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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계획경제시대(1953~1978년)

문서에서 2021년 국내학술회의 (페이지 74-79)

1949년 중공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당시 중 국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생산력은 역사적 저점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림 1>은 세계 GDP에서 주요국이 차지하는 비중의 역사적 추이이다. 중국은 아편전쟁 무렵 세 계 GDP의 1/3을 담당하는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인한 서구의 약진과 중국의 추락으로 1949년 그 비중은 5% 정도로 급격히 감소한다.3) 중공은 공산 주의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이상과 함께 생산력을 증대시켜야하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중국의 낮은 생산력은 국민의 물질적 복지 수준을 나타내는 1인당 GDP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림 2>에서 서유럽과는 달리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줄곧 떨어 지고 있는 중국의 1인당 GDP는 당시 중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림 1> 주요국·주요지역의 글로벌 GDP 비중

<그림 2> 서유럽과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자료: Maddison Project.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중공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실시한다. 공산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정당으로서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이후 1978년 개혁개방 이전까지를

‘사회주의 계획경제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 시기 중공은 중국 사회가 해결해야할 주요 모순(문제)으로 2가지를 제시한다. 1956년 9월에 제시한 ‘선진 산업국가에 대한 요구와 낙후한 국가라는 현실 사이의 모순’, 1957년 10월에 제시한 ‘사회주의 발전방

3) 고대 4대 발명의 발상지인 중국이 근대에 왜 산업혁명에 실패하고 경제성장을 하지 못했는지(니담의 퍼즐)는 경제사학계의 오랜 연구주제다.

식과 자본주의 발전방식 간의 모순’이다. 중공은 모순 해결을 위해 산업에서 (중)공업 육성을, 도시에서 기업국유화를, 농촌에서 농업집단화를 단행하였다.

(1) 중공업 육성

중공업 육성을 위해 중공은 1953년부터 제1차5개년계획(1953~1957)을 시작한다.

소련의 제1차5개년계획(1928~1932)을 본받아 실행한 이 계획은 정부가 생산자원을 중공업에 집중시켜 육성하는 전략이었다. 당시 강국이었던 미국, 영국, 소련이 모두 중 공업 강국이었고 중공업은 군수산업이었기에 부국강병이 목표인 중공으로서는 불가피 한 선택이었다. 중공에게 선진 산업국가란 중공업이 발달된 국가였다. 그러나 중국은 중공업 육성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철강, 화학, 기계 등 중공업은 전형적인 자본집 약적 산업으로 생산자원 중 자본(기계)이 많이 필요한 산업이다. 중국은 노동력은 풍부 했으나 오랜 전쟁 등으로 축적된 자본은 거의 없었다. 또한 농민이 대다수인 국민들이 원하는 제품은 의류, 신발, 집기, 농기구 등 경공업 제품이었지 중공업 제품이 아니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인위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야만 했다. 외환시장에서 인위적 환율개입을 통해 위안화 가치를 높게 유지하여 중공업기업 이 해외 생산설비와 부품을 싸게 살 수 있게 하였다. 생산물 시장에서는 기업에 독점권 을 부여하여 고(高)이윤을 보장하고 재투자할 수 있게 하였다. 노동시장에서는 노동자 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생필품(농산물)의 가격을 통제하였고 자본시장에서는 중 공업기업들에게 대출을 저리(低利)로 제공함으로 투자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모두 중공업의 이윤을 높이고 투자를 촉진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가격 통제로 인한 만성적 초과 수요가 발생하였기에, 중공은 부족한 생산자원을 강제적, 인위적으로 중공 업에 할당(allocation)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부패 문제도 심각하였다.

(2) 기업 국유화

중공업 발전전략은 기업 국유화로 이어졌다. 민영기업을 허용하면 기업 활동이 경공 업으로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공업은 투자금이 적고 회수기간도 짧다. 당시 생필 품이 부족했기에 제품을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길 수도 있었다. 자본의 경공업 집중을 막으려면 모든 기업을 강제로 국유화하는 방법 외엔 없었다. 1956년 이후 중공은 민족 자본가 기업을 최소 50년 이상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모두 국유화시켰다. 1957년 중공이 ‘사회주의 발전방식과 자본주의 발전방식 간의 모순(무산계급과 자산계급 간의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지목한 것도 치명타였다. 자산계급인 민영기업가는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국유화된 기업은 기업 활동에 대한 자율권을 박탈당했다. 인사 권, 재정권, 수익처분권 모두 정부에 귀속되었다. 국유기업의 관리자·노동자들은 기업 집단공동체(딴웨이, 單位)에 속하여 평생 살아가게 되었다.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사라졌다.

(3) 농촌 집단화

1953년부터 중공은 농산물 저가 수매와 판매를 독점한다. 중공업 노동자의 생필품 가격에 연동된 노동 임금을 낮춰 중공업 이윤을 증대시키려는 의도였다. 농민들의 노동 의욕은 떨어지고 농업산출량은 크게 감소했다. 산출량 재(再)증대를 위해서는 수매가격 을 상승시키거나 농업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켜야 했다. 그러나 중공이 채택한 정책은 농업집단화로 ‘규모의 경제’를 추진하는 방안이었다. 53년 공동작업조에서 시작한 농 업집단화는 초급협동조합(54년), 고급협동조합(56년)을 거쳐 인민공사(1958년)로 완성 되었다. 1957년 중공이 제시한 ‘사회주의 발전방식과 자본주의 발전방식 간의 모순’을 해결하고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급진적 집단화가 필요했다. 집단화를 통해 농업 생산을 공업 생산처럼 대규모로 조직하여 산출량을 증대하고자 했던 이 정책 은 ‘대약진운동(大跃进运动)’이라는 미명 하에 중국 전역에서 추진되었다. 결과는 처참 했다. 대약진운동 기간(1959~1960)에만 2천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실패 이 유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다.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농업을 모르는 중공 간부들의 어설픈 정책과 관리, 각 지역의 통계 조작과 거짓 보고로 인한 혼란 등이 지적된다. 그 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집단화로 농민들이 일할 ‘인센티브’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평등 한 분배가 강요되지만 임의 탈퇴도 불가한 인민공사 속에서 농민 개개인은 열심히 일할 이유가 없었다.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중공의 경제 정책은 몇몇 수정·보완을 거쳤지만 기존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던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로 몰아 숙청하는 급진적 문화 대혁명을 일으킨다. 문화대혁명은 도시지역에 국한되었기에 대약진운동과 달리 중국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다만 대학이 문을 닫고 지식인이 숙청되면서 중국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를 끌고 가야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1953년 시작된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대는 1976년 마오가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실권을 쥐면서 마무리된다.

(4) 평가

중국의 계획경제시대를 온전한 ‘상실의 시대’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림 3>, <그림 4>

에서 보듯이 전체 GDP와 1인당 GDP의 일정한 성장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1953~

1978년에 GDP는 연평균 약 6.7% 성장했으며 1인당 GDP는 1960년 80$에서 1978년 156$로 증가하였다.4)

<그림 3> 계획경제시대 중국 GDP 성장률(%)

<그림 4> 계획경제시대

중국1인당 GDP(상), 1인당GDP 성장률(하)

자료: 중국국가통계국 DB 활용하여 저자작성. 자료: https://www.macrotrends.net/countries/

CHN/china/gdp-per-capita

산업구조 측면에서 중국은 확실히 공업국가의 길로 들어섰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시대에 중국은 GDP의 약 30%를 공업 투자에 집중하였다(그림 5). 그 결과 1957년 29.5%에 불과하던 2차 산업 비중은 1978년 47.5%까지 상승하면서 농업(27.6%)과 서비스업 (24.6%)를 압도하였다. 1978년 중국의 2차 산업 비중은 제조업이 발달한 선진국과 유사 한 수준이었다(표 1).

4) 물론 개혁개방시대 첫 30여 년 동안(~2010년), 중국의 GDP는 연평균 성장률 약 10%, 1인당 GDP는 4,550$에 도달한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표이다.

<그림 5> 계획경제시대 중국의 지출 부문별 GDP 비중(%)

<표 1> 계획경제시대 중국의 산업별 GDP 비중(%) 1차 산업 2차 산업 3차 산업 총계 1957년 40.1% 29.5% 30.3% 100%

1965년 37.5% 35.0% 27.3% 100%

1970년 34.8% 40.2% 24.9% 100%

1975년 31.9% 45.3% 22.6% 100%

1978년 27.6% 47.7% 24.6% 100%

자료: 중국국가통계국 DB 활용하여 저자작성. 자료: 중국국가통계국 DB 활용하여 저자작성.

그러나 사회주의 계획경제시대를 높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경제의 극심한 불안정 속 에서 거대한 불균형을 만들어낸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림 3>, <그림 4>에서 성장률의 불규칙하고 급격한 변화는 당시 중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잘 나타내준 다.5) 또한 경제성장이 중공업에 집중되고 대부분 재투자되면서 국민들의 소득과 소비 증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이 상주의적 실험은 수많은 국민들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국가의 경제정책이 국민 들의 안정적 생활수준 보장을 위한 것이기에 중공에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또한

<표2>에서 보듯이 이 기간 투자가 중공업에 집중됨으로써 중국은 중공업이 과도하게 발달된 불균형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다. 노동력이 풍부한 농업국가에서 자본집약적 중 공업을 발달시키는 정책은 국가의 비교우위와 산업발전법칙에 어긋난다. 당시 중공의 중공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는 자본의 한계생산성을 떨어뜨려 비효율을 발생시켰다. 비 록 중국이 중공업을 발달시켜 1960~1970년대 핵무기도 개발하고 인공위성도 발사했 다고 하나, ‘희소한 자원의 효율적 사용’을 좋은 경제체제의 조건임을 감안할 때 중공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하기도 힘들다.

이 시기 중공은 ‘선진 산업국가와 낙후된 국가 간의 모순’과 ‘사회주의 방식과 자본주 의 방식 간의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제기한다. 첫 번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중공업 우선 발전정책을 폈으나 중국의 비교우위에 역행하면서 큰 후유증을 낳았다. 두 번째

5) 1978년 농민1인당 연평균 식량은 160킬로그램으로 1960년의 108킬로그램보다는 늘었지만 1956년의 155킬로그램을 벗어나지 못했고, 1978년 8억 명의 농민 중에서 2.5억 명(31.25%)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절대 빈곤 상태에 놓여 있었다(조영남(2016).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I. 개혁과 개방』).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급진적인 국유화, 집단화 정책을 폈으나 노동자·농민들의 인센티 브 상실로 이어지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경제 원리에 반한 무리한 정책과 이상 추구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표 2> 계획경제시대 기본건설투자의 산업별 비중(1952~78) (%)

농업 경공업 중공업 기타

1차5개년계획 7.1 6.4 36.2 50.3

2차5개년계획 11.3 6.4 54.0 28.3

1963-65 17.6 3.9 45.9 32.6

3차5개년계획 10.7 4.4 51.1 33.8

4차5개년계획 9.8 5.8 49.6 34.8

자료: 린이푸(2012), 서봉교 역. 중국 경제 입문.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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