方外有志者, 欲游於庠序, 而見非笑 於諸生, 終莫敢遊學. 士習一至於此, 是其咎, 在於師長. 師長得人, 則不至此矣.”

217) 『中宗實錄』, 卷33, 중종 13년 5월 5일 癸卯. “參贊官金淨曰, 經幄之責, 大司成之任至重, 或敎 育人才, 或輔養君德, 故得人爲難. 趙光祖其在經幄, 輔益弘多, 士林皆以爲合於其職. 今爲承旨, 亦 必出入經幄, 然不若專主其職. 上意眞知其合於其職, 則不必遷轉也. 臣與光祖, 志同之人也. 其得同 任, 固所多幸, 但計其輕重啓之耳. … 淨曰, 大司成, 爲人表率. 得如程, 朱, 然後可謂得人. 必須 別擇其人.”

이루어진다. 여기서 충암은 또다시 그의 스승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지금 유생의 의사는 모두 조광조를 스승으로 삼고자 합니다. 대저 학자(學者)를 교육 하는 데는 위력(威力)으로 해서는 안 되고 모름지기 선비의 마음에 흡족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광조가 동지사가 되면 학자들이 반드시 구름처럼 모일 것입니다. 신 등이 일찍 이 의계(議啓) 하려 하였는데, 대신이 이제 아뢰니 매우 마땅합니다.218)

조광조가 적합한 이유에 대해서 사림들이 모두 스승으로 삼고자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덕망이 있고 존경받는 인사가 동지사가 되어야 사습이 밝아지고 유생들이 구름처럼 그를 따를 것이라는 논리이다. 앞서 정몽주, 김굉필의 문묘종 사 주장과 마찬가지로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스승의 모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후 조광조는 성균관 동지사를 7번 사임했으나 윤허 받지 못했고219), 중종 13 년 7월 11일 겸동지성균관사를 제수받았다.220)

이어 중종 14년 1월 충암 역시 부제학 겸 동지성균관사에 제수되었다.221) 그때 김정은 사직(辭職)의 소를 올리고 2일 만에 동지사에서 체임(遞任)되었다.222)

충암은 「동지성균관사와 부제학을 사직하는 상소문[辭同知成均館事及副提學 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가에서 부제학을 설치하여, 홍문관을 거느리게 하고 경연의 직책을 맡게 한 것은 경서를 강독하고 생각을 논하여서 성상의 덕을 보양(輔養)하도록 한 것입니다. 동지성 균관사는 국학에 사표가 되고 인재를 기르는 것으로, 그 임무가 모두 가볍지 않고 무 겁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 대저 학교의 흥망과 풍속의 성쇠는 단지 가르침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 어떠하냐에 달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학을 업으로 하는 선비란 규제로 써 구속할 수 없으며, 위력으로써 내몰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람이 있어 두드리

218) 『中宗實錄』 卷34, 중종 13년 7월 11일 戊申. “淨曰, 柳雲於任事, 亦能辦幹, 甚合觀察使之任.

且成均館同知, 無可當人, 故猶未擬除. 今者儒生之意, 皆欲得光祖爲師. 夫敎育學者, 不可以威力, 須得其士心之洽然者, 然後可也. 光祖爲同知, 則學者必皆雲集. 臣等曾欲議啓, 而大臣今乃啓之, 甚 當.”

219) 『中宗實錄』, 卷34, 중종 13년 7월 11일 戊申.

220) 『中宗實錄』, 卷34, 중종 13년 7월 11일 戊申.

221) 『中宗實錄』, 卷35, 중종 14년 1월 22일 丁巳.

222) 『中宗實錄』, 卷35, 중종 14년 1월 29일 甲子.

면 얻음이 있고, 나아가면 바름이 있고, 의심스러우면 질문함이 있습니다. 덕성은 향기 로우며 예절은 본받을만하며, 넘쳐흘러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켜, 쳐다보고 감동하여 일 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재를 일으킬 수 있고 교화를 할 수 있으니, 이러 한 사람은 나이가 드신 분이나 덕이 많은 분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대저 명망이 가벼우면 엄숙하지 않고, 엄숙하지 않으면 스승의 도리가 높지 않습니다. 스승의 도리 가 높지 않으면, 그 순종함에 반드시 가볍게 행동할 것입니다.223)

충암은 경연관이 임금의 덕을 보양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며, 동지성균관사는 국학에 사표가 되고 인재를 기르는 역할로 모두 그 임무가 매우 무겁다고 말하 고 있다. 이어서 학교의 흥망과 풍속의 성쇠는 스승의 역할에 달려 있으며, 그러 한 스승은 덕행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드신 분이나 덕행 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스승의 도리를 높일 수가 없다고 하고 있다. 이어서 충암 은 “신은 나이가 아직 젊으며, (중략) 지금 현명한 준걸들이 숲처럼 서 있습니 다.”224)라고 하였다. 즉, 자신은 나이가 어리며 국학의 사표가 되기에는 덕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충암은 앞서 조광조를 추천하며 이르기를 “조광조는 나이 40이 다 되었으며, 젊어서부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향방을 일찍 알았습니다.”225)라고 한 바 있 다. 이렇게 볼 때 충암은 스승의 덕목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루면서 덕행을 갖추거나 혹은 나이가 연로하여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을 제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재덕겸비(才德兼備)의 스승관을 드러내고 있다.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13-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