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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집단의 본질

문서에서 기업결합규제의 진화 (페이지 51-58)

(1) 기업집단의 생성요인과 경제적 성과

기업집단정책을 합리적으로 전개하려면 우선 기업집단이 생성되 고 성장하여 온 원인을 규명하여야 할 것이다.62) 기업집단을 형성 시킨 가장 중요한 실물적 요인은 기술적 의존성이다. 기업집단에 의한 해외기술의 도입과 성공적 상업화는 한국이 선진국과의 격차 를 좁히는 첩경이 되었다. 이들은 필요한 기술을 스스로 개발할 필요없이 선진국으로부터 비교적 쉽게 도입할 수 있는 ‘낙후의 경 제성economies of backwardness’을 성공적으로 이용하여 산업발전과 수출증진의 면에서 큰 성과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경제개발초기에 도입된 선진기술은 대규모시장을 상대로 한 대량생산기술로서 규 모의 경제를 체현하므로 이것을 이용한 기업들은 단시일 내에 협 소하고 보호된 국내시장을 독점화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독점적 기업들에는 자금‧인력‧노하우 등 여러 면의 잉여능력이 축적되는 한편 일차적으로 진출한 대중소비재시장이 소진되면서 점차 규모 가 작은 시장으로 다변화하게 된다.

재벌의 성장동인은 기업가정신 내지 기업인능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개발도상경제의 기업가는 통상적인 경영관리능력 외에도 불 충분하고 미성숙한 시장에서 기업활동에 필요한 투입물을 완비하 고 시장결함을 보충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능력은 희소자원 으로서 시장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반면 반복 하여 사용하여도 마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62) 이 문제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와 참고문헌은 이규억‧이성순(1990) 및 황 인학(1999) 참조. 아래에서는 긴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참고문헌을 따로 밝히 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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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유능한’ 기업가에 다수의 기업이 집중하게 되어 기업집단 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러한 시장외적인 기업인능력의 실체는 시 대와 사회의 여건에 의하여 규정된다.63) 예컨대 은행여신과 사업 허가가 불투명한 정치적 영향과 행정적 재량에 의하여 결정되는 상황 속에서 기업을 일으키고 경영하려면 기업인은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나마 정치인이나 관료와 이익공동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으 므로 기업인능력에는 ‘비윤리적’ 내지 ‘경제외적’ 요소가 개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즉 일정 시점에서 요구되는 기업인능력은 그 시대와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로 인한 경제력집중이 ‘천민자본 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가질수록 기업인은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에서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근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기업집단의 한 특징인 소유집중은 경제개발초기의 열악한 자본 시장의 바탕 위에서 고속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차입과 기업간 상 호출자에 의한 자본조달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사실에 기 인한 필연적 결과이다. 기업집단 내의 동일인의 지분은 자본시장 의 확충과 개방으로 지속적으로 완화되어 왔으나, 아직도 일반적 으로 경영권이 쉽게 교체될 만한 수준까지 저하하지는 않고 있다.

기업집단의 확장을 유도한 또 다른 요인은 대기업중심의 공업화 를 단기간에 추진한 고도성장정책이다. 소수의 기간산업을 중심으 로 불균형성장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기업능력이 필요한 데 정부는 이를 기업집단에서 구하였다. 따라서 공업화를 촉진하 기 위한 각종의 정책적 지원과 유인이 기업집단에 집중하면서 ‘정 경유착’과 기업간 격차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와 관련하여 유의할 것은 지원‧육성대상산업의 선정시에 정치적

63) Baumol(1990)은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 시대상황에 따라 생산적일 수도 있고 비생산적 또는 파괴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개입이 작용하지 않았더라도 대기업중심의 고속불균형성장정책하 에서는 기업집단의 정체는 다를지언정 여전히 기업집단에 편중된 경제구조는 초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기업집단이 갖는 한 가지 긍정적인 경제적 효과는 계열기업간에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희소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 다는 것이다. 기업집단은 새로운 시장기회를 민감하게 인지하고 이에 대응하여 내부의 잉여능력을 신축적으로 전용함으로써 추가 적 자원의 부담을 적게 하면서 자본형성을 증대한다. 또한 여러 시장에 걸친 활동을 통하여 정보의 흐름을 촉진하여 불확실성을 축소하는 한편 다변화에 따라 위험이 분산되므로 결국은 경제전반 의 자본수익률도 안정적으로 유지시켜 경제성장을 가속시킬 수 있 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근본적으로 다수의 기업이 동일한 의사 결정체제하에서 활동함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소유집중을 반드시 필요조건으로 하지 않는 다제품기업이 갖는 일반적인 범위의 경제

economies of scope에 해당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집단이 해체된다면 일단 이 효과는 소멸되지만, 기업간에는 여전히 부분 적 합병‧합작회사‧전략적 제휴 등 다양한 형태로 공동효과를 추구 할 것이다.

한편 기업집단이 시장의 내부화를 통하여 얻는 효율성의 향상과 총체적 교섭력을 통한 비용절감은 사적 비용의 저하에 그치고 이 것이 사회적 이득으로 연결되지 않음으로써 기업부문의 이중구조 를 심화하는 부정적 효과를 초래한다. 차입경영에 의한 다변화는 계열기업의 연쇄도산의 위험을 증대시키고 은행의 부실화를 유발 함으로써 국민경제 전체의 부담이 크게 늘어난다. 또한 기업집단 특유의 경쟁제한 및 불공정거래행위는 경제적 기회의 불균등을 심 화하고 시장질서를 교란한다. 그리고 ‘재벌총수’에 의한 가부장적 경영환경과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하에서 합리적 의사결정이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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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기 어렵고 자원이용의 공동효과가 저해된다.

(2) 기업집단정책의 기조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기업집단은 우리나라의 경제적 조건과 정책적 선택에 의하여 생성되고 성장하여 왔다. 기업집단이 제조 업부문의 출하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위 30대 기업집단기준으 로 1980년대의 35% 수준에서 최근에는 40% 수준으로 높아져 왔 다. 이러한 통계는 기업집단이 한국경제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갖 고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반면 한국경제가 갖고 있는 모순과 약점의 상당한 몫도 이들에게 귀착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다시 말하여 기업집단은 한국경제의 성공과 실패를 농 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기업집단이 문제가 되는 근본이유는 소수의 사적 경제주체가 국 가의 경제적 자원과 활동의 주요 부분을 자신의 의사에 따라 실질 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경제력을 집중적으로 보유‧행사함에 따라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쟁적 시장경제의 작동을 저해할 수 있기 때 문이다. 기업집단이 우리나라의 경제는 물론 정치와 사회의 특질 을 집약하는 존재인 한, ‘재벌문제’를 기업집단에만 국한하여 보는 부분적 접근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게 될 것이다. 즉 기업집 단의 본질은 한국의 정치‧사회‧경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업집단의 문제는 한국경제의 모순과 불합리성, 자유시장원리 에 배치되는 정치‧행정의 경제적 간섭과 조작, 규제하의 이권추구 활동에 따른 정경유착, 자유시장경제제도의 미비와 시장마인드의 부족, 효율성과 형평성간의 관계에 대한 가치관적 혼란, 기업윤리 의 실종 등을 집약하여 나타내고 있다. 그 이면에는 이윤추구를

우선하는 기업에 대한 사회적 불신, 개인주의와 경쟁적 시장기구 의 생리보다는 공동체적 규율과 결과의 균등성을 강조하는 사회이 념, 한국경제의 대표적 존재로서의 기업집단에 대한 과도한 기대 와 배신감의 착종, 정치‧사회적 불만을 부분적으로 해소하는 대속 자로서의 재벌의 인식 등이 개재되어 있다. 기업집단은 경제의 영 역을 벗어난 정치‧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변환되어 있으며 기업집 단에 관한 평가와 정책에는 주관적 판단과 객관적 사실이 혼재되 어 있고 이것이 ‘재벌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향설정을 어렵게 하여 왔다. Chandler, Jr.(1997)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의 기업집단은 “경 제적으로 긴요하고, 공공연하게 가시적이며 정치적으로 물의를 일 으키는economically vital, publicly visible, and politically controversial” 존재 이다.

시장경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하여는 이기주의적 경쟁심‧

최소한의 경제윤리‧적정한 수준의 제도적 장치가 조화되어야 하며 정치는 ‘작은 정부’에 입각한 ‘현명한’ 민주주의 정치체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64) 물론 이들의 상대적 중요성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조화를 추구하여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부족하였다. 종래 ‘재벌정책’에 일관성이 없고 고식적이었던 원인의 일부는 경제적 유인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윤 리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던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재벌문 제’를 야기한 한국의 정치‧행정‧경제‧사회의 상호 연관된 원인들 을 종합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단편적이고 임시적으로 대응하려고 한 것은 문제를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킨 결과를 초래하였 다. 또한 수시로 정치적 고려하에서 재벌문제를 교조주의적dog- matic이고 대중주의적populist으로 접근하여 온 결과 기업집단에 관

64) 이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졸문(19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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