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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의 수용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배제 개념의 변화

제 3 절 사회적 배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

2. 유럽연합의 수용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배제 개념의 변화

1997년 집권한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기존의 빈곤 관련 부처들을 개편하여 사회적 배제 기획단(Social Exclusion Unit)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사회적 연대의식과는 거리가 있는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으로 대표되는 영국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다소 상징적인 사건이다. 앞서 실버 (Silver 1994)가 지적한 대로 유럽연합의 회원국들은 서로 다른 사회체제를 지 니고 있고 각 체제는 개인의 권리와 국가의 임무에 대해 상이한 철학적 인식에 근거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배제의 철폐를 위한 노력이 회원국 공 통의 의제로 채택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유럽 각 나라들이 직면해 있던 상황의 공통점이다. 이들 나라들은 모 두 실업률의 증가, 실업의 장기화, 이민의 증가, 복지국가의 재편 등 동일한 현 실적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전 지구적 경쟁과 지식정보화라는 새로운 기술 발전 경향으로 인해 고용없는 성장의 조짐이 나타나면서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장기적 실업자군이 나타났고, 청년실업 문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실업보 험 등 기존의 사회보험제도로 해결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또한 재정위기와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른 복지국가의 재편 움직임으로 기존의 보 편주의적 복지정책은 변화의 압력에 놓여있었다.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점증하던 이민문제는 다문화 사회에서 시민적 권리와 법적 권리, 국적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배제란 용어가 지닌 모호함은 이렇게 다양한 요구를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현실적 장점이 있었다.

이와 같은 객관적 환경 변화는 국내적으로도 각 정치집단의 다양한 요구로 연결되었다. 사회적 배제는 좌파는 물론 우파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회적 배제가 공통의 정책이념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두 번 째 이유였다. 사회적 배제는 박탈이나 권리의 부재에 대한 투쟁과 평등을 추구 하는 좌파적 가치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었고, 국가체계 아래서 통합된 사회를 건설하려는 우파적 가치와도 조화를 이루었다.

세 번째로, 유럽통합의 실질적 내용은 경제적 통합이었고, 사회적 통합은 경 제적 통합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사회통합은 경제통합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존에 사회적 배제를 상이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던 각 나라들에 게 공통의 정책목표로서 사회적 배제 개념이 제시, 수용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나라들이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배 제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의는 사회적 배제에 대한 각 나라들의 인식 가운데에서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공통된 분모만 을 포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공통분모는 빈곤과 실업이다.

이와 같이 유럽연합에 의해 사회적 배제 개념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그 의미 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프랑스에서 애초에 사용된 사회적 배제의 의미와 유 럽연합에 수용된 이후의 사회적 배제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사회(보험)제도 의 외곽에 놓여 있는 주변화된 집단들(약물중독자, 범죄자, 노숙자, 복지의존자) 을 지칭하던 사회적 배제가 실제로는 빈곤과 장기실업자들을 주로 지칭하는 개 념으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빈곤과 실업이 각 나라의 사회문제의 공 통분모이자 가장 심각한 문제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개념의 정책적 적용이 공간적으로 확대되면서 동시에 개념의 외연 이 축소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기존의 전통적 문제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사회적 문제, 기존의 제도적 틀로는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사회 적 책임을 강조하는 데에서 출발했던 사회적 배제 개념이 빈곤과 실업이라는 전통적 문제로 다시 회귀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앞의 1절에서 사회적 배제의 다양한 정의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이 때 제시된 정의 가운데에는 ‘정상적 시민으로서의 참여’ 또는 ‘시민으로서 당연 히 누려야 할 권리’를 강조하는 정의방식과 ‘빈곤, 주거, 교육, 건강’ 등을 열거 하면서 빈곤을 중심으로 사회적 배제를 정의하려는 정의방식이 존재했다. 전자 의 정의방식이 프랑스적 문제의식을 일반화한 정의방식이라면, 후자의 정의방 식이 유럽연합의 수용과정에서 나타나는 경향을 보여주는 정의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배제의 지표화와 그 정책적 함의의 도출을 목적으로 하는 본 연구에 서는 후자의 정의방식에 따라 사회적 배제를 “한 개인이 그가 속한 사회의 정 상적인 경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권리를 제약당하고 있는 상 태”로 이해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 사회적 배제 개념의 의미를 이와 같이 경 제적 의미로 한정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론적 타당성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실적 고려에 의한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지표화에 따른 제약으로, 현실적으로 가용한 대부분의 지표들이 경제적 변수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경제적 영역에서의 배제를 측정할 지표들을 이론적으로는 제시할 수 있으나 그 지표를 산출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과 정책적 적용 가능성은 제한될 수밖 에 없을 것이다. 둘째는 국가간 비교가능성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둘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지나치게 확장된 개념으로 인해 논의의 초점이 정책적 적용가능성을 둘러싼 현실적 쟁점보다 개념의 이해를 둘러싼 추상적 논의로 옮 겨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