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1394년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로 대한민국 정부중앙청사 소재지가 되 기까지 600년 이상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이자 사람들이 동경하는 지역이었다.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보면 서울은 한국의 정체, 경제, 문화 등 많은 면에서 중심지라고 할 수 있지만, 이와 달리 북경은 경제보 다 정치, 문화면에서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눈에 띄는 ‘수선지지(首善之地)’
로 평가할 수 있다.
앞에 살펴본 것처럼 한국 고전시가에 투영된 서울의 장소이미지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사람들이 서울에 대해 동경심과 소외감이라는 이중적인 정서를 느 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심리 양상은 더욱 입체적으로 서울이 한국 의 실제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중심지의 이미지를 가
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서울의 중심지라는 이미지는 시적자아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소 다르 다고 본다. 앞에서 살펴본 강복중의 시가를 통해 서울은 인재를 알아줄 수 있는 곳이 되기 바라면서, 자신도 이곳에 속한 내부자가 되고 싶다는 시적자아의 심 정을 엿볼 수 있다. 이때의 서울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마음의 중심지이다. 이처 럼 조선 시대의 사람들이 서울과 관계를 맺고 싶다는 것은 출세지향적인 유교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앞에서 살펴본 「한양가」에서 궁궐과 관아의 부분에 대한 묘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서울은 왕과 고위귀족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권력의 중심부인 궁궐과 의정부 및 육조를 비롯한 최고의 정치 기관, 국가의 정통성을 보여준 종 묘와 제단, 그리고 지식인들이 추구하는 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전국 최고의 교 육기관인 성균관까지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조선조 지식인들은 이러한 정치와 문화적 기능이 완비한 장소를 동경하며 이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심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곳의 내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서울의 근교와 같이 가까운 곳에 머 물려고 하는 것도 당시의 흥미로운 사회 현상들 중의 하나가 된다. 오늘날 서울 에 생활할 수 없더라도 서울의 주변에 있는 경기도 및 다른 도시에 살고 싶다는 심정과 유사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조선 때에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는 독특 한 집단도 생겼다.161)
즉, 당시 사대부들은 서울과 가까운 한강 나루터 강변에 별서를 두고 ‘중앙’으 로서의 서울과의 접근성을 중시하였다. 강호에 은거하는 형태의 삶을 유지할 때 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고, 주변의 사대부들과 함께 연대를 이루며 문학 창작 활동을 하는 등 자신들이 중앙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고수하려 하였다.162) 자신의 거주지가 서울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다시 올라오기 어 려울 것이라는 불안감이 클 것이므로 사대부들은 가능한 한 임금이 계신 도성이 있는 서울 가까운 곳에 거처를 마련하려고 애썼던 것이다.163)
161) 경화사족은 서울 근교에서 거주하는 근기남인, 소론, 북학을 수용한 노론 낙론계 학자들 이 중앙학계의 주류를 이루면서 여러 대에 걸쳐 관료생활을 하는 가운데 성장한 집단이다.
162) 김창원, 「지역문학 연구의 방법과 방향-조선후기 근기(近畿) 지역 국문시가를 예로 하 여」, 『우리어문연구』 제29집, 우리어문학회, 2007, 249~250면.
163) 김창원, 「조선후기 근기(近畿) 지역 강호시가의 지역성-김광욱의<栗理遺曲>을 대상으
이렇게 볼 때 서울은 사대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확인할 수 있는 추구와 동경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인 현상이 생기는 원인은 유교적 인 사상을 기반으로 형성된 입신양명적인 사고방식, 과거 시험을 대표한 교육 제도, 신분제를 비롯한 명예 제도 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한국의 정치문화와 사회질서가 서로 작용하며 형성된 명예 제도에서 이 러한 중심지라는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조선시대는 입신양명을 실현할 수 있는 엄정한 명예 제도가 구비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명예 제도의 토대를 이 루고 있는 것이 신분제도였다. 신분제도는 모든 사람을 명예의 등급에 따라 양 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으로 구분하고, 혈연적 연계에 따라 신분이 세습되 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신분에 따라 활동하는 지역도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164) 「한양가」에서 신분에 따라 각종 놀음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당시 신분제도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분제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바로 교육제도이다. 「한양 가」에서 '학이 분하여 유학을 교훈니/ 명뉸당 셩뎐은 우리라 반궁이 라/ 일 명 학 부 위 뫼셔잇고/ 단의 느진 츔은 연비예천 구 나'라는 구절을 통해 당시의 교육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입 신양명은 역사적 삶을 통해서 양명이라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 들, 즉 주로 양반이 갖고 있었던 삶의 목표였다. 양반 중에서도 선비는 유교적 입신양명을 추구하였던 대표적 부류였다.
이와 반대로 계속 중심지인 서울에 있던 내부자가 유배나 전쟁을 겪은 후 부 득이 서울을 떠나거나 번창했던 수도의 무너짐을 보면서 깊은 장소상실감을 느 끼게 되어 중심지인 서울에 대해 더욱 절망적이고 격한 소외감을 표현하는 현상 도 무시할 수 없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시조문학사전#3 김
로」, 『시조학 논총』제28집, 한국시조학회, 2008, 67~69면.
164) 조선시대 서울 주민들은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종로를 경계로 하여 살았다고 한다. 왕족 과 양반관료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직선 이북의 지역, 지금의 율곡로 양쪽 일대 에 모여 살았으니, 북촌이 그들의 거주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서울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 누면 그 중간지대인 청계천(광통교) 일대가 위항이었으며, 좁은 집들이 모여 있었던 누상 동이나 누하동을 중심으로 한 인왕산 일대도 위항이었는데,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 원으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이 넉넉한 위항인들이 살았으며, 인왕산 언저리에는 위 항인 가운데 주로 서리나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허경진, 「인왕산에 활동한 위항 시인들 의 모임터 변천사」, 『서울학연구』 13,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1999, 87~88면.)
상헌(金尙憲)) 또한 앞에서 살펴본 두 편 시조인 '기러기 외기러기 너가 길히 로다~ (청구영언(진본) 496번)'과 '靑天에 셔 울고 가 외기러기 나지 말고
말 들어~ (청구영언(육당본) 605번)'에서 볼 수 있듯이 서울은 권력의 중심부 이자 문명사회의 대표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항상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하기 위 해 시적화자를 떠난 님이 있는 소외된 장소이다. 이때의 서울은 시적자아가 버 림을 받게 된 근원지이지만 그리운 님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면 시적자아의 마음이 향한 중심지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하다.
물질적 문명부터 사람들의 정심까지 중심지가 된 서울에 비해 북경은 경제보 다 정치나 문화적인 이미지가 더욱 강하여 전국의 '수선지지(首善之地)'165)라는 장소이미지를 갖게 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수선지지(首善之地)'의 이미지는 앞에 살펴본 정치와 제도가 완비된 문명사회의 장소이미지라는 부분에 서 잘 볼 수 있다.
우선 '수선지지(首善之地)'로서의 북경은 문화적인 면에서 정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정치의 중심으로서의 북경은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건립되는 것도 사실이다. 즉, 수도는 정치적인 의도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 드러난 문 화현상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앞에서 살펴본 북경의 도시설계 및 자금성의 건설에 관한 내용을 보면 도시계획의 4대 요소인 종묘, 사직, 궁궐, 시장은 모두 유교적 종법성 및 택중론의 원리에 따라 공간구성을 이룬다. 즉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전조 후시(左廟右社, 前朝後市)'의 원칙을 따라 설계하여 중축선을 통해 무한한 권력 을 가진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였다. 그리고 궁성에서 주요 전각들은 모두 임좌 병향(壬坐丙向)하여 입지하는데, 이는 군주가 남면하여 정사를 보아야 한다는 유 교적 종법성의 일환이며 유교적인 정치사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수 선지지(首善之地)'의 북경에서는 정치와 문화가 서로 분리할 수 없게끔 되어 있
165) 수선(首善)이라는 말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에 나오는 “건수선 자경사시(建首 善自京師始: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함은 서울에서 시작된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또 수선 지지(首善之地)라 하면 '다른 곳보다 나은 곳' 또는 '그런 지위'라는 뜻이며 중국에서 북경 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도 이 말을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 고산자 김정 호는 『수선전도(首善全圖)』라는 지도를 제작하여 서울의 형세를 그리었다.
는 반면에 서울은 정치와 문화의 독립성이 북경에 비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전통문화는 현실적인 정치문화를 중심으로 건립된 것이기 때문에 문화 중심인 수선지역의 북경에 강한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적인 분위기가 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구하는 협의적인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리반룡(李攀龍)이 쓴 「제경편(帝京篇)」은 시작하자마자 북경은 호협이 많이 나타나는 곳(燕京豪俠地)이라고 서술하였다.
이처럼 북경은 단순한 정치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연(燕)문화의 영향을 받 아 더 많은 협의정신 및 정치사회에 대한 근심이라는 심상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북경에 있는 원주민들은 출세보다 정체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크다.
이와 같은 장소이미지는 서울이 가지고 있는 출세 지향적인 중심지라는 이미지 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북경은 정치문화가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인륜예절을 비롯한 윤리, 도덕 적 면에서도 전국의 수선지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명나라 때에 성행하기 시작 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북경은 800년 역사를 품고 있는 봉건 수도로서 그의 문화는 정통적인 봉건사회문화라고 볼 수 있다. 황좌(黃佐)가 쓴 「북경부(北京 賦)」에서 '然猶偃戈綍,修俎豆,而樂育胄監之英。是以宣後儲神,矢詩於穆清。
北望崇文之閣而思天下化成。'을 통해 서울처럼 북경도 역시 유교국가의 수도인 만큼 과거 중국 사회의 주류 사상인 유교문화에 대한 태도를 확실히 볼 수 있 다.
뿐만 아니라 북경의 건축문화는 북경문화의 정체성, 나아가 중국 문화의 정체 성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단면이다. 특히 원나라부터 도시를 설계하기 시작 하여 한(漢)민족 정권인 명나라, 만족(滿族) 정권인 청나라를 거쳐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장엄한 북경성의 모습이 완전히 형성되었다. 사람은 흔히 북경을 '중 축선(中軸線)' 위에 만들어진 도시라고 하는데 이러한 특징이 중국의 오래된 철 학사상 및 자연관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앞에 살펴본 리시면(李時勉)의 「북경부(北京賦)」166)는 당시 중국의 제일대표적 정치사상인 지고지상의 황권(皇權) 의식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동시에 중국 전 166)若夫其宮室之制,則損益乎黃帝合宮之宜,式遵乎太祖貽謀之良,居高以臨下,背陰而面 陽。奉天淩霄以磊砢,謹身鎮極而崢嶸。華蓋穹崇以造天,儼特處乎中央。… 廟社並列,左 右相當。東崇文華,重國家之大本;西翊武英,儼齋居而存誠。-李時勉, 「北京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