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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엘리트가 통일에 기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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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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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통합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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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 전 세계 각국에 720만명에 이르는 재외동포들 이 살고 있다. 이들 재외동포들의 이주 사연과 과정, 삶의 모습들은 제각각 다르다. 현재 살고 있는 모습 또한 서로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 동포들이고 같은 민족이다. 통일 시대를 내다보고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재외동포의 하나된 역량은 한반도 통일 여건 을 확장해 나가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이러한 관점에서 해외 한민족의 삶과 통일비전을 조망하기 위 한 차원에서 ‘고려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좌담회를 개최했다. 150년이 넘는 이주 역 사 속에 강제 이주 80년을 맞이한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와 정착 과정, 삶의 모습을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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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또한, 고려인들이 바라보는 ‘한국’과 그들의 정체성, 그리고 한반도 통일 실현에 있 어 고려인의 역할 등에 관해 논의했다.

‘한민족 통합과 통일’ 을 주제로 개최된 좌담회는 권태오 민주평통 사무처장과 김게르만 카자흐스탄 국립대 교수, 이재완 민주평통 중앙아시아협의회장, 황영삼 한국외국어대 교 수가 참석해 의견을 나누었다. 4월 3일 민주평통사무처에서 개최된 좌담회 내용을 발언 록 형태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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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삼 한국외국어대 교수 :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바쁜 일정 에도 불구하고 오늘 좌담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좌담 회는 민주평통에서 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는 <통일포커스>를 제작 하기 위한 과정으로 마련된 자리입니다.

오늘 논의할 내용은 ‘고려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려인들의 이 주 역사와 삶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민족 통합과 통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권태오 사무처장님께서 이번 좌담회 의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진정한 ‘한인공동체’ 만들기 위한 과제 고민해야할 때

고려인 엘리트가 통일에 기여할 것

한반도 상황에 대한 이해 제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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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오 민주평통 사무처장 : 민주평 통에서 발간하는 <통일 포커스>는 연간 2회 발행하고 있습니다. 통일과 관련된 현안 이슈와 특징적인 사건이나 사안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금년 상반기 <통일포커스>는 고려인 들의 이주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 니다. 2017년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 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지 80년이 되 는 해입니다. ‘고려인’이라고 하면 러시 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 구소련지역

에 살고 있는 우리 한민족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카 레이츠’라고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중앙아시아와 연해주, 러시아 등지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와 이들의 삶을 되짚어 보고, 한민족 통합을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 방안과 통일시대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고려인의 역할, 그리고 고려인의 새로운 미래에 대해 조망해보고자 합니다. 흔쾌 히 시간을 내주신 세 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권 태 오 민주평통 사무처장

▶좌담

•권태오민주평통 사무처장

•김게르만카자흐스탄 국립대 교수

•이재완민주평통 중앙아시아협의회장

•황영삼한국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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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민주평통 중앙아시아협의회장 : 해외 협의회 중에서 고려인 자문위원이 위촉되어 활동하고 있는 곳은 중앙아시아와 모스크바, 블 라디보스톡 3개 협의회입니다. 고려인들이 자문위원에 포함되어 활 동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고려인들을 이해하고 그 역할을 찾 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오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년을 맞아 고 려인들의 삶과 한반도 통일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고려인 4세대인 김게르만 교수님과 고려인의 삶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 온 황영삼 교수님이 함께 자리해 주셔서 더 깊이 있는 이야 기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어렵게 만들어진 자리인 만큼 오늘 이 시간에는 고려인들의 이주 역 사와 함께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 고려인들의 역할에 대해서 폭넓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고려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황영삼 : 네. 권태오 사무처장님과 이재완 회장님께서 오늘 나눌 주제와 이야기 방향에 대해서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은 한민족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년을 맞아 고려인들의 삶과

통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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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과 통일을 위해 고려인들의 과거 와 현재, 미래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몇 가지의 소주제로 나눠서 이야기하 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고려인의 전반적인 소개와 역 사, 그리고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 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인들이 언제부터, 어떤 이유들로 인해서 고향을 등지고 떠나 게 됐는지, 이주 역사에 대해 먼저 살 펴보고, 또한 현재 고려인들이 어떤

나라에 얼마나 흩어져서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각국에서 살면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지금의 사 회적 지위나 역할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고, 지금의 시대를 살아 가는 고려인의 정체성과 한국과의 관계를 짚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현재 한국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규모와 그 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한반도 통일시대를 대비해서 남과 북에 속해 있지 않은 고려인들이 통일을 위해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권태오 : 우선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고려인 들이 누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려인은 옛 소련 영토 즉, 러시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입니다.

1860년대 먹고 살기 위하여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에 정착한 것이 황 영 삼 한국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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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역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스탈린 시대에 다른 소수 민족들과 함께 분리·차별 정책의 대상이 되어서 1937년에 중 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러시아와 주변의 독립국가연합에 속한 여러 나라 에서 살고 있지만 현지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성향으로 많은 어려움들 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초창기 이주사를 살펴보고, 이어지는 일제강 점기 시대의 이주 사연과 항일운동, 독립투쟁사를 살펴보는 것이 좋 을 것 같습니다.

공식 최초 이주는 1864년, 강제 이주는 1937년 시작돼

황영삼 : 네 그렇습니다. 공식적으로 1864년부터 고려인들의 이주 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무처장님 말씀처럼 살기 위해서 함경도 지방에 살고 있던 조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 습니다. 진짜로 목숨을 걸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에 는 월경이 모두 불법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

고려인은 옛 소련 영토 즉, 러시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

합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입니다. 1860년대 흉년

때문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에 정착한 것이 고려인

역사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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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에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습 니다. 그 당시 연해주 지방은 러시아 땅에 편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 기여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지역 개발 을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지역 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잠 시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영구 이주를 목적으로 가족 전체가 국경을 넘었던 것입니다.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 시기를 두 고 1863년이냐 혹은 1864년이냐에 대

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러시아 연방정부의 공식 입장과 고려 인들의 여러 가지 기념행사 등을 볼 때 1864년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 다. 이렇게 보면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는 150년이 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 민족의 해외 이주의 시발점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한 것이 1903년 1월 이어서 보통 1903년을 미주한인 이주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니 고려 인들의 이주 역사는 이보다 훨씬 긴 이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 입니다.

이주 역사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초기에는 두만강 유역에서 가까운 곳에 정착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됩니다. ‘지신허’라는 마을이 최초의 고려인 마을로 기록에 나타납니다. 1860년대 초반에 시작된 이주가 1870년대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져 이런 마을들이 여러 곳에 등장하게 되었고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지리적으로도 더 넓어지게 이 재 완 민주평통 중앙아시아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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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러시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홍범도 장군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 오르다로 강제 이주 당했다. 사진은 크질오르다 중앙묘역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

됩니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10년 한일병합까지 많은 독립운동 가들이 연해주 지역에 와서 활동하게 됩니다. 이미 정착하고 있던 고 려인들의 도움으로 독립운동이 원활했기 때문입니다. 독립자금을 지 원해준 것으로 유명한 최재영 선생이나 봉오동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홍범도 장군 같은 이들도 당시 극동지역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 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러시아 지역이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되면서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한국과는 사실상 단 절된 시기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것이 한국인들이 고려인들을 잘 알지 못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완전히 다른 체제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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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념적으로 다른 체제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서는 고려인들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더욱이 처음 고려인들이 정착할 때와 달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되면서 거리마저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중앙아시아와 모스크 바 지역에 고려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이 1937년 강제이주 이후가 아 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소수이지만 이미 중앙아시아와 모스크 바 지역에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소수였기 때문 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면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와 유럽, 러시아 지역에 거주한 역사는 강제이주 시기보다 40여 년 더 앞선 120여 년 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극동지역에 살던 많은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하면서 카자흐스탄, 우 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사 실이지만 분명 그 이전부터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살고 있 었습니다.

권태오 : 황 교수님께서 고려인들의 이주 시작부터 강제 이주까지

특히 고려인들은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80여 년을 남북

한 모두와 연결점 없이 모국 없는 소수민족으로 살아

왔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아주 큰 특징 중 하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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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설명해 주셨는데, 그러면 이주 초기부터 강제 이주 시기까지 고려 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리고 강제 이주 이후의 고려인들의 삶은 어떠했는지요? 소련이 붕괴된 이후의 고려인 역사에 관해서도 궁금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신 김게르만 교수님께 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려인들의 새로운 집단 주거지 -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김게르만 카자흐스탄국립대 교수 : 고려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 과 러시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에 속해 있는 많은 나라의 전문가들 이 연구해 왔지만 역사학자인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직도 제대로 연구 하지 못한 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고려인 백과사전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간략하게 고 려인 마을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을 넣었지만 아직까지 고려인 한인 마을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된 연구가 없습니다. 이것은 고려인들 에 대한 연구가 깊이 있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강제 이주 전까지 고려인들이 연해주 지역 어디에서, 얼 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코리아타운’도 미국이 아니라 연해주 지역에서 ‘신한촌’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한국과 러시 아에서 각각 가지고 있는 연구 자료들을 모아서 함께 연구한다면 지 금까지 알지 못했던 고려인들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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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고려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 족, 재미교포들과 비교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고려인들이 처음 이주를 시 작할 때 이주대상 국가는 러시아 제국 이었습니다. 그 후엔 소련이었고, 소 련이 해체된 후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고려인들은 똑같이 고려인이지만 이 나라들은 완전히 다른 나라들입니다.

중국은 문화 혁명과 같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는 그대로 있고, 조선족들은 여전히 중국 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러시아 제국도 없어지고, 소련 도 없어지고, 전혀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인들의 운명은 조선족이나 재미교포들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인들은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80여 년을 남북한 모두와 연결점 없이 모국 없는 소수민족으로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 로도 아주 큰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러시아로 처음 이주했을 때 가진 고려인들의 정체성은 최근 에 태어난 고려인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말로

‘코리안’이라고 하면 한국 사람과 고려 사람(고려인)을 모두 의미합니 다. 비교적 최근에 태어난 고려인 5, 6, 7세대까지도 똑같은 한민족 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김 게 르 만 카자흐스탄 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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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 인문제를 고려인 출신 학자들과 한국의 고려인 전문가들이 함께 연구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학자들과 고려인 학자들이 함께 연구한다면 일부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고 또한 시대별, 단계별 로 고려인들의 삶을 연구하는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황영삼 : 김 교수님께서 방금 ‘신한촌’ 이야기를 하셨는데 블라디보 스토크 신한촌에는 ‘새로운 한인들의 마을’이라는 기념비도 세워져 있 습니다.

권태오 : 우리는 그동안 고려인이라고 하면 대부분이 지금 현재 이

19세기 말 고려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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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생각해 왔는데, 두 분 의 말씀을 들어보면 블라디보스토크와 극동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처음 정착한 연해주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 하신 블라디보스토크의 기념비는 언제 세워진 것인지요?

김게르만 :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기념비는 강제이주 60주년 때인 1997년에 세워진 것인데 작년 5월에 수리해서 지금은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황영삼 : 연해주 지역은 우선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깝고 정치·경 제적으로도 굉장히 민감한 지역입니다. 고려인들의 공동체가 연해주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했기 때문에 연해주는 사실상 고려인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고려인들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것 이 사할린 한인들입니다. 사할린 한인들은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사 할린 고려인’이라는 말을 절대 쓰지 않습니다.

러일전쟁 직후 사할린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북쪽은 소련이 지배하 고 남쪽은 일본이 지배하면서 일본은 한국 사람들을 징용해 사할린으

러일전쟁 직후 사할린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북쪽은 소련이 지배하고 남쪽은 일본이 지배하면서 일본은 한국 사람들을 징용해 사할린으로 보냅니다. 그들이

‘사할린 한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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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보냅니다. 그들이 ‘사할린 한인’들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징용되었던 한국 사람들을 다시 한국으로 되돌려 보 내야 했지만 일본은 일본인과 자기 나라 국적자로 귀화한 한인들만 데 려 갔습니다.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 즉 ‘사할린 한인’들은 남겨 두었 던 것이죠. 소련은 이런 상황에 소극적인 태도로 방관했습니다. 그러 다보니 강제 이주와 전혀 관계없이 한인들이 사할린에 거주하게 되면 서 대륙의 고려인과는 다른 역사를 가진 한인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할린 한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소련에 동화되면서 소련 국적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극동지역으로 이주를 하거나 모스 크바 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는데 점차 모스크바 쪽으로 유학을 가거나 취업을 하면서 대륙으로 넘어가는 사할린 한인들도 많이 생겨났습니 다. 그리고 사할린 한인의 초창기 세대들은 한국말을 꽤 잘 했기 때

블라디보스톡에 자리잡았던 ‘신한촌’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존재하면서 해외 독립운동가들 의 주요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사진은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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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소련이 붕괴되고 난 뒤에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러시아에 진출 할 때 통역으로 많이 채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고려인과는 다 른 사람들입니다. 편의상 고려인이라고 할 때는 사할린 한인들까지 모두 포함한 포괄적인 개념으로 부르지만 엄연히 고려인과 사할린 한 인들은 역사가 다른 두 집단입니다.

사할린 한인 중에는 소련 시기에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옮겨간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알마티(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에 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비교적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할린 한인들은 고려인들과 조금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이재완 회장님께서 조 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대륙의 고려인과 다른 ‘사할린 한인’은 일본에 의해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

이재완 :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과 사할린 한인들은 전혀 다른 역 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생각하는 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일제로부터 해방에 대한 생각입니다. 고려인들은 광복절 행사를 따로 하지 않고 8월 15일을 전후해 ‘한국 문화의 날’이라는 행 사를 열고 있습니다. 고려인들이 독립적으로 하는 연간 행사를 보면

‘설날’과 ‘한국문화의 날 행사’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중 사할린 한인들 은 한국문화의 날 행사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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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고려인들과 사할린 한인들이 광복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차 이로 볼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오래된 이주의 역사와 일제의 강제 징용 에서 비롯된 사고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비에트 시스템에서 생존한 고려인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 거 리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걸 한국으로 치면 지역감정이라고 해 야 할까요? 그런 것처럼 연해주에서 온 고려인들과 사할린에서 온 한 인들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카자흐스탄 고려문화중앙회장인 신 브로니슬라브가 8.15 문화행사 를 다른 단체로 이전을 추진하다가 사할린 한인들의 반발로 행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고려인세대들은 이러한 문제 에 연연하지 않고 서로 동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옛 고려인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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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오 :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이 다른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한민족이지만 연해주 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은 서로가 정착한 배경과 발 전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류인 것 같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구분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탈린의 민족재배치 정책으로 1930년대 초부터 강제 이주 시작돼

황영삼 : 보완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소수지만 고려인 중에는 모 스크바에서 유학 중 정치적 망명을 하고 정착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1958년에 김일성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모스크바에서 공부 중이 던 북한 엘리트 유학생들이 소련에 망명을 신청하고 정착한 것입니다.

그중 일부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으로 옮겨가서 거주합니다. 그들 의 자녀들이 고려인들과 함께 성장하면서 고려인화 되어 살아갔었는 데 사실 이들은 강제이주의 경험을 겪지 않았습니다. 단지 현지에 있 는 고려인들과 같이 섞여 살면서 고려인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 들까지 합하면 연해주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으로만 생각하기엔 고려 인 사회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제 이주와 관련해서는 1937년에 고려인만 강제 이주 당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민족 재배치 정책으로 10개 소수민족의 강제 이주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고려인들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은 1937년에 강제 이주하게 되지만 사실 강제 이주는 1935 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히틀러 정권이 강화되면서 소련은 안보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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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느끼고 국경 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들과 폴란드인들을 카자흐스 탄 쪽으로 강제 이주를 시킵니다. 그리고 핀란드 소수 민족도 대륙 안 쪽으로 강제로 이주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실상 소수민족에 대한 강 제 이주의 시작입니다.

그 이후에 가장 대규모로 강제 이주된 민족이 바로 고려인들입니다.

특히 소련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주된 유일한 민족이기도 합니다.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려인들이 일 본 사람과 비슷하게 생겨 일본 스파이와 구분이 어렵다는 이유도 있 지만 그 외에도 연구자들에 따라 다른 원인이나 입장들도 많이 밝혀 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1937년 강제 이주 이후로 소련의 극동지역에는 우 리 고려인들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해가 강제 이주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들이 계획되어 있는데 이것을 단순히 우리 민족의 수난사로만 볼 것이 아 니라 소련의 정책이라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 니다.

그리고 오늘날 고려인들이 이주 후에 겪었던 어려움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고려인들은 소련의 붕괴로 각 지역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

강제 이주와 관련해서는 1937년에 고려인만 강제 이주

당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민족 재배치 정책으로 10개

소수민족의 강제 이주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고려인들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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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순간에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되면서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또 모국어로 러시아어를 배웠던 사람들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주변 국가에서 살게 되면서 해당 민족 언어를 배우지 못했기 때 문에 사회활동을 하는데 어려움도 겪고 있습니다.

권태오 : 포스트 소비에트라고 하는 소련 붕괴 이후에 고려인들이 언어 등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 려인들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는 어려움들이 있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 픕니다. 특히 이산가족의 아픔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고 현재도 겪 고 있는 것이어서 더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또한 고려인 이주 역사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려인 최초 정착지인 카자흐스탄 우쉬토베에 있는 강제 이주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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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완 : 이주 역사와 관련해서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 선시대에는 오랑캐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연해주지역에 완충지대 를 설치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제한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금 지했는데 19세기 들어 경작을 위해 조금씩 몰래 그 지역으로 들어가 서 살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있는지요?

그렇게 몰래 들어가서 경작하다가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거 주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들의 생활영역이 커지면서 더 넓은 지역 까지 확산됐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럼 1937년 강제 이주 후에는 이 지역에 있던 사람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 주된 것인가요?

고려인 강제 이주 갑자기 일어난 일 아냐

김게르만 : 네. 그렇습니다. 모두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했습 니다. 연해주와 아무르강 북쪽에 큰 마을이 있었는데 러시아로 강제 이주해서 1941년까지 거기서 고려인들이 살았습니다. 강제 이주는 절 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레닌 시대인 1924년부터 이미 고려 인들을 이주시켜야 한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사실 고려인들보다 가 까운 만주 지역의 중국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 문입니다.

이재완 : 아무래도 그때는 일본 사람과도 혼동이 되는 시기였으니 까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징과 관련이 있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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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게르만 : 일본 사람과 중국 사람들 때문에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 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 를 하지 않고 연해주 지역에서 계속 있었으면 더 잘 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전쟁이 한창인 1941년이나 1942년도에 강제 이주를 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입니다.

고려인들의 이주는 아주 큰 계획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주시 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태운 기차는 화물기차나 동물을 운반하는 기차였지만 당시의 소련 자료들을 보면 강제 이주가 치밀하 게 준비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재완 : 그때 이주한 고려인들의 인구는 얼마나 되나요?

김게르만 : 18만 명을 이주시켰다고 하는데 카자흐스탄과 우즈베 키스탄에 도착한 사람은 17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주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거나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즉 이는 정치탄압을 받은 고려인들로 볼 수 있겠는데 기록에는 약 2,500여 명이 감옥에 갔다가 처형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주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레닌 시대인 1924년부터 이미 고려인들을 이주시켜야

한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사실 고려인들보다 가까운

만주 지역의 중국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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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아까 권태오 사무처장님께서도 말씀하 신 것처럼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과의 역사는 생각보다 많이 다릅니 다. 어떤 분들은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들이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렇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주셔야 합니다.

특히 사할린 한인에 대해서는 연구가 시작된 지 10년도 안되었습 니다. 그리고 이미 1980년대에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 중 에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미 중앙아시 아 고려인들에게 나라는 소련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할린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쪽에서 일하게 되면서 지역 신문도 한국말로 나오게 되 었습니다.

또 하나는 1945년 해방 후 소련 당국이 중앙아시아 고려인 중에서 1,000여 명을 뽑아 사할린 지역으로 파견을 보낸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때 파견된 고려인들은 사할린에서 지방 지도자가 됐습니다. 이것이 본래 정착중인 사할린 한인들에게는 불만이었습니다. 대륙의 고려인 들이 자신들을 지도하게 됐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련 정부는 일본 지 배 하에 있었던 사할린 한인들을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의 고려인들을 보낸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갈등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차이는 남아 있습니 다. 대표적인 예가 모스크바에 사할린한인협회는 없지만 고려인협회 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과의 제일 큰 차이는 이주와 정착 과정이 서로 다른 역사라는 점이고, 정체성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인들에게는 이미 소수민족의 정체성이 생 겼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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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삼 : 고려인을 이야기할 때 사할린 한인 문제가 다각도로 잘 다 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부분을 무시하고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을 함께 묶어서 생각하면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가령, 사할린 한인들은 영주 귀국사업을 통해 한국에 많이 귀국했고, 1세대도 살아계신 분들이 있는데 왜 고려인들은 영주 귀국을 하지 않 고 있는지, 비슷한 또래인데 누구는 1세대이고 누구는 3~4세대인지 하는 것들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고려인들과 사할린 한인의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김게르만 :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고려인들과 사할린 한인들이 같 은 문화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하면서 눈에 보이는 차이들은 많이 줄 었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차이점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기자들이 오면 한국말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습니다. 주로 사할린 한인들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결국 사할린 한인들과 만나서 한국말로 대화하고 그것을 근거로 고려인들은 모두 한국말을 잘 한 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알마티에 살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이 하는 말은 고려인들과 약간 다 릅니다. 한국어 사용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고려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배경 지식이 됩니다.

수교 후 정착한 교민과 고려인 갈등 존재해

이재완 : 사할린 한인들도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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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우리는 구분 없이 모두 고려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 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사할린에서 온 사람, 북한에서 탈 출한 사람들도 있고, 정말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돼서 온 사람들도 있 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 고 그들을 구분 없이 ‘고려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이런 차이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요즘은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련해체 후 중 앙아시아국가들과 국교 수교 후에 이주한 우리 교민들과 고려인들과 의 관계에서 일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들 간의 갈등이 지금은 국교 수교 이후 정착한 교민들과 고려인들과의 관계에서 더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다

러시아 16만 우즈벡 16만 카자흐 10만 키르기즈 1.7만 우크라이나 1만 기타 4천 총 45만명 [2016]

구소련 지역 고려인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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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복잡하게 엮여있기 때문에 손쉽게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입니 다. 이에 대해 민주평통 중앙아시아협의회에서 이런 갈등을 줄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 나가고 있습니다.

황영삼 : 지금까지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봤습니 다. 말씀을 나누었다시피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가 단순하지 않은 것 이 사실입니다. 크게 봐서 고려인이라고 하는 존재는 역사적으로 강 제 이주를 겪었던 대륙의 한인들이고, 그 외에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 된 사할린 한인들과 아주 일부이지만 북한 출신으로 망명한 후손들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구분 없이 크게 보고 고려인, 고려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사람 들이 있는데 한국과 소련의 수교 이후 한국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그 들은 다 같은 한민족이기 때문에 그렇게 봤던 것입니다. 특히 이런 구 분이 모호한 곳이 블라디보스톡과 같은 극동지역입니다. 이곳에는 한 국 사람은 물론이고 북한 노동자, 조선족, 고려인, 사할린 한인 등 다 양한 한민족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권태오 : 지금까지는 고려인의 이주 역사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그

고려인이라고 하는 존재는 역사적으로 강제 이주를 겪었

던 대륙의 한인들이고, 그 외에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된

사할린 한인들과 아주 일부이지만 북한 출신으로 망명한

후손들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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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 ‘고려인’이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을까요? 또한, ‘고 려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요? 앞서 잠깐 언급이 있었는데, 고려인의 ‘정체성’에 관해서 말씀을 나눠보는 것이 좋겠습 니다. 어느 나라에 어느 정도 살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고려인 45만~50만 추정, 정확한 규모 파악 어려워

황영삼 :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인들은 현재 약 45만~50만 명 정 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추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즈 베키스탄과 같은 국가에서는 독립 이후 아직 한 번도 전국적인 인구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2002년과 2010년 두 번의 인구조사가 있 었는데 고려인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15만 명과 16만 명 정도로 파악되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가장 최근의 자료가 소련 말 기였던 1989년의 인구조사입니다. 당시 조사 결과로는 약 18만 명이 고려인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지금은 조금 줄어서 약 16만 명 정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경우에는 약 10만 5 천 명 정도, 키르기즈스탄은 약 1만 7천 명 정도로 보고 있고, 우크라 이나에는 약 1만 명 수준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나라들은 1천명에서 몇 백 명의 소수 인원이 있고, 옛 소련에 포함됐던 에스토니아,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공화국에는 수 십 여 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런 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아주 소수이다 보니 관심의 대상에서 좀 벗어나 있 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흩어져 있는 고려인의 숫자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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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합하면 대략 45만에서 50만 명(인구조사에서 미파악되는 불법체 류자 고려 포함) 사이가 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김게르만 : 영어나 독어, 불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는 조선(한국) 사람을 모두가 ‘코리안’이라고 부르지만 러시아어는 ‘카레이츠’라고 부릅니다. 카레이츠는 조선보다 고려와 비슷합니다. 또 주로 함경북

흩어져 있는 고려인의 숫자를 모두 합하면 대략 45만 에서 50만 명 사이가 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1937년 강제이주 경로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지역 고려인 전원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였다.

(카자흐스탄 95,256명, 우즈베키스탄 76,525명 등 총 171,781명) 1957년 이후 고려인들의 새로운 이주 경로(90년대 이후에도 해당됨) 거주이전의 자유를 확보한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구소련 각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또한 사할린 한인들이 내륙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고려인 이주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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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서 러시아로 많이 넘어갔는데 이미 고려시대부터 사람들의 이주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이 고려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 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자료에도 19세기부터

‘고려인’, ‘고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황영삼 : 1920년대부터 고려인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문헌들이 발 견되고 있습니다. 1921년 고려공산당을 시작으로 1923년에 발간된

‘선봉’이라는 신문에는 고려 농민, 고려 여성 등의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대한’이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고려’라는 단어 가 널리 쓰이면서 고려인으로 지칭할 수 있는 어원적 근거가 마련된 것입니다.

소련 시기에 카자흐스탄 지역에서는 ‘고려’보다 ‘조선’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었고 서울올림픽 이후부터 남북한 개념이 생겨나면서 조 선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옛 명칭인 고려라는 말을 다시 썼을 것이라 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재완 : 당시 지도에는 우리나라를 ‘코리(COREE)’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아마 우리를 ‘고려’라고 불렀 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교수님께서 역사학적인 관점으로도 자료가 있 다고 말씀하셨지만 언어학자들 이야기로는‘카레이츠, 코리아’와 같은 외래어를 한국어로 하면 ‘고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사람들 입장에서는 ‘카레이츠, 코리아’ 이렇게 듣는데 우리는 한국말로 ‘고려’라고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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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삼 : 1937년에 고려인들이 집단으로 강제 이주되어 17만 2천 여 명이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살게 되었습 니다. 이 중에는 그곳에서 엘리트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활약상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현지 교민 들이나 고려인들의 평판에 대해서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지 지도층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 보여줘

김게르만 : 소련 시대에는 엘리트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대신 러시아어로 노멘클라투라(nomenklaura, 소수의 특권층)라고 불리 는 계층이 있었죠. 민족에 상관없이 노멘클라투라는 역시 공산당원 이었습니다. 공산당원이 아니면 노멘클라투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항상 소수민족이 포함되었습니다.

소련 시대에는 국가의 인구를 러시아 사람, 우즈베키스탄 사람, 카 자흐스탄 사람, 고려인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인도 노멘 클라투라에 포함이 되면 장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반드시 노멘클 라투라가 아니어도 고려인들이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집단 농장에서 근무했는데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사람들보다 일을 더 잘 했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의 교육 문화가 고려인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어 교육 수준도 유태인 다음으로 높았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된 후에는 각 국가에서 엘리트를 키우기 시작했 습니다. 자연스럽게 소수 민족들에 대한 배려는 줄어들고 러시아 사 람과 해당 국가를 이루고 있는 민족들에게 많은 기회와 혜택이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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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습니다.

고려인들에게는 오히려 소련 시대보다 더 기회가 줄어들게 된 것 입니다. 그래서 고려인들도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하 나가 각 국가의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몇몇 분이 뜻을 이루어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아쉬운 점은 국회의원들의 영향력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의 젊은 고려인들은 정치나 공공분야보다 개인 사업(비지니스 분야)에 더 많 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은 조금 특이한 경우인데 보통은 그 국가의 민족이나 러 시아인들이 국가의 엘리트가 되는데 카자흐스탄에서는 많은 고려인 들이 사회지도층이 되어 다른 국가의 고려인들에 비해서 많은 영향 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태오 : 노멘클라투라(nomenklaura)라고 하는 제도가 조금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노멘클라투라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황영삼 :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라는 것이 소련 권력구조 의 특성인데요. 영어로는 nomenclature(상품목록리스트)입니다. 주 요 요직에 임명할 사람들의 리스트를 미리 작성해두었다가 그 리스트 에 의해서 국가 요직에 배치하는 겁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위원 정도면 노멘클라투라에 포함될 수 있고, 그 외에도 국가에 많은 기여 를 한 사람들이 노멘클라투라 리스트에 들어가면 성공한 소련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혜택도 많이 있구요. 소련 시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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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특징입니다. 이것은 바로 엘리트 고려인들이 소련 시대에 사회 지도층으로 진출하는 창구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권태오 : 노멘클라투라를 통해 고려인들이 사회지도층으로 나갈 수 있었다면, 지도층이 되지 못한 경우에는 차별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인들은 소련의 정책에 따라 강제 이주를 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여전히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 수민족으로서 많은 차별을 받았겠지요.

스탈린 시대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 제한 등 차별받아

황영삼 : 아주 적은 예외는 있습니다만 강제이주 때문에 고려인들

세계한인회장대회에 참가한 고려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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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 콜호즈는 고려인들의 근면함과 민족적 우수성을 소련 전체에 알린 대표적인 고려인 콜호즈이다.

(우측에서 두 번째가 김병화 회장)

이 받은 가장 큰 사회적 차별은 군대에 갈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탈린이 보기에는 믿을 수 없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1941 년 독일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고려인들은 총을 들고 전선으로 가 는 대신 후방에서 물자를 생산하고 광산에서 석탄을 캐는 노무 부대 에만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 지역에 살던 고려인이 모스크바에 가서 일을 하겠다 고 자기 마음대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차별은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3년이 지난 1956년부터 풀리게 됩니다. 소련 사회에서는 고려 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고려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것들이 다 차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꿋꿋하게 생활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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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소련에는 집단 농장 체제가 형성되었는데 많은 고려인들이 이 집단농장에서 근무하게 되고 때로는 고려인들이 집단 농장을 만들기 도 했습니다. 이런 고려인 집단농장에서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고 계 획된 물량 이상을 국가에 납부하니까 소련 당국에서는 고려인들이 정 말 부지런하고 농업에 소질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 덕분에 209명의 고려인들이 ‘사회주의 노동영웅’이라는 훈장을 받게 되었는데 특히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주의 북극성 콜호즈 김병 화 회장은 두 번이나 이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런 훈장은 하나만 받아 도 국가적인 대우를 받는데 그런 것을 두 번이나 받게 되면서 그분은 고려인 사회뿐 아니라 소련 전체적으로도 굉장히 존경받는 인물이 되 었습니다.

앞에서 군대나 거주 이전 등에서 차별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는데 아 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고려인들이 농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 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약이 많으니 많은 고려인들이 농업 사회에 편 입되어 열심히 활동하게 되었고, 또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농업 분야에 타고난 소질도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소련 사회에 크게 기여했고, 고려인들이 소련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1년 독일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고려인들은 총을

들고 전선으로 가는 대신 후방에서 물자를 생산하고

광산에서 석탄을 캐는 노무 부대에만 배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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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오 :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은 농업분야에만 종사했었나요?

다른 분야에 진출하는데 있어서 제약은 없었나요?

비즈니스 분야로 진출 성공 거둬, 세계적인 억만장자도 있어

황영삼 : 아닙니다. 고려인들이 농업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많 은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반드시 농업에만 종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려인 중에는 과학자도 나오고 관료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중 에 장관까지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련 시기에 전반적인 고 려인들에 대한 평가는 국가 발전에 기여한 훌륭한 민족으로 평가받았 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소련 붕괴 이후에 언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고려인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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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의 문제와 각 국가들의 민족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고려인들이 자신 들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고려인들은 러시 아어만 할 줄 알고 우즈베키스탄어나 카자흐스탄어는 하지 못했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고려인 엘리트들이 새롭게 찾은 것이 비즈니스 분야입니다.

비즈니스 분야는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하고, 분위기도 자유롭기 때문 에 고려인들이 굉장한 소질을 발휘했습니다. 포브스지에서 매년 세계 억만장자 리스트를 발표하는데 거기에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꼭 포 함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고려인들도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해 이제는 국가 공무원도 있 고 판·검사도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어렵게 살고 있는 고려인들도 많이 있지만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고려인들 도 많이 있습니다.

권태오 : 황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강제 이주 이후 정착하던 때와 비교하면 고려인들의 생활여건과 사회 진출 환경은 상당히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김게르만 교수님께서 현지에서 보고 느낀 사정 은 어떠한가요?

소련 시기에 전반적인 고려인들에 대한 평가는 국가

발전에 기여한 훌륭한 민족으로 평가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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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게르만 : 제 생각에 고려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한국에서 보는 시 각과 고려인들이 느끼는 것이 조금 다릅니다. 한국에서 볼 때 고려인 들은 소련에서 군대도 못 가서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고려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37년에 학교가 문을 닫 았고, 모두 러시아 말을 배우게 됐고, 소수민족이라 군대도 가지 못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고려인들에게만 적용이 됐다면 차별이었겠지만 모든 소수 민족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볼 때는 차별처럼 보여 도 고려인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른 소수 민족들도 그랬 으니까요.

황 교수님 말씀처럼 고려인들이 현지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은 점차 좋아지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헌법재판소장은 국가 서열 5위인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고려인이 했었습니다. 지금도 장관으로 재직 중인 고려인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러시아어만 할 줄 알고 그 나 라 언어를 하지 못 하기 때문에 정치 분야에서 고려인들의 활동이 조 금 줄었습니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 법에는 대통령이 되려면 모국 어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제약요소가 되고 있 습니다.

그러면 고려인들이 왜 우즈베키스탄어나 카자흐스탄어를 배우지 않 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략적으로 고려 인들이 선택하는 겁니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의 10%정도는 한국 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국을 모국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래서 한국에서 취업하려는 젊은 고려인들이 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받아주지 않거나 미국, 유럽으로도 갈 수 없다면 카자흐스탄어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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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배울 겁니다.

소련 시대에도 고려인들이 소련군에 입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 지만 고려인들은 소련 군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군에서 고려인들이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찰에는 수백 명의 고려인들이 있고, 그중에는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장의 가능성을 보고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입니 다. 카자흐스탄어, 우즈베키스탄어를 배우지 않는 것 역시 그런 의미 로 볼 수 있습니다.

고려인들은 ‘차별’을 또 다른 발전의 기회로 활용해

이재완 : 제가 고려문화중앙협회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카자

고려인들과 만나는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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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스탄에서 고려인 지도자가 나오려면 카자흐스탄어를 배워야 한다’

고 신 브로니슬라브 회장이 이야기를 하자, 그 자리에 참석한 고려인 원로들은 대부분 먼저 러시아어, 영어를 배우고, 카자흐스탄어, 한국 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고려인 중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많 기 때문이며, 비즈니스를 할 때는 러시아어와 영어가 필요하기 때문 입니다. 정치인이나 관료가 되려는 사람들은 카자흐스탄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는 한국과의 교류가 많아지고 경제 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고려인들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판단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황영삼 :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사실 고려인들이 제 일 취약한 것이 한국어 구사능력입니다. 한국어가 잘 안 되다 보니 한 국 사람들과 소통할 때 종종 오해도 생기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인들이 한국어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한국어를 지키기 위 한 노력들도 많이 했습니다. <레닌기치>나 <고려일보>, <새고려신 문> 같은 신문들이 다 한국어가 중시되고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입

한국어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도 많이 했습니다. 레닌기

치나 고려일보, 새고려신문과 같은 신문들이 다 한국어가

중시되고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입장에서 발간되었

습니다.

(43)

장에서 발간되었습니다.

1937년에 강제 이주된 직후인 1938년 5월 15일부터 발행된 <레닌 기치>라는 신문은 100% 한국어로만 되어 있던 신문이었습니다. 물론 공산당 기관지였지만 한국어로 소련의 국가체제 옹호나 고려인 사회 의 소식을 전해주고, 어떤 때는 한국어 학습 코너도 있었고 한국의 문 학작품도 실으면서 한국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신문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소련의 언어정책 때문에 이런 노력들이 잘 이어지지 못 하고 고려인들은 두 세대 정도가 지나고 나니 한국어를 전혀 사용하 지 못 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하지 만 일부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 리고 한글뿐 아니라 설날, 추석과 같은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주와 오랜 정착 과정에서

‘한글·한국어’ 사용 줄어

권태오 : 한국어 사용은 미흡하지만 전통문화 보존 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 셨는데, 고려인 사회에서는 한국의 전통문화나 오랜 풍 습들이 잘 보존되고 있는 편 인가요?

‹레닌기치› 신문 창간호(1938. 5. 15.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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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게르만 : 고려인들은 다른 소수 민족들에 비해 문화유산을 잘 보 존하고 있는 편입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김치, 밥과 같 은 음식이 있지요.

환갑이나 돌잔치 같은 것은 제가 자랄 때는 없었고, 설날, 추석, 단 오 같은 것도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사물놀이는 20여 년 전까지 몰 랐던 것을 한국 사람들이 와서 알려준 것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고려 인협회나 한국문화원, 각 대학의 한국학과 등이 생기면서 고려인들이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재완 : 기본적인 형태는 유지되고 있지만 사라진 것들도 있습니 다. 예를 들어 설날은 알지만 세배하는 풍습은 사라졌으며, 민속놀이 중 제기차기, 줄다리기, 윷놀이 등을 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소 련 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졌던 전통문화들이 최근 들어 조금씩 되살아 나고 있습니다. 김교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돌, 환갑잔치를 한다거나, 축제시 민속놀이를 포함하고 있으며, 설날에는 어른들께 세배를 하 는 것이 좋은 전통이 아니냐 하며 조금씩 불씨를 되살리고 있습니다.

김교수님은 세배를 한 번도 안 해보셨는데 아들한테 세배를 받으니까 기분이 좋지 않으셨습니까?

김게르만 : 이번에 설날에도 아이들에게서 세배를 받았지요.(웃음)

이재완 : 이런 식으로 좋은 것들은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하 는 것이 우리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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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삼 : 이재완 회장님께서 이번 5월에 고려인 축제를 개최할 계 획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축제인가요? 고려인들을 위한 전통 놀이를 많이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재완 : 한민족축제는 2011년 최초로 개최되어 올해 6번째입니 다.축제에는 줄다리기, 줄넘기, 제기차기, 투호 등 민속놀이가 포함 되어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줄다리기 경기를 하 여 자연스럽게 알지만 고려인들은 줄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부터 가르쳐주어야합니다. 제기 차는 방법도 잘 모르고 있고요. 그래도 열정을 갖고 참여합니다. 이번 행사시는 민속놀이에 아이와 부모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경기방식을 조정하여 참여율을 더 높이려 합 니다.

한 고려인 가정의 돌잔치. 고려인들은 우리의 문화를 보존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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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통 중앙아시아협의회 키르키스지회가 개최한 2016 통일기원 ‘K-POP 경연대회’

축제 중 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문화공연입니다. 옛날 우리 전통 무용부터 시작해서 K-pop까지 다양한 공연들이 선보여집니다.

초창기 축제시 문화공연을 할 때는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나와서 노래 부르는 게 전부였는데 이제는 공연도 다양해 지고, 관객들도 어린아이부터 젊은 세대, 어르신들까지 모든 연령대 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K-POP에 대한 청소년들의 관심 높아

권태오 : 문화공연은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행사이지요.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도 K-pop에 대한 청소년층의 관심과 참여가 매우 높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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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할 때, 우리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동백 아가씨’, ‘눈물 젖은 두 만강’ 같은 노래도 불리어지나요? 우리의 국민가요라 할 수 있는 이 런 가요들을 부르면 반응이 어떤가요?

이재완 :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알아요. 그리고 요즘의 청소년 들과 20대 초반인 6세대쯤 되는 젊은 세대도 한국 문화를 잘 알고 있 습니다. 오히려 중장년층 이상인 4~5세대 고려인들이 한국 문화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수의 사람들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고려인 사회에서도 고려극장과 고려문화중앙협회 등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려인 단체를 활용하여 우리의 전통 문화가 다음 세대에게 전수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합니다. 오히려 현대적인 문화는 따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한류의 영향으로 저절로 전달이 되고 있어 걱정을 조금 덜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권태오 : 한류의 영향으로 고려인들에게도 우리의 문화가 많이 알 려져서 그런지 최근 들어 한국에 들어오는 고려인들의 숫자도 늘어나 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려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 생길 정도라 고 하는데 국내에서 지내는 고려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황영삼 : 최근 5~6년 사이에 한국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거소등 록자 기준으로 약 2만 5천 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숫자 입니다. 이들 중 60%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고 우즈베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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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 국적이 30%, 나머지는 카자흐스탄 등에서 온 고려인들입니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기 도 안산에도 있고, 광주광역시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 들과 고려인들이 공간적 의미에서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국내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를 고민해 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과거에 비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려인 들이 많이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에 맞춘 대책을 수립할 필 요가 있습니다.

한국 거주 고려인 2만 5천여 명, 포용방안 고민할 때

이재완 : 최근 소식을 말씀드리자면, 전라남도 교육청의 고려인 차

러시아 우스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우리 민족의 강제 이주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전시관 역 할을 담당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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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육성 사업으로 고려인 청소년들이 전남지역의 직업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처음으로 카자흐스탄, 키르키즈 공화 국 학생 20명이 입학을 하였고, 올해는 15명이 입학을 했습니다. 첫 해에 선발된 학생들은 한국어를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이 사업이 지 속적으로 시행될 것이며, 선발을 한국어 능력시험 성적순으로 한다고 홍보하였더니 한국에 오고자 희망하는 학생들이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고려인 부모들 또한 자녀들의 한국어 교육에 관심을 갖 게 되었습니다.

황영삼 : 한국어 능력시험을 통과하는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은 어 느 정도인가요?

이재완 : 대부분 토픽 1등급이며 일부 2등급이 있습니다. 토픽 시 험은 1등급에서 6등급까지로 나눠져 있는데 1급이 제일 낮은 등급이 고, 3등급이면 한국의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습니다. 아 직은 고려인 청소년들의 성적이 낮은 등급이지만 작년에는 한국말을 하나도 못 하던 학생들이 올해는 능력시험 성적을 제출할 수 있게 됐 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변화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살려서 다음 세대에게

전수시켜 줄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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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부모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서 그렇습니다. 처음엔 부모님들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한 국에서 가서 자녀들이 잘못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데 요즘은 SNS를 통해서 자녀들의 교육 받는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줍니다. 학교에서 수업하는 것, 과외 활동하는 것들까지도 모 두요. 더구나 방학 때 학생들이 자기 집에 돌아가서 한국에서의 생 활을 들려주다보니 긍정적인 소문이 나게 되었고, 이러다 보니 경쟁 률도 점차 올라가게 되었고 이점이 한국어를 공부하는 계기가 된 것 입니다.

다만 확대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카자흐스탄 의 입장에서는 한국에 인력을 빼앗기는 것이 되니까요. 특히 아이들 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있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미국 에 유학갔던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기여했던 것처럼 고려인 청소 년들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태오 : 고려인들도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현지에 그 들을 위해서 한국식 교육이 가능한 한인 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방법 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는 한글학교와 한국국제학교 등을 설립해서 운영하는 방안이 있을 것 같 은데, 어떠한가요?

체계적인 한글교육 필요하지만 학교 운영에 많은 어려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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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 해외에 한글학교 설립시 규정상으로 현지에서 50%의 투 자가 이루어져야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 드렸던 것처럼 아직까지 고려인들에게 언어교육의 우선순위가 러시아 어, 영어, 카자흐어, 그리고 한국어입니다. 삶의 터전이 러시아어권이 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아직은 한글학교에 투자하는 만큼의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어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리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고요. 카자흐스탄의 면적은 한반 도 전체 면적의 12배 정도로 넓고, 반면 고려인들은 곳곳에 흩어져 살 고 있습니다. 한글학교를 큰 도시나 고려인 집중 거주지역에 설립해야 하는데, 1~2개 도시에 설립된 한글학교를 가기 위해 몇 시간씩 비행 기나 기차를 타고 와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50%의 현지 투자

주 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은 한국어 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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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를 찾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김게르만 : 한글학교는 1차적으로는 한글을 가르치고 있지만 한글 과 함께 한국의 지리, 역사와 전통을 가르치게 될 텐데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한국어만으로 역사, 지리, 수학 등 등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이른바 한국학교가 있어야 고려인 학생들이 한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좀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서 많이 아쉽습니다.

이재완 : 지난 2014년에 박근혜 대통령님께서 카자흐스탄을 방문 했을 때 건의 드렸던 것 중에 하나가 한글학교 설립이었습니다. 고려 인사회에서 먼저 움직이면 중앙아시아협의회에서도 도울 수 있겠다 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도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 다.

대신 한국교육원이나 대학의 한국어학과 등을 지원하는 일을 추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육원이나 대학의 한국어학과를 지원하는 것은 고려인들의 한글교육이라는 원래 취지에는 맞지 않습니다. 한국교육 원의 학생은 10명 중에 8-7명이 현지인이고 고려인은 2-3명 정도밖

고려인뿐만 아니라 한국어나 한국 문화에 대해서 관심

있는 현지인도 한국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교육 시스템

을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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