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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과 CSCE의 성숙,그리고 OSCE로의 진화

냉전이 끝나자,CSCE회원국들의 지도자들은 유럽에서 장기간의 분열과 대치가 마침내 해소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CSCE의 전환과 제도화를 가로막는 잔혹한 분쟁이 유럽각지에서 발생하였다.1994년 12월 부다페스트 정상 회의(BudapestSummit)에서 CSCE에서 OSCE로 개명하고 회의(Conference)에서 완전히 독립된 국제기구(InternationalOrganization)로 전환하는 이정표를 만들었

다.1990년대를 통틀어서,CSCE/OSCE는 지속적으로 분쟁을 방지하고 해결하고 전후복구를 돕기 위한 현지작전과 수많은 제도를 구축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

가.경제협력회의와 제2차 정상회의(파리)

경제적인 차원에서 CSCE/OSCE의 발전에 기념비적인 행사가 1990년 3월 19일 부터 4월 11일까지 본(Bonn)에서 개최되었다.헬싱키최종안의 바스켓II의 조항들 에 따라서 참여국들이 시장경제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현하면서 대규모의 경제협 력의 장을 열었다.최종안에는 참여국들이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이라는 공통의 목 표를 공유하며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삶의 질을 개선시키며 고용을 증대하고 경 제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환경을 보호한다.”고 되어 있다.따라서 다음의 사 항들을 “달성하거나 유지하도록”합의하였다.

∙재정통화정책을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하도록 균형적으로 운용하고 시장 기능을 효율적으로 작동;

∙국제ㆍ국내 정책은 투자,자본,무역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증진하고 이익금 의 자유로운 송금;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서 결정되도록 자유경쟁시장경제를 운용;

∙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과 개발

∙지적재산권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사유재산의 소유와 사용 권리를 보호하고 인정;

∙사유재산이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될 경우 즉각적이며 공정하고 효율적인 보 상;

∙국제ㆍ국내 시장에서 개인과 국영 및 사기업간에 재화와 용역의 원활한 교환 을 위하여 공급자와 수비자간의 직접거래

환경과 경제문제에서 OSCE의 역할을 증진하기 위하여 경제포럼(Economic Forum)을 창설하였다.

냉전이 끝나고 CSCE국가정상들이 파리에서 제2차 정상회의를 개최하였다.유 럽대륙의 큰 변화가 기구로 변화시킬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파리회의에 참가한 국가들은 15년 전 헬싱키회의 때보다 하나가 줄어들었는데,정상회의 몇 주 전에 두

개의 독일이 하나로 통일되었기 때문이었다.헬무트 콜(HelmutKohl)독일총리는

“만일 CSCE의 생명력을 증명하려한다면 특히 독일국민과 독일이 역사적인 번영의 전환점을 건넜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40년 이상의 분단을 겪고 10월부터 우 리는 통일을 성취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또한 “전 유럽을 포함하는 평화로운 질서의 토대가 15년 전에 놓이지 않았다면,오늘날 우리가 이곳 파리에서 역사적인 대륙의 통합이나 독일의 통일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전향 적인 정책을 위한 포럼과 사고로서 CSCE는 시험의 시기를 견뎌냈다”고 헬무트 콜 (HelmutKohl)독일총리는 말하였다.

미국대통령 조지 부시(GeorgeBush)는 “유럽의 영광의 날”이라고 말하면서 “유 럽대륙은 미지의 항해를 시작하고 있으며 CSCE는 회원국들의 항해를 돕기에 적합 하다.”고 말하였다.

소련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Gorbachev)는 “1990년은 우리가 양대 세계대전과 두 사회체제 간에 거의 반세기에 걸쳐 벌여온 적대적인 핵의 시대를 뒤 로 보내는 결정적인 해이다.”라고 말하였다.정상회의의 최종문서는 “새로운 유럽 을 위한 파리헌장”이었다.그것에는 “유럽의 분열과 대치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 언하고 있다.“우리의 관계는 이후부터 존중과 협력으로 설립할 것을 선언한다.유 럽은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남녀의 용기와 사람들의 강한 의지와 헬싱키 최종안의 위력으로 유럽의 통합과 평화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 다.”고 선언하고 있다.또한 “우리는 수십 년간 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해온 기대와 희망 즉,인권과 자유에 토대를 둔 민주주의,경제적 자유와 사회정의를 통한 번영, 모든 국가들의 동등한 안보를 이룰 시간을 맞이했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최종안의 10개 원칙은 이런 야심찬 미래를 이끌었다.그것이 지난 15년간 더 나은 관계로 가도록 하였다.CSCE가 천명한 모든 것들을 실행하면서,오늘날 국가들이 자국의 포부대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CSCE는 단순한 정치 이교적 회의의 성격을 갖고 있어서 상설기구나 정기적 프로 그램은 없었으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와 같은 대외환경 의 변화로 기구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이에 따라 1990년 11월 ‘빠리헌 장’(CharterofParis)을 통하여 매 2년간의 후속 정상회담 개최,외무장관 이사회 신 설과 더불어 연례장관회의 개최,고위급위원회 신설 및 사무국,분쟁방지 센타 (CPC:ConflictPreventionCenter),자유선거 사무소,CSCE의회를 신설할 것을 합 의하고,유럽안보협력기구 (OSCE)의 창출에 중요한 전기를 만들었다.26)

CSCE는 안보분야협력을 위하여 단순히 한 국가차원의 안보뿐만이 아니라,나아 가 분쟁방지와 위기관리에도 역점을 두었는데 CSCE는 1992년 7월 헬싱키의 정상 회담에서 ‘헬싱키문서(HelsinkiDocument1992-TheChallengeofChange)'를 채 택해, 분쟁방지와 위기관리 기능강화, 평화유지군(PKO)창설, 안보협력포럼 (Forum forSecurityCooperation)설립에 합의했다.27)파리헌장의 중요 결정중의 하나는 참가국의 외무장관이 연례적으로 만나기로 한 것이었는데 최초의 회합은 1991년 베를린에서 시작하였다. 이 회합의 예비실무는 고위위원회(CSO:

CommitteeofSeniorOfficials)에서 다루었다.파리헌장에서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CSCE기관들이 설립되었다.

∙프라하사무국(SecretariatinPrague)은 CSO위원회와 여타의 고위회합의 지원 을 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바르샤바 자유선거사무소(OfficeforFreeElectionsinWarsaw)가 설치되었는 데 후에 민주제도인권사무소(OfficeforDemocraticInstitutionsandHuman Rights)로 전환되었다.

∙분쟁의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한 위원회를 지원하기 위한 비엔나분쟁방지센터 (ConflictPreventionCentreinVienna)가 설치되었다.

또한 유럽의 재래식무기 감축 협정에 파리회의에 참여한 22개국이 조인하였다.

CSCE가 OSCE로 전환하는 것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나.CSCE 의회 설립과 CSCE 외무장관위원회

1991년 4월 2-3일간 참가국의 의회지도자들이 마드리드에서 만나서 CSCE의회를 설립하는 것에 대하여 논의하였다.그러한 기구를 설립하는 것은 1990년11월의 파 리헌장에 따른 것으로 “CSCE프로세스에서 의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헌장에는 “모든 참가국의 의원들을 포함하는 CSCE의 회의 창설을 통하여 CSCE에 대규모의 의원들의 참여”를 주창하고 있다.마드리드 회의에서 투표권의 분배,위임사항,규모,방법,절차 등에 대한 기본규칙을 정하고

26)이승근,“유럽안보환경의 변화와 NATO의 확대,”『국제정치논총』,제38집 2호(1998),p.243.

27)신범식,“집단안보,공동안보,협력안보,”함택영‧박영준편,『안전보장의 국제정치학』(서 울:사회평론,2010),p.282.

의회의 설립에 대한 최종결의안을 발표하였다.최종결의안은 “전체연례회기를 5일 이상 개최하도록”구체화되어 있다.이 회의는 통상적으로 CSCE참가국의 수도나 여타의 도시에서 7월 첫째 주에 개최하기로 하였다.첫 번째 공식 의회는 1992년 7 월 3-5일까지 부다페스트에서 개최하였다.의회는 덴마크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국제사무국을 코펜하겐(Copenhagen)에 설치하기로 하였다.의회와 덴마크정부의 수뇌부들이 합의에 따라 국제사무국은 덴마크에서 UN이나 여타의 유사한 기구들 과 같은 수준의 면책과 특권을 갖는 완전한 국제 외교적 지위를 부여하였다.본래 245석으로 구성된 의회는 현재 모든 참여국의석이 317석으로 팽창되었다.

1990년 파리헌장에 따라 원래 설치되었던 CSCE외무장관위원회는 1991년 6월 19-20일까지 베를린에서 첫 번째 회의를 개최하고 장관위원회(MinisterialCouncil) 로 변경되었다.장관들은 파리에서 정상회의를 하기 전에 1990년 10월 1-2일 간 뉴 욕에서 회합을 가졌다.그러나 CSCE장관위원회로 만난 것은 이것이 최초이다.

베를린회의에서 “CSCE의 장래임무에 관련한 현재의 쟁점,유럽의구도와 안보강 화에 대하여 논의하고 또한 유럽에서의 사회적 변화와 경제전환의 전망,법치주의 와 민주주의 인권의 통합에 대하여”논의하였다.장관들은 또한 “민주주의국가에 서 시장경제로 전환되고 있는 지속적인 정치경제적 전환의 중요성을 재확인”하였 다.또한 “경제전환과 민주주의를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국가들을 지속적으로 지지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강조하였다.

베를린장관위원회는 유고슬라비아사태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성명서 에는 “민주적 발전과 유고슬라비아의 영토의 통합을 지지는데 경제개혁과 유고슬 라비아의 현위기의 평화적해결과 소수의 권리를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인권의 적 용”을 표현하였다.또한 “유고슬라비아 국민들만이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강 조하며 모든 관련당사자들 간에 대화를 지속하기를 요청하였다.“현존하는 제도적 분쟁은 해결되어야하고 현재의 난관은 무력의 사용없이 적대적이지 않게 합법적으 로 제도적 과정으로 해결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베를린회의에서 알바니아가 CSCE의 회원국이 되었다.

또한 베를린회의에서 알바니아가 CSCE의 회원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