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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절 기존의 빈곤 관련 개념과의 관계

1. 타 개념과의 구분

위에서 사회적 배제는 빈곤개념과는 달리 경제적 영역의 물질적 결핍 이외에 도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의 참여기회 박탈을 포함하는 개념임이 설명되었다.

그런데 기존의 빈곤연구에서도 빈곤을 규정하는 ‘자원’의 범위를 확장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타운젠트는 빈곤과 구분하여 상대적 박 탈을 ‘개인, 집단이 향유하는 자원이 사회적 평균에 현저히 못 미치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하면서 이럴 경우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의 패턴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자원의 범위를 생계에 필요한 소비재에 국한시키지 않고 폭 넓게 정의하면 사회적 배제가 상대적 박탈 개념과 크게 다 르지 않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유럽의 전통적 좌파 가운데에는 이런 점에서 사 회적 배제가 상대적 박탈 개념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Kennedy 2005).

센(Sen 2000) 역시 빈곤에서 기능박탈로 초점을 옮기면 빈곤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빈곤 개념에는 소득의 부족이란 의미도 있었 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궁핍한 삶(poor living), 즉, 기능의 박탈(capability deprivation)로 보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도 존재해 왔다. 후자의 전통에 따 를 경우 박탈의 의미 속에는 ‘대중 앞에 떳떳이 나설 수 (being able to appear in public without shame) 없는 상황’이란 의미도 포함(A. Smith)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경우 빈곤 개념 속에 이미 사회적 배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센은 빈곤 개념이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다고 보며, 따라서 사회 적 배제 개념이 추가적으로 주는 정보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다만 사회

적 배제가 지닌 관계적 특성이 ‘빈곤=가치 있는 일을 할 자유의 결여’라는 시 각의 접근방법을 풍부히 해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회적 배제는 새로운 현 상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새로운 접근방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버그만(Berghman 1995)은 빈곤과 관련된 개념들을 한편으로는 그것이 정태적 결과를 지칭하는가 동태적 과정을 지칭하는가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소득 부족이라는 단일한 차원을 기준으로 삼는가 아니면 경제적 변수 이외의 다양한 차원을 기준으로 삼는가에 따라 아래 표와 같은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표 3-1〉 사회적 배제와 관련 개념의 구분

정태적 결과 동태적 과정

소득 빈곤(poverty) 빈곤화(impoverishment)

다차원적 요인 박탈(deprivation)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사회적 배제 개념의 특징을 정확히 드러내지는 못한 다. 이 표에서 빈곤과 빈곤화의 개념적 구분이 사전적 의미에서는 가능할지 모 르지만, 실제로 정태적 결과와 동태적 과정을 구분하게 하는 것은 연구의 방법 이지 개념 그 자체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박탈과 사회적 배제를 이와 같이 구 분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사회적 배제가 동태적 과정에 주목하는 것은 사실 이지만, 정태적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박탈과 사회 적 배제를 굳이 구분하자면 그 기준은 다차원성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사회 적 배제 개념에는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기회의 박 탈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 배제를 빈곤과 구분하는 다른 하나의 방법은 ‘빈곤층은 아니지만 사 회적 배제를 경험하는 집단’의 존재를 염두에 두면 된다. 성이나 인종적 편견, 종교적 차별 등에 의해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사회의 대다수로부터 이질적 집단 으로 취급받고, 비공식적 활동에서 부당하게 대우받는 집단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선은 사회의 역동적 변화과정 속에서 매우 변화무쌍하다.

우리 사회의 예를 들자면 이주노동자나 탈북자들은 불과 십 여 년 전만 하더라 도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사회에 융화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집단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꼭 빈곤층이 아니더라도 다른 집단이 경험하지 못하는 사회적 문제를 심각하게 경험하고 있 으며, 이 문제들을 사회가 적절히 다루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작용 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회적 배제는 바로 이러한 집단의 문제를 인식하기 에 적절한 개념이다.

2. 새로운 현상인가 인식틀인가

사회적 배제 개념의 의의를 강조하는 많은 연구(신명호 외 2004, 남기철 외 2005)들은 기존의 빈곤연구가 경제결정론적이었다고 비판한다. 또한 사회적 배제 가 불평등과 차별이 사회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 일련의 과정(원인과 결과의 상호 규정성)임을 강조한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사회적 배제란 새로운 인식틀이 된다.

한편 ‘사회, 경제, 정치활동 및 그 참여과정에서 사회의 희소한 자원에 접근할 수 없거나 그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사회적 배제라고 규정 되기도 한다. 이 경우, 사회적배제는 새로운 (다차원적) 현상으로 규정된다. 따라 서 빈곤개념 = 경제결정론적 개념 이라는 등식은 설득력을 오히려 잃게 된다.

즉, 새로운 현상으로서의 사회적 배제를 강조하는 것과 새로운 인식틀로서의 사 회적 배제를 강조하는 것 사이에는 상충관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사회적 배제를 새로운 현상으로 규정할 경우, 적절한 문제설정은 예컨대 ‘사 회적 배제가 왜 (지금) 문제인가’ ‘언제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는가’ 등일 것 이고, 이는 다시 말해 빈곤의 유형, 성격 등이 최근에 이르러 변화했는가라는 질문으로 포괄될 수 있다. 사회적 배제를 인식틀로 규정할 경우, 적절한 문제설 정은 “사회적 배제라는 틀을 통해 바라볼 경우 기존의 빈곤정책은 무엇이 문제 이고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이한 문제설정 방식은 두 측면에서 서로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 다. 먼저, 빈곤의 새로운 양상이 새로운 접근방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경

제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일자리의 수와 종류도 늘어나고 소득획득 기 회도 늘어나던 시기에는 계층 이동의 가능성도 열려 있었고 빈곤의 대물림도 심하지 않았다. 이 경우 빈곤에 대한 동태적 이해는 크게 강조되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고도성장기가 지나고 계층상승의 가능성이 줄어들며 소득의 양극화 가 심해지는 시기에는 빈곤에 대한 동태적 분석이 더욱 강조된다. 또한 정보화 가 진전되면서 가치 있는 정보에 대한 접근기회의 제공과 사회적 관계망이 강 조됨에 따라 빈곤을 설명하는 새로운 요인들이 대두되게 된다. 빈곤층이 경험 하는 배제가 다차원화되면서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조건도 여러 각도에 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현상의 대두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배제가 빈곤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다른 사회적 현상, 사회적 집단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이는 앞서 사회적 배제가 유 럽연합에서 수용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의 변화를 거쳤는지를 설명하면서 언 급한 바 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이주노동자와 탈북자뿐만 아니라 신용불량 자, 귀화 외국인 등의 문제는 최근의 사회변화에 따라 새롭게 생겨난 현상이다.

사회경제적 구조가 복잡해지고 변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새로운 문제들이 생 겨나고 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강조될 때, 사회적 배제는 유용한 개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