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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내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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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1년 국내학술회의

- 중국 공산당 100년의 변화와 한중관계 -

2021

7

1

일(목)

09:30-18:00

외교타운 12층 KNDA홀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중국연구센터 유튜브 실시간 라이브

회의형식 일 시 장 소 주 최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중국연구센터

(2)

프로그램

시 간 내 용

개회식 9:30~10:00 개 회 사: 오영주 외교안보연구소장

[제1회의] 정치, 사회·문화

10:00~12:00

사 회: 전재만 前 중국연구센터 고문 [정치]

- 발 표: 이남주 교수(성공회대) - 토 론: 안치영 교수(인천대) [사회·문화]

- 발 표: 장영석 교수(성공회대) - 토 론: 조문영 교수(연세대) 12:00~13:00 오찬

[제2회의] 외교 · 안보

13:00~14:30

사 회: 김한권 중국연구센터 책임교수 [외교]

- 발 표: 이동률 교수(동덕여대) - 토 론: 최우선 교수(국립외교원) [군사٠안보]

- 발 표: 양정학 교수(육군사관학교) - 토 론: 김태호 교수(한림대) 14:30~14:40 휴식

[제3회의] 경제 14:40~16:00

사 회: 최진백 중국연구센터 연구교수 - 발 표: 이현태 교수(인천대)

- 토 론: 왕윤종 교수(동덕여대) 16:00~16:20 휴식

발표 및 토론: 한국외교 및 한중관계에 대한 함의와 제언

16:20~17:50

사 회: 오영주 외교안보연구소장

- 발 표: 신정승 前 주중대사 이용준 前 외교차관보 김재철 교수(가톨릭대) 김시중 교수(서강대) - 질의응답

17:50~18:00 폐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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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 제1회의 ] 정치, 사회 ・ 문화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화와 한중관계 _ 정치 ···3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중국공산당의 사회 “동원·개조·관리”의 정치 ···16 장영석 (성공회대 교수)

[ 제2회의 ] 외교 ・ 안보

중국 외교목표, 담론, 국제체제의 인식과 전략의 진화와 지속 ···41 이동률 (동덕여대 교수)

중국 공산당 100년의 변화와 한중관계 - 군사안보 분야를 중심으로 - ···55 양정학 (육군사관학교 교수)

[ 제3회의 ] 경제

중국공산당 100년, 경제 분야 평가와 전망 ···69 이현태 (인천대 교수)

[ 제3회의 ] 경제

중국공산당 100주년과 한중관계 ···99 신정승 (前 주중대사)

미·중 대결시대 한국 외교의 선택 ···102 이용준 (前 외교차관보)

미중경쟁과 한국의 외교정책 ···105 김재철 (가톨릭대 교수)

“중국경제 발전 과정의 회고와 한중 경제협력의 진단과 평가” ···107 김시중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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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의]

정치, 사회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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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지난 100년 간 중국정치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변수는 중국공산당의 지위와 노선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지위와 노선의 변화는 다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독립적 혁명당에서 집권당(執政黨)으로의 변화이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중국혁명이 성공에 이르는 과정인데 그 결과 중국공산당이 중국정치에서 점하는 지위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둘째, 중국공산당이 집권당으로서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한 시기이다. 집권당으로서 의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사회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혁명당(노동계급의 선봉대)으로 서의 성격도 계속 갖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혁명당과 집권당이라는 두 가지 다른 성격 에서 도출되는 과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새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계급의 소멸이라는 사회주의 이상의 실현과 국가의 발전과 현대화라는 두 목표 사이의 길항작용이 중국정치의 역동성을 만들어내었다. 개혁개방노선의 추진과 함께 현대화가 국가와 당 사업의 중점이 되었고, 이 노선에 따라 중국의 부상이 빠르게 진행 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중국공산당에게 새로운 딜레마를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 의의 방향성이 약화되어갔는데 이는 중국공산당의 통치정당성도 약화시켰다.

셋째, 현재 진행 중인 단계로 중국공산당은 집권당이자 혁명당이라는 두 가지 다른 성격 사이의 새로운 균형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중국공산당의 통치정당성을 강화해가고 있다. 이는 중국정치와 중국정치 내에서 중국공산당의 역할에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 고 있다.

이 글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의 역할을 중심으로 중국정치 의 변화를 개괄하고, 위의 셋째 단계에 해당되는 중국정치의 변화추세와 그것이 한중관 계에 주는 함의를 정리할 것이다.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화와 한중관계 _ 정치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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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주적 혁명당에서 성장과 중국혁명

1949년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것은 중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로써 1921년 7월 1일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집권당의 지위를 확보 하고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해 근대국가의 건설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혁명당에서 집권당으로 지위가 변화하는 과정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작용하 고 있는 중국정치의 원형질과 같은 요소들이 만들어진 과정이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중국공산당 자신이 발전시킨 지도사상이다. 중국공산당의 창당 과 발전에는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 당연히 맑스레닌주 의가 중국공산당의 지도이념이 되었고,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에는 스탈린노선이 중국공산당의 노선과 전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과 코민테른의 중국공산당 에 대한 개입은 초기에는 주로 정치고문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1931년 1월 중국공산당 6기 4중전회에서 스탈린이 파견한 파벨 미프의 주도하에 소련에서 교육을 받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 중앙의 지도부를 장악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잘 알려진 것 처럼 마오저둥(毛澤東)은 이들과 치열한 노선투쟁을 거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자가 되 었고, 이 과정에 중국공산당도 자주적 혁명당으로 성장했다.

이들 사이의 가장 중요한 노선투쟁이자 권력투쟁은 1937~1938년 사이에 진행되었 다. 이는 미프에 의해 1931년 중국공산당 6기 4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이하 중전회) 에서 사실상의 당내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으로 갔던 왕밍(王 明)이, 중일전쟁 발발 직후 중국으로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왕밍은 중국공산당이 항 일통일전선의 강화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민당과의 항일통일전선에 서 중국공산당을 대표하는 역할을 통해 중국공산당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중 국공산당도 항일을 위한 투쟁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은 스탈린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러 나 마오저둥은 중국공산당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항일전쟁에서도 홍군의 역량을 보존하 고 확대할 수 있는 유격전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실주의적 정치가인 스 탈린은 결국 마오저둥의 정치군사적 역량과 중국공산당 내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를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인정을 배경으로 마오저둥은 연안 정풍운동을 통해 중국공산당 내의 군사, 정치, 사상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 1) 스탈린과 중국공산당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참고. 杨奎松, 『毛泽东与莫斯科的恩恩怨怨』,

江西人民出版社, 2008年; 李玉贞, 『国民党与共产国际(1919-1927)』, 人民出版社, 201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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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945년 4~6월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이하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장에서 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중국혁명의 실천을 통일”한 것으로 마오저둥사상을 정의 했고, 이를 당의 일체 사업의 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했다. 마오저둥사상이 중국공산당 의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것은 중국공산당이 자주적 정당이 되었음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이론을 자신의 실정에 맞게 운영할 수 있는 능력도 보여주었다. 이는 이후 여러 문제들에 직면하면서도 중국공산당 이 높은 수준의 적응력과 생명력을 보여줄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2)

이를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가 신민주주의론이다. 중국공산당은 중국혁명 과정에 서 사회주의가 아니라 신민주주의를 정치 목표로 제시했다. 이는 중국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이 혁명을 자산계급이 아니라 무산계급, 무산계급의 선봉대 인 중국공산당이 영도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신민주주의는 자본가 계급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자본가 계급의 경제활동을 허용하는 체제이다. 토지문 제와 관련해서도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민들의 균등한 토지소유를 보장한다는 강 령을 내세웠다. 혁명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에도 이 방침에 따라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경험, 즉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사적 소유와 시장 메커니즘을 인정했던 경험은 개혁개방과 함께 시장화 개혁을 추진하는 데 대한 이념적 저항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최종적 승리로 이르는 동안 집권당으로서의 경험을 축적하고 그에 부합하는 권력체계도 구축해갔다. 중국공산당은 항일을 위한 국공합작을 위해 장 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를 중앙정부를 승인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독자적인 권력체계를 갖추고 독립적으로 경제와 사회를 관리했다. 여기서 중 요한 것은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정치제도를 구축해갔다는 점이다. 1945년 제7차 당 대회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기초해 이때 만들어 진 조직구조와 회의체계가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공 산당이 행정, 경제관리 등의 정부업무를 지도하는 체계도 구축해갔다. 물론 이로써 문 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당과 정부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중국정치에서 이론적으로 나 실천적으로나 해결이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

2) 중국 공산당의 적응력 문제에 대한 논의는 개혁개방 시기 중국공산당의 적응력과 그 한계를 검토한 David Shambaugh, China’s Communist Party: Atrophy and Adaptation, 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2008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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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혁명당과 집권당 사이의 딜레마

개혁개방노선이 추진되기 이전에 중국공산당과 중국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많은 곡절을 겪었다. 이는 주로 집권당으로서의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결정과 연관된 변화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계급의 소멸이라는 사회 주의 이상의 추구와 현대화라는 두 목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있었다.

건국 초기 이 문제는 신민주주의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리우샤오치(劉少奇) 등 주요 지도부들은 건국 전에 제시한 것처럼 먼저 신민주주의체제하에서 공업화를 실현하고 이를 기초로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마오저둥은 점차 사 회주의로의 이행을 뒤로 미룰 필요가 없다고 인식했고 결국 과도기총노선을 발표하고 1953년부터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 공상업 3대 부문 소유제의 사회주의 개조를 추진 했다. 그리고 1956년 3개 개조가 완수된 이후 개최된 중국공산당 8차 당대회에서 중국 사회의 주요모순은 “선진적 사회주의제도와 낙후된 사회생산력 사이의 모순이다”라고 규정하고 당과 전국 인민의 당면 주요 임무는 “역량을 집중해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 우리나라를 가능한 빨리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선진적 공업국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오저둥은 사회성격과 중국공산당의 주요 임무에 대한 이러 한 규정에 불만을 가졌고, 다시 사회주의에서도 계급투쟁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마오저둥은 사회주의적 이념의 실현과 현대화가 상충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 았다. 오히려 계급투쟁이나 급진적 사회주의 모델이 현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제건설을 추진했던 것이 대약진운동이었다. 그러나 대약 진운동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면서 이 두 가지 사이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점 이 분명해졌고, 마오저둥은 현대화 목표보다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이념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접근법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가장 극단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시기 중국의 정치구조도 큰 변동을 겪었다. 첫째, 반우파투쟁을 거치면서 비공산 당 정파와 인사들이 행정부의 지도적 지위에서 축출되었고 신민주주의의 정치강령으로 제시되었던 연합정부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의 권력독점이 더 확고해진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적 정치역량이 완전 히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중국공산당 내에서 노선투쟁이 격화되면서 정치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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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안정성이 큰 위협을 받았다. 절차적 정당성은 의미가 없게 되었고, 마오저둥의 최고 지시가 노선과 정책을 좌우했다. 셋째, 엘리트정치에서는 권력계승 문제와 관련해 실패 가 반복되었다. 까오강(高崗) 사건, 문혁과 리우샤오치 비판, 린뱌오(林彪)사건, 그리고 문혁 후기 덩샤오핑(鄧小平) 비판 등이 모두 이와 연관된 중요 정치 사건들이다. 마오저 둥은 무색무취한 화궈펑(華國鋒)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지만, 실력자들 사이의 또 다른 권력투쟁은 필연적이었다. 이 권력투쟁은 승리자가 덩샤오핑이었다.

새로 실권을 장악한 세력들은 문화대혁명까지 사회주의 건설에 어려움을 조성한 주요 원인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노선의 잘못이다.

둘째, 당과 개인으로의 과도한 권력집중이다.

노선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국공산당은 기본적으로 8차 당대회의 노선으로 돌아갔다.

당 원로파는 8차 당대회를 개혁개방 이전 시기에서 중국공산당의 명망이 가장 높고, 당의 운영이 가장 건강하고, 가장 올바른 노선을 가졌던 시기로 인식했다. 개혁개방 노선도 공식적으로는 당과 국가 사업의 중점을 계급투쟁에서 경제건설로 이전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8차 당대회의 기조와 일치한다. 물론 경제건설의 방법에서는 8차 당대회의 인식을 크게 넘어섰다. 1992년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이 경제개혁의 목표 모델로 제시되었다. 일부에서는 중국이 사회주의 이전 단 계의 신민주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으나, 중국공산당은 중국이 사회주 의 단계로 진입했다는 역사적 진전을 되돌릴 수 없으며 이를 전제로 직면한 문제, 특히 낙후된 생산력 문제를 해결해가야 한다고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제시된 이론이 사회주의초급단계론이다. 1990년대까지 시장화 개혁이 진전됨에 따라 중국에 서 사회주의 이념이 형해화되고 사회주의가 더 이상 중국공산당과 중국의 변화를 설명 하는데 유용하지 않은 개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도 했지만, 중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 공산당의 이러한 입장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둘째 중국정치의 제도적 결함에 대한 인식도 개혁개방 이후 중국정치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공산당은 당과 개인으로의 과도한 권력집중 방지하고 인치의 폐단 을 해결하기 위해 집단지도체제 구축과 정치과정의 제도화를 추진했다.

집단지도체제 구축을 위해 중국공산당 주석직을 폐지하고 총서기가 중국공산당을 대 표하게 되었다. 총서기를 포함한 모든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의결과정에서 동등한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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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갖고 분공에 입각해 각자의 권한을 배분받았다. 원칙적으로 총서기는 최고지도부 내 에서 다른 지위가 아니라 다른 기능을 갖는 직위이다.

제도화는 다층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당과 국가의 주요 회의들이 법과 규정에 따라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이는 정치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도화와 관련해 더 중요한 문제는 권력계승과 당의 영도 방식의 개선이었다.

중국 정치체제의 특성으로 인해 권력계승 문제를 제도화를 통해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대신 중국공산당은 최고지도부 내의 권력관계의 급격한 변동을 방지하는 방식 으로 권력계승 문제를 관리해갔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주요 선출직의 임 기제 및 연임 제한, 직급별 연령제한 등과 관련한 법과 규정이었다. 이에 따라 최고지도 자 선출과 퇴임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아졌다. 연령, 직위 등을 조건을 검토하면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는 크게 줄어들고, 일정한 시점에서는 누가 최고지도 자가 될 수 있는지를 사전에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이 과정 중 갑작스 러운 변동이 발생해 정치안정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도록 했다. 장쩌민(江澤民)에서 후진타오(胡錦濤), 후진타오에서 시진핑(習近平)으로의 권력계승이 이러한 과정으로 진 행되었다. 다만 이 과정은 법적 절차가 아니라 최고지도부 내의 커센서스에 기초해 이 루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당의 영도 문제도 중국정치의 난제이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공산당과 덩샤오핑은 “당 정분리(黨政分開)”라는 방침을 제기했다. 당정분리는 전반적으로 국가정책의 집행 효율 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경제정책에서 문화대혁명 시기의 “정치 우선주의(政 治挂帅)”나 “이데올로기 우선주의(意识形态挂帅)”와 같은 방침이 경제정책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인식 아래 경제관리에서 행정부문의 전문성과 권 한을 존중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방침은 당의 영도 원칙과 상충하는 면도 있었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문혁 때까지 당이 국가사업에 과도하게 개입한 것이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사업의 중점을 경제발전 사업으로 이전하는 데 당정분리라는 방침은 효 용이 있었다. 그러나 당의 영도라는 중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당정분리라는 방침에 의해 모호해지는 문제는 피하기 어려웠고, 1989년의 정치위기를 겪고 소련 및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에는 당정분리를 정치개혁의 방향으로 내세우지 않 았다. 그렇다고 당정분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방침이 제기되지 않았다. 결국 당의 영도 문제는 여전히 중국정치에서 가장 설명이 어려운 문제로 남겨지게 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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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중국정치에서 진행된 변화는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 을 했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중국정치의 근본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당시 요구되는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실용적 조정이었다. 정치과정의 제도화에 진전이 있었 지만, 그 범위에는 제한이 있었다. 이 범위를 넘어서면 불확실성의 공간이 존재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공산당은 이 불확실성과 관련한 논란이 현대화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데 교란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이 문제를 봉쇄하는 데 주력했다. 중국의 외부에서는 시장경제의 확장에 따라 이 불확실성의 공간에서도 서구에서 발전해온 정치적 가치와 규범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시진핑 체제가 출범한 이후 중국의 정치상황은 이러한 기대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다.

4. 시진핑체제에서 중국정치의 변화

시진핑체제는 매우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서 출범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중국이 경제 적으로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세계에 대한 영향력도 크게 증가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중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와 관련한 혼란이 커지고 있었 다. 중국은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하나는 계층간·지역간 소득격차의 증가이 고 다른 하나는 성장동력의 약화에 따른 경제성장률의 하락이었다. 전자는 중국공산당 의 통치정당성에, 후자는 중국공산당의 통치능력에 위협이 되는 문제이었다. 전자의 문 제는 좌파들의 개혁개방노선에 대한 문제제기를 강화시켰고 소위 “총칭모델”의 출현이 이들이 중국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4) 후자의 문제 는 더 급진적 경제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증가시켰다. 그런데 이들이 주장한 국유기 업과 농촌토지 소유제 개혁은 중국 경제체제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변질시키는 것을 의 미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경제개혁 관련 논의의 이념적 성격이 뚜렷해졌다. 뿐만 아 니라 “08헌장 운동” 등 정치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흐름도 등장하고 있었다. 모두 개혁개방 시기 중국공산당의 기본노선에 대한 도전으로 중국공산당의 이념적·정치적 지도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3) 중국공산당의 성격과 관련해 논란은 해소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2001년 삼개대표론이 공식적으로 제출되는 것과 함께 당시 국무원 체제개혁위원회 부주임 판웨(潘岳)은 중국공산당이 혁명당에서 집권당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 입각한 정치개혁 방안(对革命党向执政党转变的思考)을 제출 해 논란을 초래한 바 있다.

4) 긍정하는 입장에서 총칭모델을 개괄적 정리한 자료로는 苏伟·杨帆·刘士文, 『重庆模式』, 中国经济 出版社出, 201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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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들은 한때 시진핑체제에서 더 적극적인 개혁이 추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를 갖기도 했다. 보시라이(薄熙來)의 체포와 함께 총칭모델도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 이러한 기대를 키웠다. 그리고 업적 정당성에 의존하는 중국공산당이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필요한 경제개혁을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5) 그러나 시진핑체제의 출범과 함께 상황은 이 기대와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반부패 투쟁, 집단지도체제 내의 분공의 변화 등으로 시진핑 개인으로 권력집중이 강화되었다.

이와 함께 이념통제도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 중국공산당은 자유주의적 개혁 주장을 허 용하지 않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중국공산당으로서는 경제개혁을 더 급진적 방향 으로 진전시키는 것은 사실상 사회주의 노선의 부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이 당의 영도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는 것도 허 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6) 시진핑체제 초기의 권력구도의 변화를 개인의 권력욕이나 권 력투쟁 각도에서 해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중국공산당 내의 반발이 거의 없었다 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 즉 중국공산당의 정치·이념적 지도력 강화에 대해서 적어도 당 내에서는 높은 수준의 공감대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제도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의 문제도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진핑으로의 권력집중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진핑 체제가 제시한 해결방안은 중국공산당 영도체제를 더 강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공산당 제18기 동안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2013년 10월 중공 제18기 3중전회에서는 “개혁 전면 심화의 몇몇 중대문제들에 관한 결정(關於全面深化改革若幹重大問題的決定)”을 통과시켰는데 여기서 “중국특색사회 주의제도를 완전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것이고 국가거버넌스체계와 거버넌스 능력을 현대화 하는 것”을 개혁 전면 심화의 목표를 제시했다. 개혁이 경제개혁이라는 범주를 넘어 중 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10월 4중전회에서 통과된 “의법치국 전면적 추진의 몇몇 중대문제에 관한 결정(關於全面推進依法治國若幹重大問題的決定)”

5) 국무원발전연구중심 연구원 우징롄(吴敬琏)은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를 전후로 여러 차례 ‘탑- 다운’ 식의 경제개혁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 할 것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바 있다. 다음을 참고. 吴敬琏, 「“重启”改革要重视顶层设计」, 经济观 察網(2021. 12.21), http://www.eeo.com.cn/2012/1221/237756.shtml

6) 이러한 입장은 2019년 4월 1일자로 『치우스』(求是)에 실린 시진핑의 2013년 1월 5일 신임 중앙 위원(후보위원) 학습반에서 한 연설(“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견지 및 발전시키는 몇 가지 문제에 대 하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내용에 대한 분석은 조영남, 「2019년 중국 정치의 현황과 전망」, 국립외교원 중국연구센터 편, 『2019년 중국정세보고』, 국립외교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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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사회주의법치는 반드시 당 영도를 견지해야 하며, 당 영도는 반드시 사회주의법치 에 의거해야 한다. 당 영도 하에서만 의법치국, 법치의 엄격한 실시, 인민을 주인으로 등의 방침이 충분히 실행될 수 있다”고 중국공산당 영도의 법적 정당성 강조했다.

그리고 2016년 10월 6중전회는 당이 지도체제는 물론이고 당의 정치적 역할과 관련 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신형세하 당내정치생활에 관한 몇몇 준칙”(關於新形 勢下黨內政治生活的若幹准則)과 “중국공산당당내감독조례”(中國共產黨黨內監督條例)를 통과시켰다. 당의 정치적 역할과 관련해서는 주목할 내용은 중앙위원회 공보문 등에서

“엄격한 당 다스리기”(從嚴治黨)를 강조한 점이다. 이 공보문은 “중국의 일을 잘 하는 데 관건은 당에, 당이 당을 관리하고(黨要管黨), 엄격하게 당을 다스리는(從嚴治黨)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당의 영도를 강화하는 데 핵심적 문제이다. 당의 영도 강화가 중국을 올바른 길, 즉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당의 선진성과 순결성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위의 공보문은 당의 정치생활 에 강화를 위해 “당의 자기정화, 자기개선, 자기혁신, 자기제고 능력을 강화하는 데 힘 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017년 “양회” 기간 중 왕치산이 베이징대표단 심의에 참석해 “당의 영도하에서 당정분공만 있을 뿐이며 당정분리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해 기치를 선명히 하고 당당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은 중국공산당이 당의 영도와 관련해 개혁개방 초기과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약하자면 중국공산당은 “당의 자기정화와 통치능력 강화 – 중국공산당 영도의 강 화 – 중국의 사회주의적 방향의 견지와 발전”이라는 구도를 중국정치 발전의 방향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구도를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작업이 중공공산당 19기 2차와 3차 중전회, 그리고 전국인민대표대회 13기 1차 전체회의에서 진행되었다. 중공의 건 의에 따라 수정된 헌법 제1조 제2항에 “중국공산당의 영도는 중국특색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는 내용이 삽입되었다. 3차 중전회에서 통과된 “당과 국가기구 개 혁 심화 방안(深化黨和國家機構改革方案)”은 중국공산당이 일부 정부사업을 직접 관장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 방안에서 따라 국무원 기구개혁 등이 진행되었다.7) 이 방안이 논의된 중공 제19기 3중전회에서 시진핑은 “당정관계를 잘 처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의 영도를 강화해야 하고, 이 전제하에서 비로소 각자의 분공이 존재한다. 어떻 게 분공하든지 출발점과 귀착점은 당의 영도를 견지하고 강화하는 것이다”라고 당정관

7) 기구개혁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조영남, 「2018년 중국 정치의 현황과 전망」, 국립외교원 중국 연구센터 편, 『2019년 중국정세보고』, 국립외교원, 2019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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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를 해설했다. 그리고 위의 기구개혁의 주안점이 “당이 모든(一切) 공작에 대한 영도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를 설계하고 배치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8) 이러한 방침이 당정합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당의 정부 사업에 대한 영도 강화가 사실상 당이 정부 사업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출현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떻든 중국 정치체제와 관련해 다소 모호하게 처리되었던 문제가 법적으로나 정치 적으로 명확하게 정리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가 문제의 해결인지, 문제의 악화인 지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현재 지구적 차원이나 중국이 직면한 중대 문제를 해결하 는 데 중국의 체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한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중국경제의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효율적 운영,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억제에서 국가의 역할 등이 그러 한 사례에 속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위해 탄소배출감축에 적극적 나서는 데 있 어서도 중국공산당과 국가의 주도적 역할이 있었다. 그러나 규범적 차원에서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중국의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당의 자기 정화와 혁신 능력에 의존하는 정치체제의 지속가능성이다.

이는 최고지도부의 의지나 구호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중국정치의 미래는 점점 더 당의 자기 정화와 혁신 능력에 더 의존하게 되어가고 있다.9)

중국공산당이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극복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연안정풍운동을 기초로 중국혁명을 성공시켰다. 최근 중국공산당이 정풍운동을 강조하는 것도 그러한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접근법이다. “중앙8항규정”(中央八項規定, 2012년 12월 중앙정 치국에서 통과된 十八屆中央政治局關於改進工作作風、密切聯系群眾的八項規定의 약칭)의 제정과 이에 따른 당내 정돈, 군중노선교육실천활동(群眾路線教育實踐活動), 삼언삼실 (三嚴三實, 수신·권력사용·자기규제의 엄격함, 일도모·사업·사람됨의 견실함), “사풍”(四 風, 형식주의, 관료주의, 향락주의, 사치 등의 당내의 부정적 풍조를 의미. 2013년 6월 군중노선교육실천운동 공작회의에서 시진핑이 지적한 문제점) 반대 등이 이와 관련한 주요 움직임이었다.

8) 《切实把思想统一到党的十九届三中全会精神上来》, 中共中央党史和文献研究院编辑, 《十九大以来重 要文献选编》上册, 2019年.

9) 이와 관련해 최근 중국공산당의 자기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과거 혁명당에서 집권당으로의 전환 이라는 주장을 비판하는 글도 주목할 만하다. 张志明, 「为什么说我党 “从革命党向执政党转变”

的说法是错误的?」, 『学习时报』 2019年11月18日, http://www.qstheory.cn/llwx/2019-11/18/

c_112524386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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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풍운동이 사풍과 같은 부정적 풍조를 발생시키는 원인에 대한 해결책이 되 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부분 과도한 권력독점, 당으로, 그리고 당내의 상층으로 의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건국 이후 마오저둥은 여러 방식의 정풍 운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으나 실패를 반복했다.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될 사상적, 실천적 자원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무엇 보다 큰 어려움은 중국공산당의 규모에서 비롯된다. 연안정풍운동 직후 7차 당대회 때 중국공산당 당원 수는 121만 명이었는데, 2017년 19차 당대회 때 중국공산당 당원 수는 8,900만 명에 달했다. 이러한 규모의 조직이 정풍과 같은 방식으로 당의 선진성 과 순결성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앞으로 상당 기간 중국공산당이 지 금의 방침을 변경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방침이 갖는 한계가 뚜렷하지만 미중 전략경쟁 강화 등의 외부환경은 중국 내에서 중국공산당의 권력집중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는 측면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중국공산당은 인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유 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면도 중국 정치체제가 상당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사회주의 이상의 강조가 중국정치에 미칠 영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선 중국공산당의 통치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크다. 사회주의는 중국공산당 이 영도하는 지위를 합리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렇지만 이는 중국공산당에 게 도전적 요인도 있다. 우선 소득격차 등의 불평등 현상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보 다 통치정당성에 더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개혁개방 이후 파이를 키우기 위 해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논리(선부론)로 이를 정당화시켰지만, 이러한 정당화는 더 어 려워질 것이다. 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도 중국공산당은 주요 모순을 “인민들의 아름다 운(美好) 생활에 대한 증가하는 요구와 불평등·〮불충분한 발전 사이의 모순”라고 설명하 며 불평등과 불균형 문제의 해결을 인민의 삶의 질 제고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어떤 결과를 내는가가 중국공산당과 중국정치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중국정치의 미래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중요한 변수는 권력계승 문제이다. 시진핑체제 가 출범한 이후 안정적 권력계승을 위해 형성된 관례들이 부정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10년 단위로 최고지도부 교체를 중심으로 권력계승이 이루어지는 사이클이 사실상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기존 관례를 따르면 2017년 중공 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에 차기 총서기 후보자를 포함시켜야 하지만 현재 정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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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위원에서 차기 총서기 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주석의 삼선을 금하는 헌법 조항 을 수정한 점도 시진핑이 최소한 1기 더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이고 있다. 이에 따라 최고지도부 내에서도 시진핑으로의 권력집중이 더 강화되고 있다.10)

중국공산당이 2022년에 예정된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차기 총서기 후보를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하는 것을 통해 권력계승의 기존 관례를 복원할 수는 있겠지만, 향후 권력계승 사이클과 후계 구도의 형태 모두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중국정치에서 권력계승의 제도화가 낮은 데서 비롯된 문제이다. 후계자의 선출은 최고지도부 내의 비공식적 컨센서스 형성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져왔다. 이러한 과정은 항상 권력갈등을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후계자 선출의 예측가능 성이 더 낮아진 상황에서 정책적 실패로 현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될 경우 중국정 치가 매우 큰 혼란에 빠져들 수 있다.

5. 한중관계에 대한 함의

중국정치의 변화의 한중관계에 대한 영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이념·제도의 차이가 한중관계에 미치는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정치 메커니즘 이 한중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다. 두 측면 모두 질적 변화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에도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주장했고, 당 영도의 원칙도 견지해왔다. 그렇 지만 최근의 변화가 한중관계에 새로운 도전 요인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최근까지 이념·제도 차이가 줄어들거나 중국과의 관계에 큰 변수 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나 전망에 입각해 한중관계의 미래를 구상했다면, 앞으로는 이것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한중관계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우 선 이 문제가 직접적으로 한중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겠지만, 미중관계 등에서 주요 의제로 부상함에 따라 한국의 대중국관계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즉 적어도 현재 중국공산당이 견지하는 방침 속에는 서구에서 만들어진 10) 이것이 집단지도체제를 부정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더 논의가 필요하다. 집단지도체제가 여전히 유용하다는 평가가 더 지배적이지만, 시진핑이 지도부를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과 기능적 측면에서의 차이만이 아니라, 지위에서도 차이를 갖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이남주·문익준·안치영·유동원·장윤미, 중국 국가전략의 변화와 한중관계에 대한 함의, 대외경제 정책연구원, 2020, pp.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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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에 기초한 민주주의 모델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과 서구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념·제도 갈등이 다시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 은 이러한 변화의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념·제도의 차이가 한중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며 대응할 필요가 있지만, 단순히 이념·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보편적 합의에 위배되는 방식의 행위에 대한 대응이 불가피해지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와 관련해서도 독자적으로나 특정 국가의 독자적 행동에 편승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상대 국가의 이념·제도를 문제 삼지는 않지만 국제규범의 준수라 는 원칙을 견지하며 구체적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중국정치에서 중국공산당이 제반 정부업무에 대한 영향력이 증가하고 최고지도 자로의 권한이 더 집중되는 상황 속에서 정상외교의 중요성이 더 커질 것이다. 한국의 선거 주기는 정상 간 신뢰를 구축하는 데 다소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른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 우선 적절한 시점에서 한중관계의 장기 비전에 대한 한중 사이의 공감대를 확대시켜 한중관계의 연속성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 다. 그리고 중국과의 민간교류에서 이념·제도적 차이가 초래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사전 점검도 필요하다. 이는 중국의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중국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더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준비작업의 의미도 있다.

중국의 부상이 국제질서에 미치는 영향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데 중국, 그리고 중국 과 세계의 관계의 미래는 중국 내부가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중국이 창당 100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중국공산당의 세계를 보는 시각, 발전 전략 등에서 중요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대한 지속적 관찰과 그것이 세계와 한중관계에 주는 함의를 도출하기 위한 노력이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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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1921년 100명이 채 안 되는 당원으로 출발했던 중국공산당은 100년이 지난 지금 9천1백여만 명의 당원을 두고 있는 거대한 집권 정당으로 변모해 있다. 이 100년 동안 중국공산당은 중국을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분할·점령의 대상이 되었던 “반식민지 반봉 건 국가”에서 독립적인 주권을 행사하면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G2”로 평가받는 국가로 변모시켜 놓았다. 지난 100년 동안 중국의 당·국가가 비약적으로 성장·발전하 는 동안 과연 중국의 사회도 그에 상응할 정도로 성장·발전했는가?

그런데 당·국가의 성장·발전은 당원의 수와 국력을 통해서 가늠해볼 수 있지만, 사회 의 성장·발전은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는가? 중국 사회의 성장·발전을 파악하기 위해 서는 무엇보다 중국적 맥락, 즉 중국 당국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의 성장·발전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 그에 대해 해석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래는 지난 2020년 8월 24일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 주석이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제14차 5개년 계획(2021-2025년)”의 제정을 앞두고 경제·사회 영역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좌담회를 가졌는데, 그때 그가 강조한 것이다.

“공건(共建)·공치(共治)·공향(共享)으로써 사회발전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야 합니다.

더욱 충분하고 질 좋은 취업을 실현하고, 전면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보장체계를 완비 하며, 공공위생과 질병 통제를 강화하고, 인구의 장기적인 균형 발전을 촉진하며, 사회 거버넌스(社會治理) 제도를 강화하고, 사회 모순을 해소하며, 사회 안정을 유지해야 합 니다. 공건(共建)·공치(共治)·공향(共享)의 사회 거버넌스 제도를 완비하고, 기층사회의 거버넌스를 강화·혁신하며, 사회의 공평과 정의를 더욱 중시하고, 사람의 전면적 발전 과 사회의 전면적 진보를 촉진해야 합니다.”2)

* 성공회대학교 인문융합자율학부 중국학전공 교수

1) 이 글은 성균중국연구소가 발행하는 <<중국사회과학논총>> 2021년 제3권 제1호에 게재된 논문과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천>>(공저, 2021년 7월 이전 출간 예정)에 게재될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사회 “동원・개조・관리”의 정치

1)

장영석*(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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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언급에서는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는 항목(취업, 사회보장체계, 공공위생과 질병 통제, 인구의 장기적 발전), 사회를 발전시키는 방법(공건·공치·공향의 사회 거버넌스 제도),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사회의 공평과 정의, 사람의 전면적 발전과 사회의 전면적 진보)이 제시되어 있다.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는 항목의 구성 요소는 사회의 발 전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는 가변적 과제이고,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은 인류 사회가 장기적으로 추구하고 달성해야 할 항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이 가변적인 과제와 항구적인 과제를 실현해나가는 방법, 즉 “공건(共建)·공치(共治)·공향 (共享)의 사회 거버넌스(社會治理)”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공건(共建)·공치(共治)·공향(共享)”은 말 그대로 “함께 건설하고, 함께 다스리며, 함께 향유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누구와 누가 공건(共建)·공치 (共治)·공향(共享)하는 사회 거버넌스인가 하는 점이다. 중국공산당과 사회, 중국 국가 와 사회가 공건(共建)·공치(共治)·공향(共享)하는 사회 거버넌스를 말하는 것이 자명하지 만, “사회”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중국공 산당과 국가에 ‘포섭되는 사회’와 ‘포섭되지 않는 사회’, 중국공산당과 국가가 형성하고 자 하는 사회와 중국공산당과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사회를 상정해 보면, “공건(共建)·공 치(共治)·공향(共享)하는 사회 거버넌스”의 내용은 대단히 복잡해진다.

필자는 중국공산당 창당부터 지금까지 당·국가와 사회의 역동적인 관계를 “공건(共 建)·공치(共治)·공향(共享)하는 사회 거버넌스”라는 기준을 통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분석 대상이 되는 100년의 시기는 크게 혁명기, 건설기, 개혁·개방기로 나누어진다. 지 난 10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중국공산당이 사회를 대면하면서 역점을 두었던 지점은 시기별로 다르다. 혁명기 때에는 혁명의 수요에 맞추어 사회의 역량을 동원하는 데, 건설기에는 건설의 수요에 맞추어 사회를 개조하는 데, 개혁·개방기에는 정치적 안 정을 위해 사회를 관리하는 데 역점을 두어 왔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사회 동원·개조·관리는 중국공산당의 의지가 일방적으로 사회 에 관철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 사회 역시 다른 모든 국가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국가 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능동적인 존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공산당의 사회 동원·개조·관리의 과정은 국가와 사회가 함께 엮어내는 정치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 기초하여 중국공산당과 사회의 관계를 시기별로 분석하고, 현재 중 국 사회의 발전과 관련하여 당·국가가 직면한 문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점은 무엇인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人民日報, “習近平主持召開經濟社會領域專家座談會强調: 着眼長遠把握大勢開門問策集思廣益硏究新情 況作出新規劃,” 2020.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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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혁명기, 사회의 형성과 지원

“혁명기”는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후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기간을 말한다. 1921-1949년 동안 중국공산당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중국사회와 관 계를 맺었던 기간은 옌안(延安) 시기, 즉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이 장정(長征)을 거쳐 산시성(陝西省) 북부에 들어가서 근거지를 만들기 시작한 1935년 10월부터 국민당 군 대와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서 황하를 건넜던 1948년 3월까지의 13년이다. 중국공산당 은 국민당보다 열세에 처해 있었고, 중국의 전역을 통치했던 것은 국민당이었으며, 중 국공산당이 마주했던 중국사회는 편벽한 농촌사회였다.

혁명기의 중국공산당·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서술하려면 옌안 시기의 당·국가와 사회 관계를 중점적으로 보아야 하지만, 그 경우 중국의 전체 사회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점을 고려하여 본 장에서는 국민당이 마주했던 중국 사회와 중국공산당이 마주했던 사 회를 구분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우선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던 배경부터 살펴보자.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던 1921 년을 기점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소급하여 나열해 보면 1919년 5.4 신문화운동의 출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료,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1911년 신해혁명, 1898년 무술변법 등을 들 수 있다.

무술변법으로 대표되는 위로부터의 개혁, 신해혁명으로 대표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 이 모두 벽에 부딪힌 가운데 중국의 엘리트는 1차 세계대전(1914-1918년) 기간, 서구 민주국가 내부의 노사갈등과 빈부격차의 심각성을 보았고,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에서는 짜르 황제와 자산계급의 통치가 전복되고 재부가 평균적인 분배되는 것을 보았 다. 무술변법과 신해혁명 전후 중국의 엘리트 사이에서는 “국가” 변혁의 담론이 확산되 었지만, “사회” 변혁의 담론도 움트고 있었다. 1919년 5.4 신문화운동 시기 중국의 엘 리트는 중국의 국가와 사회의 변혁과 새로운 국가와 사회 건설에 필요한 서구의 모든 자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활용했다. “더 선생(德先生, 서구의 민주주의)” “사이 선생 (賽先生, 서구의 과학)” “모 아가씨(莫小姐, 서구의 도덕과 윤리)”가 회자되는 가운데 중 국에서 자생적인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형성되었고, 중국의 전통을 더욱 강조하는 문화적 보수주의자도 나타났다.3)

중국공산당은 중국 지식계에서 국가와 사회 변혁의 담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나 가는 가운데 창당되었다. 중국 지식계에서 확산되고 있던 국가와 사회 변혁의 담론은

3) 楊念群, 《五四的另一面: “社會” 觀念的形成與新型組織的誕生》(上海: 上海人民出版社, 2019),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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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반도가 일본의 점령으로 대체되자 중국의 민중들 사이에서 급격히 고양되었던 민족주의와 결합되면서 대중 속으로 확산되었다.

중국의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해방운동을 제창한 러시아 볼셰비키의 도움도 받았다. 러 시아 10월 혁명 이후 유럽 각국에서 무산계급의 혁명적 열기가 식어가자 레닌은 동방 의 식민지, 반식민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에 관심을 돌렸고, 1922년 코민테른이 중국에 파견한 마링((Maring)은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에 국공합작을 제안했다. 쑨중산(孫中山) 도 소련의 도움으로 국민당을 키우고자 했고, 국공합작이 추진되었다.

국공합작의 결과, 중국공산당의 세력이 크게 확대했다. 1921년 100명도 되지 않던 당원 수는 1924년까지만 하더라도 500명을 넘지 않았으나 1925년 말이 되면 2만 명 으로 증가했고, 1927년 초에는 5만8천 명으로 증가했다.4) 그러나 국공합작은 1927년 4월 12일 새벽 국민당의 지시를 받은 청방(靑幇)과 국민당의 지하비밀조직들이 국민당 의 정규군과 함께 공산주의자와 노동조합 지도부를 공격하면서 파탄나고 말았다. 1927 년 말, 백색공포 속에서 잔존한 중국공산당 당원 수는 1만 명 채 되지 않았다.5)

1927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은 패잔병을 이끌고 후난성(湖南省)과 장시성(江西省) 의 경계에 있는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확대하여 소비에트를 수립했다.

그러나 국민당 군대의 공격으로 근거지를 포기하고 1935년 10월 산시성(陝西省) 북부 로 들어갔다. 1934년 장시성을 떠난 8만 명의 남자와 35명의 여자는 산시성 북부에 도착했을 때 만 명이 채 안 되었다.6)

산시성 북부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다. 당시 소비에트의 인구는 300만 명이었는데, 이곳은 많이 잡아도 60만 명이다. 1936년 말 중국공산당의 홍군이 점령하여 산(陝)-간(甘)-닝(寧) 변경지구의 행정수도가 된 옌안(延安)의 인구는 1만 명 정도의 가난한 도시였다. 중국공산당이 산간벽지에서 근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동안 국민당은 북벌을 통해서 중국 전역을 통일해 나갔다. 국민당의 제2차 북벌은 1928년 6월 완료되었다, 신장(新疆)의 난징(南京) 정부 귀순, 동북 3성 군벌의 국민당 편입으로 국민당은 형식적으로나마 중국 전역을 통일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이 전면화되기 전까지 국민당은 중국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공개, 비공개 조직을 통해서 중국 사회를 전면적으로 통제했다. 1928년 국 민당 중앙조직부 조사과가 설립되었고, 1932년 조사과를 기초로 “특공총부(特工總部)”

가 설립되었다.7) 특공총부는 정치, 경제, 교육, 사회생활 영역에 공개, 비공개 사회단체 4) 모리스 마이스너(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서울: 이산, 2004), p.54.

5) 마이스너(2004), p.56.

6) 마이스너(2004), p.66

7) 王雲駿, 《民國南京城市社會管理》 (南京: 江蘇古籍出版社, 2001),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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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설립하여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선전활동을 하거나 공산당의 지하조 직을 파괴하는 활동을 했다.8)

국민당의 난징 정부는 사회단체를 사회 통제의 수단으로 삼았다. 지역의 행정적 구분 에 따라 기층 자치조직을 설립하는 것 이외, 각계의 지도적 인사들에게 직업에 따라서 직업단체를 설립하도록 했고, 항회(行會), 동향회 등 전통적인 조직을 전면적으로 개편 해 나갔다. 1933년 1월 발표된 <난징시 민중단체 정리 방법 대강 초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9)“수도 경찰청이 시 당부의 허가를 거치지 않고, 사회국에 설립 신청을 하지 않은 민중단체를 발견하면, 즉시 신청 서류를 발급하고, 시 당부, 사회국에 송부하 여 상세하게 조사한다.” “본 시 민중단체 조직 설립 이후, 만약 그 단체 존립의 기본요 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혹은 삼민주의와 정부 법령을 위반했을 경우, 시 당부, 사회국은 즉시 수도 경찰청에 해산 조치를 요청해야 한다.”

국민당의 난징 정부는 사회 통제를 위해 보갑제(保甲制)를 도입했다. 호(戶)를 단위로 호장(戶長)을 두고, 10호를 갑(甲)으로 하고 갑장(甲)을 두며, 10갑을 보(保)로 하고 보 장(保長)을 두었다. 갑장과 보장은 정부가 임명했는데, 세금 징수와 공산당 타도를 위해 장정을 동원해야 했다.10) 보갑 내의 모든 주민은 <보갑공약>에 서명해야 했다. 보장은 호구의 특수한 변동, 무기 은닉, 도적질 등을 보고하지 않은 자, 호구 허위 기입 및 문패 훼손자를 주민자치기구인 구(區)의 장에 보고하고, 구 보위단이 벌금, 구류 등의 조치를 취했다.11)

1936년 12월 시안(西安) 사건12)을 계기로 국공합작이 다시 추진되었다. 1937년 일 본의 전면적인 중국 침략으로 국민당 정권의 도시와 농촌의 기반이 급속하게 와해되었 지만, 중국공산당은 농촌에서 근거지를 확대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옌안 시기 중국 공산당의 토지정책은 당시 소비에트 시절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항일전 쟁에서 지주와 부농의 자원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지주의 재산을 완전히 몰수하고 분배 하는 대신 소작률을 인하하는 정책을 폈다.

중국공산당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근거지를 “공건·공치”했고, 성과를 “공향”했다. 중국 공산당 통치 하에 있던 농촌 지역들에서는 2천년간 중국사회를 지배해왔던 신사-지주 층의 힘이 쇠락하고 종종 붕괴되기도 했다. 기원전 221년 제국 질서 성립 이래 중국 8) 王雲駿(2001), p.169.

9) 王雲駿(2001), p.137.

10) 高黙波(章少泉, 喩鋒平 等 譯), 《高家村: 共和國農村生活素描》(香港: 中文大學出版社, 2013), p.207.

11) 王雲駿(2001), pp.61-62.

12)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원 장쉐량(張學良)의 군대가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蔣介石) 을 시안 화청지(華淸池)에 구금하고 중국공산당과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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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사회혁명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3) 중국공산당 은 농촌사회의 자원을 동원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혁명에 성공했다.

옌안의 유산은 제도적 유산과 혁명적 가치의 유산으로 구분될 수 있다. 대중노선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관료제적 통제의 병폐가 감소되었다. 자급자족의 원칙에 기초한 다 양한 노동 조직 방식이 나타났다. 합작공업과 합작농업이 나타났다. 생산과 교육을 결 합하는 다양한 제도와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반공반독(半工半讀) 학교, 야간학교, 노 동-면학 프로그램 등이다. 금욕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가치관이 확산되었다. 인민을 위 한 헌신적 투쟁과 희생의 가치, 근면, 검소, 이타주의, 자기수양, 자기부정의 가치였 다.14) 중국공산당은 농촌사회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치·경제·사회 영역에서 새롭고 독 특한 제도를 형성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윤리 규범을 확립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으 며, 혁명을 승리로 이끌면서 새로운 국가의 건설 과정에 들어갔다.

3. 건설기, 사회의 개조와 동원

건설기는 신민주주의 단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과도기,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 확 립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주의 중국 사회의 원형은 이 세 단계를 거치면서 형성되었 다. 중국공산당은 신민주주의 단계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과도기 동안에는 국가의 수 요에 맞게 중국사회를 철저히 개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고,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 확립 기 동안에는 동원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혁명 승리 이후 어떤 성격의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 1939년 12월과 1940년 1월 마 오쩌둥이 발표한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과 <신민주주의론>은 이 문제에 대해 답하고 있는데, “자본주의 독재가 끼어들어오는” 시기도 허락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곧바로 사회주의 사회를 수립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신민주주의 사회”와 “신민주주의공화국”의 과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 단계 를 처음 구상할 때 그 신민주주의는 10년, 20년, 심지어는 좀 더 긴 기간 존속할 것이 라고 했는데 1953년 신민주주의 구상을 폐기하고 “사회주의의 과도기”로 넘어간다고 선언했다.15) 그리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57년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했다고 선언했

13) 마이스너(2004), pp.73-76.

14) 마이스너(2004), p.87.

15) 蕭冬連, “再論新民主主義的提早結束,” 《中共黨史硏究》 第8集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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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도대체 1949-1952년 사이에, 또 1953-1957년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신생 정권의 최대의 과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제 도적 기반을 구축하며, 반사회주의 세력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새로운 사회를 뒷받침하는 도덕적 규범도 확립해야 했다. 본 장에서는 중국사회의 개조를 농촌과 도시 로 나누어서 살펴본다.

농촌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토지개혁이다. 1949년 토지개혁이 진행되었 던 지역은 중국 농촌의 1/5을 넘지 않았다. 1950년 6월 토지개혁법이 발표되었고, 토 지개혁운동은 1952년 말 소수민족 거주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완료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통해서 적어도 두 가지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첫째, 신사-지 주계급을 분쇄하여 농촌지역에 신생 정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고자 했다. 둘째, 토지개혁을 통해서 생산성을 증대하고, 농업과 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위한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16) 토지개혁의 결과는 어떠한가? 아래는 장시성(江西省) 가오가촌(高家 村)의 토지개혁 전후의 상황이다.

“중국공산당이 1949년 권력을 장악했을 때 20호로 구성된 가오가촌의 촌민은 촌의 280무(畝) 경지를 평균적으로 분배했다. 토지개혁 당시 ○○○은 지주로, △△△는 부 농으로 분류되었는데, 촌에는 중농이 12호가 더 있었으며, 빈농은 6호가 있었다. 빈농 은 대략 평균 6무, 중농은 13.8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지주는 45무를, 부농은 33무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지주로 분류된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듯이 그가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빈농에게 토지를 임대했고, 자신은 사숙에서 글을 가르쳤다. △△△이 부농으로 분류된 것은 무엇보다 그가 소유한 토지가 다른 사람들보 다 더 많았기 때문이고, 그 역시 토지를 빈농에게 임대해주고 자신은 재봉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 1951년 토지개혁에서 ○○○과 △△△의 토지는 몰수되어 공유지로 되 었다. 가오가촌의 모든 토지는 사람의 머리수에 따라서 평균적으로 분배되었다. 평균 이상으로 소유하고 있던 중농의 토지는 공유지로 되었고, 빈농에게 분배되었다.”17)

가오가촌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지주와 부농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지 않았고, 촌 민들 사이에서는 토지를 평균적으로 분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토지개혁의 결과, 가오 가촌에서는 지주와 부농의 경제적 기초가 완전히 붕괴했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농촌이 가오가촌의 토지개혁처럼 진행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부 농촌지역에서는 부농

16) 마이스너(2004), p.143.

17) 高黙波(2013),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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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중농이 여전히 토지를 소작농에게 임대해 주기도 했고, 임금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 다.18) 이 같은 지역적 편차는 1950년대 중반기 농촌의 집단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정치운동이 강화되는 가운데 해소되었다.

토지개혁법이 발표되었던 1950년 6월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토지개혁운동에 심 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외부세력과 내부세력이 결탁하 여 반혁명을 전개할 수도 있다는 망령을 불러왔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과정에서 관료 자본가계급의 대다수는 중국 본토를 떠났지만 지주계급의 대다수는 여전히 중국의 농 촌과 도시에 남아 있었다. 1951년 2월 21일 마오쩌둥은 <반혁명 처벌조례>를 포고했 고, 중국 전역에서는 공포정치가 나타났다.19) 중국공산당은 지주계급의 잠재적 위험을 분쇄하기 위해 계급투쟁의 심화, 토지개혁운동의 가속화를 요구했다.20) 토지개혁을 위 해 지방 당 간부들의 훈련, 농민협회와 각종 대회의 조직, 토지소유권 조사, 농민에 대 한 계급 분류,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토지개혁운동은 정치적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 서 농민은 정치적으로 각성해 나갔다.21)

중국공산당은 공작대를 파견하여 토지개혁운동을 지원했고, 지식분자들도 토지개혁 운동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면 판광단(潘光旦) 칭화대학 (淸華大學)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 교원 취안웨이톈(全慰天)과 함께 1951년 2월 20일-4 월 9일 타이후(太湖) 유역의 토지개혁운동을 참관했고, 토지개혁 과정에서 보고 들었던 것을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상하이(上海)의 간행물에 게재했다. 토지개혁에 참여한 지식인들은 과거 자신이 토지개혁에 대해서 가졌던 부정적이거나 올바르지 않은 견해 와 입장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22) 이처럼 토지개혁운동은 경제적, 정치적 성격을 띠었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성격도 띠었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1950년 10월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항미원조(抗美援朝), 위국 보가(衛國保家)”23) “항미원조, 보위평화(保衛和平)”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중국공산당 은 미군의 한국전쟁 참전, 특히 미 7함대의 대만 해협 진입 및 대만 진주를 “주권 침해”

“내정 간섭” “중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죄악”이라고 비난했다.24) 중국 내부에 존재하는

18) 마이스너(2004), pp.153-154.

19) 마이스너(2004). p.117.

20) 마이스너(2004) p.151.

21) 마이스너(2004), p.155.

22) 閻明, 《中國社會學史: 一門學科與一個時代》 (北京: 淸華大學出版社. 2010), pp.283-285.

23) “항미원조(抗美援朝)”는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조선)을 돕는다는 뜻이고, “위국보가(衛國保家)”는 나라를 지키고 집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24) 伍修權, “官司打到聯合國,” 魯林、衛華、王剛(編), 《中國共産黨歷史口述實錄: 紅色(1949-1978)》 (濟南:

濟南出版社, 2002), pp.158-1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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