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다자주의 안보레짐의 역사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1648년의 베스트팔 렌조약은 고전적인 세력균형체제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안보에 기여하 였다.19세기 유럽에서 평화가 유지된 배경에는 비엔나 시스템(ViennaSystem)이 라는 국제적 질서가 있었다.1792년 프랑스 혁명 직후 시작되어 1815년 종식된 나폴 레옹 전쟁은 비엔나 체제의 모태가 되었고 이 체제는 33년간 유지됐다.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에는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적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창설되었다.이런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는 유럽에서는 국제규범과 원 칙의 적용 가능성이 비교적 높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지역정체성을 고무시킨 것은 기능적이고 경제적인 부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CoalandSteelCommunity)는 1952년 석탄·철강의 생산 및 판매를 위해 창설한 공동관리 협력기구로 1950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이 제창한 프랑스·독일 석탄 철강 공동시장 설립 안에서 비롯되었다.기 능주의적인 첫 통합방식인 ECSC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숙적관계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화해하지 않고서는 재기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독일은 이후에도 2차 세계대전의 침략행위와 반인륜적 범죄행위 사죄와 피해 배상,나치 관련자의 단죄 등 과거사의 청산을 통하 여 주변국들의 불신과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이러한 노력과 아울러 재무장에 꼭 필요한 자원인 석탄 철강을 공동 관리하여 투명성을 확보함으로써 유 럽 국가들이 공동운명체라는 지역정체성과 공동의 규범을 발전시키려는 동기를 부 여하게 되었다.ECSC창설은 유럽의 다른 기구와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첫째, 회원국 정부들에 대하여 초정부적(SuperGovernmental)완전독립기구로 설치되 어 회원국 정부들에 대한 구속력이 있었다.둘째,ECSC가 계기가 되어 다른 분야의 협력의 토대가 되었다.셋째,독창적인 새로운 국제법 체계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초정부적 독립기구의 경험은 다자협력을 좀 더 원활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 었다.
헬싱키 최종의정서를 수용하여 참가국들이 공동으로 지켜야할 규범을 제정하면 서 다자안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헬싱키 최종의정서 바스켓I은 안보협력에 관한 것인데 ‘의제 및 관련지침’(AgendaandtheRelatedInstructions)에서 10개의 지도 지침으로 ① 주권평등 주권의 고유한 제반권리 존중 ② 무력위협 혹은 사용금지 ③ 국경불가침 ④ 국가의 영토 보존 존중 ⑤ 분쟁의 평화적 해결 ⑥ 내정불간섭 ⑦ 사 상 양심 종교 혹은 신념의 자유를 포함하여 인권과 기본적 자유존중 ⑧ 평등권과 자 결권 ⑨ 국가 간 협력 ⑩ 국제법에 규정된 의무들의 성실한 수행 등을 명시 하고 있 다.44)
1975년 8월 헬싱키 정상회의 개최 결과,35개국 정상 및 정부 수반이 참석한 가운 데 최종의정서(Final Act)가 채택됨으로써 출범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ConferenceonSecurityandCooperationinEurope)는 이러한 ECSC등의 초국가 적인 협력을 토대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4절 ‘헬싱키프로세스’의 형성과 발전의 함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유럽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대결 체제로 나누어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며 냉전을 이끌었다.냉전이 군사적 대결을 방 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억지이론(deterrencetheory)로 설명할 수 있다.윌스테터 (AlbertWohlstetter),셀링(ThomasSchelling)과 조지(AlexanderGeorge)등의 정 교한 이론화를 통하여 억지이론은 핵전쟁이 시작된다면 완전한 상호간의 절멸로 종결된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게 하였다.핵억지전략에 따라서 미국과 소련은 핵우 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한 핵군비경쟁에 돌입하였고 과다한 군비지출이 소련붕괴 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유럽에서 군비를 증가시켜도 안보는 증진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불안해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비용이 상승해졌으므로 다른 대안을 모색 하기 시작하였다.양 진영에서는 극심한 군비경쟁을 피하면서도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유럽에서 1973년 CSCE가 개최되었고 군사적 신뢰구축문제와 더불어 경제 사회 인도적 교류와 협력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 CSCE라는 안보레짐이 형성될 수 있던 추동력은 세력균형과 이익균형,
44)CSCE,ConferenceonSecurityandCo-operationinEuropeFinalAct(1975),pp.3-8.
국제규범의 통합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첫째,당시 동서 진영을 대표하는 두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유럽의 안정과 현상유지를 모색하기 위하여 다자 안보를 통한 세력균형을 추구하였다.냉전이라는 양극구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미 국과 소련은 정치적,군사적,경제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또한 양극의 축인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에 대한 도전세력이 서구와 동구 내에서 대두하게 되 었다.소련은 중국과의 갈등과 상호확증파괴의 위협을 주는 핵무기의 위협에 대한 부담이 있었고 미국은 소련의 재래식 무기의 우위와 프랑스의 NATO탈퇴와 더불 어 서구국가들의 CSCE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가는 상황에서 유럽에서의 영향력 유 지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이러한 국제환경의 변화는 미국과 소련이 모두 유럽에서의 현상유지와 안정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 게 되었다.그 결과로 유럽에서 다자안보레짐의 창설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되었 다.
둘째,강대국들과 유럽의 제 국가들이 이익균형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 이다.소련은 현 상태의 유럽의 국경선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동구국가들에게는 헬싱키최종안의 안보분야의 10개 지도원칙에서 나타나듯이 국가 간에 주권의 평등 과 존중으로 국가의 이익실현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또한 경제협력에 대한 관심 이 많았다.서구에서는 인권의제를 수용하게 하는데 큰 관심이 있었다.헬싱키 프로 세스에서 참가국들의 외무장관들은 자국의 입장에서 안보상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해소방안을 찾을 수 있었다.국경문제와 여타의 문제를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 과 경제,과학,기술,인도주의와 관련한 바스켓II,바스켓III는 협상을 통하여 참가 국들의 이익실현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특히 서독의 외교정책이 이러한 신뢰를 증 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서독은 지속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침 략행위와 반인륜적 범죄행위 사죄와 피해 배상,나치 관련자의 단죄 등 과거사의 청 산을 통하여 주변국들의 불신과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그와 더불어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국가 들의 자구의 노력과 공동의 발전을 위한 신뢰구축과 공 동의 번영과 안정을 추구하는 노력의 결과로 유럽안보협력회의가 형성되었고 지속 적인 발전을 하여서 1995년 유럽안보협력기구로 명실상부한 국제기구가 될 수 있 었다.
셋째,유럽 국가들이 공동운명체라는 지역정체성과 공동의 규범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로 유럽안보협의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석탄 철강공동체 의 창설은 유럽의 다른 기구와는 달리 회원국 정부들에 대하여 초정부적(Super
Governmental)완전독립기구로 설치되어 회원국 정부들에 대한 구속력이 있었다.
이는 주권의 제약을 감수하면서 지역적인 협력과 신뢰를 구축하며 다른 분야의 협 력의 토대가 되었다.
제 4장 동북아의 경험: 동북아 다자안보협의체 평가
제1절 역사적 배경: 국제환경 조건의 지속성과 변화
동아시아의 세력구도는 19세기 말 일본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크게 변화하였 다.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05년에는 러시아를 격파하여 동아 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하였다.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부상하자 이를 견제할 세력이 없었고 일본이 지역 내 유일 초강대국으로 등장하였다.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전쟁 에서 패배하게 되자,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이 동북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 사하게 되었다.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면서 소련 도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소련,일본,중국 등 세계 강대국들이 동북아 에서 각축을 벌였고 마침내 다소 안정적인 세력균형을 이루었다.그러나 북한의 도 발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동북아에서 미국중심의 반공동맹체제가 형성되었다.한 국전쟁을 계기로 미‧일 관계는 적대적 점령에서 동맹관계로,한‧미관계는 불확실 한 동반관계에서 ‘혈맹’관계로,한‧일 관계는 적대적 대치관계에서 원치 않는 반공 동맹관계로 변화되었다.1)그 분기점이 한반도의 휴전선이었는데 휴전선을 기점으 로 남쪽 중심의 동맹(한ㆍ미 동맹,미ㆍ일 동맹)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삼각동맹(북 ㆍ소 및 북ㆍ중 우호조약)이 형성되어 사실상의 미국과 소련의 동북아시아 전략대 치선이 형성되었다.이러한 세력균형의 방식은 미국 중심과 소련 중심의 양자동맹 에 기초한 것이었다.냉전기 동맹은 19세기 동맹과는 달리 세력균형의 논리와 정체 성의 논리에 함께 기반하고 있으며,냉전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동맹체제도 지속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소련,일본,중국 등 세계 강대국들이 동북아 에서 각축을 벌였고 마침내 다소 안정적인 세력균형을 이루었다.그러나 북한의 도 발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동북아에서 미국중심의 반공동맹체제가 형성되었다.한 국전쟁을 계기로 미‧일 관계는 적대적 점령에서 동맹관계로,한‧미관계는 불확실 한 동반관계에서 ‘혈맹’관계로,한‧일 관계는 적대적 대치관계에서 원치 않는 반공 동맹관계로 변화되었다.1)그 분기점이 한반도의 휴전선이었는데 휴전선을 기점으 로 남쪽 중심의 동맹(한ㆍ미 동맹,미ㆍ일 동맹)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삼각동맹(북 ㆍ소 및 북ㆍ중 우호조약)이 형성되어 사실상의 미국과 소련의 동북아시아 전략대 치선이 형성되었다.이러한 세력균형의 방식은 미국 중심과 소련 중심의 양자동맹 에 기초한 것이었다.냉전기 동맹은 19세기 동맹과는 달리 세력균형의 논리와 정체 성의 논리에 함께 기반하고 있으며,냉전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동맹체제도 지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