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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전후의 다자안보 제안과 성과

냉전 시기에 동북아 지역에서 다자안보 시도가 있었으나 대개 현실주의적 사고에 입각한 국가 간 세력 균형이나 이익균형에 부합하지 못하여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냉전시기의 동북아(또는 동아시아)다자안보협력 구상에 대한 많은 제안이 있었 는데 1954-1950년 사이에 장개석,이승만,퀴리노 필리핀대통령 등이 구상하였던

‘태평양 동맹구상’이 있었다.이 구상에서 이승만은 일본을 배제할 것을 주장하였 다.그 후에,19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걸쳐서 브레즈네프가 줄곧 주창해온 ‘아시 아 집단안전보장회의’(AsianCollectiveSecurityConference)12)가 있었다.이 주장 에 근거를 두고 1986년 7월 러시아 고르바초프가 ‘아시아판 헬싱키회의’를 거론하 다가 1989년 5월 ‘전아시아 프로세스’(AllAsianProcess)를 제안하였다.하지만 역 내 국가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서태평양 지역에 서의 해군력 동결과 한반도에서의 해ㆍ공군력 제한,한반도 비핵화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고르바초프의 평화 제안은 당시 이 지역에서 소련에 비해 우위에 있는 미 국의 세력약화를 초래하며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미국의 냉전 시기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은 소련을 이 지역에서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동아시 아의 역동적 경제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봉쇄정책이었는데,다자안보협력을 통 하여 소련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은 미국의 목표에 반하는 것이었 다.미국은 소련이 다자 포럼을 미국과 아시아 동맹국 사이를 떼어놓으려는 수단으 로 이용할 것을 우려하였다.

냉전기에 동북에서 다자안보 협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요인은 첫째로,미국과 소 련이 다자안보보다는 양자동맹으로 세력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한미동맹과 미 일동맹으로 형성된 안정된 세력균형 상태에서 미국은 현상유지를 원하였고 다자안 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즉,일본이 자국의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적 영향 력을 증대하는 데에 미국이 적극 지원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는 경제면의 역할 분 담을 일본에게 요구하고,아시아에서는 지역패권을 노리는 중국을 일본의 역할 증 대를 통해 견제하려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13)둘째,역내 국가들 중에서 12)이인호,“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의 전망과 대책,” 국제문제연구 (2004년 겨울),pp.63-64.

다자안보를 주도할 역량이 있는 국가가 없었다.유럽에서는 유럽내부의 역동성이 다자안보를 형성하게 하였으나 아시아에서는 공통의 이해가 부족하였으며 역내의 추동력이 없었다.셋째,근대국가 이후의 역내 국가들의 갈등이 해소되지 못하였고 영토분쟁으로 민족주의적 갈등이 상존하였으므로 국가 간 신뢰구축의 경험이 적었 다.넷째,동북아에서는 핵전쟁의 위협이 유럽보다는 비교적 적었으며 군비경쟁도 비교적 약하여서 다자안보협력의 필요성이 유럽보다 적었다.

<표 4-1>냉전 시기의 다자안보 제안

제안시기 명칭 제안자

1954-1950 태평양 동맹구상 장개석-이승만-퀴리노 1960대말-‘70년대 아시아지역 집단안전조약 브레즈네프

1989년 전아시아 프로세스 고르바초프

냉전시기에는 현실주의적인 시각의 국제관계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설명하 는 데에 적실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각국은 자국의 절대적 이익과 더불어 다 른 국가들이 얻는 이익의 크기에 고민하였기 때문에 공통이익의 형성 가능성이 낮 았다.공통이익은 상호 협력을 통해서 접근 가능하고,이를 통해 국가들 간에는 보 다 조화로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인데 동북아의 국제관계는 이러한 여지가 거 의 없었다.

나.냉전 이후의 다자안보 구상

냉전 이후 동북아에서의 다자안보협의체에 대한 논의가 두드러지게 부상하였는 데 이는 동북아에는 전통적 안보위협과 비전통적 안보위협이 모두 증대하고 있다 고 평가할 수 있다.북한의 핵보유시도와 군비경쟁이라는 전통적 안보위협과 함께 비전통적인 안보위협요인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미‧중 및 일‧중 간의 패권경쟁,남 북한 간의 갈등과 대결,중․대만 간의 긴장 등으로 인해 안보 불확실성이 지속되거 나 증대하고 있었다.특히,미군 감축 가능성의 증대,중국의 부상,일본의 보통국가 화 움직임,북한의 핵개발,무인도 영유권 다툼,중․일의 역사왜곡 등은 이러한 불

13)강근형, 미일관계의 정치경제 (제주:제주대학교 출판부,2003),p.330.

확실성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14)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통적 안보 의 불확실성에 더하여 탈냉전 이후 새롭게 부각된 비전통 안보 차원의 위협도 강조 되고 있다.동아시아 국가들 역시 테러리즘,마약거래,전염병,환경오염,난민,불법 이민,국제범죄 증가 등의 초국가적 난제들에 직면해 있으며,이러한 비전통적인 안 보 차원의 문제들은 국제적 협력 없이는 좀처럼 해결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15)

탈냉전 이후 동북아는 전통적․비전통적 안보 불안정과 안보위협이 혼재된 상황 에 처해 있으므로,이러한 안보 불안정과 안보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대안 이 적극 모색되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특히,비전통적 안보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과 전통적 안보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안보 체제의 모색이 절실하다는 점이 역내 국가들이 공감하기 시작했다.나아가 동북아 의 경제 발전을 지속시키고 역내 경제통합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도 동아시아의 안 보공동체 창설이 긴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16)

결국 이러한 다양화된 안보위협은 어떤 한 국가의 독자적인 역량만으로는 대처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국가 간 협력 또는 정책상의 조정과 더 나아가 동 북아 지역 차원의 협력안보의 필요성이 점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다양 한 다자안보 구상이 제안되었다.

1992년 미야자와 일본수상이 동북아 다자안보대화를 구체화하는 것을 제안하며

‘아․태 안보기구’설립을 주장하였다.러시아의 옐친대통령이 1992년 방한하여 국 회연설에서 ‘아․태지역 분쟁방지센터’와 ‘아․태전략문제연구센터’설립을 제안 하였다.한국에서는 1988년 10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이 유엔 총회 연설에서 동북아 지역의 다자간 안보협의체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남북한과 미·일·중·소가 참여하 는 동북아 6개국 평화협의회 의 창설을 제안하였다.17)제43차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미국,소련,중국,일본,한국,북한 등 6개 국가 간에 다자안보협력 을 위한 ‘동북아평화협의회’(ConsultativeConferenceforPeaceinNortheastAsia) 창설을 제안하였다.이 제안의 후속조치로 한국정부는 1988년 11월에 외무부 장관

14)김유은,“동북아 안보공동체를 위한 시론:구성주의적 시각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제 44집 4호 (2004),p.70.

15)조윤영,“동아시아 안보와 제도주의:안보공동체 형성의 조건과 발전과정,” 한국정치외교사 논총 ,제27집 2호 (2005),pp.317-318.

16)최영종, 동아시아 지역통합과 한국의 선택 (서울:아연출판부,2003). 17)김계동,"한반도 평화체제 구상", 국방정책연구 (2003년 가을),p.249.

을 위원장으로 하는 ‘동북아평화협의회의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다.노태우 대통 령은 1992년 9월 22일 유엔 총회 참석시 ‘평화와 번영의 21세기를 위하여’라는 제목 의 연설에서 동북아에서의 상호이해 및 신뢰증진을 위해 당사자들 간에 대화와 협 력의 장이 필요함을 재차 역설하였다.18)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5월 제26차 태평 양 연안 경제협의회(PBEC)개막식 기조연설에서 한국정부의 외교 정책방향으로 항구적 지역평화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을 축으로 하는 양자 안보협의체제를 심화·발전시키는 동시에 다자안보대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19)1993년 5월 24일 제2차 태평양 경제협의회(PBEC)개회식 연설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ARF 와 별도로 소위 유럽의 안보협력회의 축소판과 같은 동북아지역의 안보협의체제 구축인 ‘mini-CSCE’를 제안하였다.1993년 7월 한승주외무장관과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이 ‘2+4’형태의 ‘6자회담’으로 한반도문제의 해법을 찾는 구상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1994년 5월 제1차 ARF고위관리회의(SOM)에서 김영삼대통령이 ‘동북아안보대화’(North-EastAsiaSecurityDialogue,NEASED) 를 제안하였다.NEASED를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중·대만 간 긴장관계,동 북아의 군비경쟁 등의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하려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미 국은 동북아의 양자동맹에 우선순위를 두고 다자안보대화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입 장이었으며 중국도 한국이 주도하는 동북아 다자대화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20)

미국은 동북아 안보문제에 대한 다자적 접근이 자국의 영향력 감소로 이어질 것 으로 우려하였으며 이것이 두 개의 조선을 고착화시키려는 책동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한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여 중국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소련 역시 고르바 초프의 블라디보스토크 및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을 통해 동북아 다자안보 포럼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지만,북한 요인을 감안하여 이를 지지하기 어려운 처지였다.21) 동북아에서는 냉전시기에 강대국들이 양자동맹에 기반을 두고 세력균형을 이루

미국은 동북아 안보문제에 대한 다자적 접근이 자국의 영향력 감소로 이어질 것 으로 우려하였으며 이것이 두 개의 조선을 고착화시키려는 책동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한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여 중국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소련 역시 고르바 초프의 블라디보스토크 및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을 통해 동북아 다자안보 포럼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지만,북한 요인을 감안하여 이를 지지하기 어려운 처지였다.21) 동북아에서는 냉전시기에 강대국들이 양자동맹에 기반을 두고 세력균형을 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