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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데아와 쇼펜하우어의 이념

문서에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 연구 (페이지 53-57)

Ⅳ.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이념

2) 플라톤의 이데아와 쇼펜하우어의 이념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객관화 단계마다 개체화의 원리, 즉 시간, 공간, 인과율의 법칙

168)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229쪽.

169)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233-234쪽. 참조

에 종속되지 않은 사물의 영원한 형상(ewige Form)170)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개체 의 영원한 형상, 모범은 의지가 가장 순수하고 완전하게, 즉 적합한 방식으로 객관화된 것으로, 쇼펜하우어는 이를 플라톤의 이데아(ἰδέα) 개념을 차용해 ‘이념(Idee)’이라 칭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념은 의지의 적합한 객관화로서 의지와 표상세계를 매개하는 역 할뿐 아니라 미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모범적 상으로서 예술철학 내에서도 중 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개념이다.

쇼펜하우어의 이념과 개체의 관계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와 사물간의 관계, 즉 모 범(Musterbilder)과 모사(Nachbilder)의 관계로서 유비적이다. 즉 이데아는 사물의 변화 하는 외연이 아닌 불변하는 본질이며 개별자가 아닌 유(類) 전체의 보편적인 상으로서 사물의 원형(Urbild)이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모범이라는 의미에서 플라톤의 이데 아와 이념을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하며, “의지의 객관화의 이 같은 단계는 플라톤의 이 데아와 같다. 나는 앞으로 이념이라는 말을 이 의미로 사용”171)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이념은 의지와 표상세계 사이를 매 개하는 역할로서, 그림자가 아닌 참의 세계로서 우위를 가지는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존 재론적 차이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의 이념은 인식론적 관점에 서는 사물의 보편 형식, 모범으로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동일시될 수 있는데 반해, 존재 론적 관점에서 이념과 이데아가 동일한 존재론적 위치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상이한 대답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공병혜는 쇼펜하우어의 이념이 “사물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원형이지만, 현상의 배후에 실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이미 주관의 표상 의 세계 속에서 객관화된 보편적 이념이기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근본적으로 다 른 개념”172) 이라고 주장한다. 공병혜의 이러한 주장은 쇼펜하우어의 이념이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현상의 배후에 실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님을 지적한다는 면에서 이념과 이데아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념을 “이미 주 관의 표상의 세계 속에서 객관화된 보편”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이념의 위치를 주관의 표 상세계에 속한 것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또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이념은 물 자 체로서의 의지에 대한 가장 적합한 객체성으로서 이미 주관을 위한 직관적인 표상인

170) 홍성광의 번역서에는 ‘영원한 형식’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플라톤의 이데아를 지칭하는 아리스토텔레 스의 용어 'eidos'의 번역어인 ‘형상’이 개념적으로 더 적절하다는 판단으로 이를 사용하도록 한다.

171)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230쪽.

172) 공병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에서의 이념론과 예술」, 미학 제32집, 2002, 116쪽.

것이다.”173)라는 단언에서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표상과 의지 사이에 존재하는 이념의

맥락에서의 의미가 훼손된다는 면에서 이러한 주장은 문제점을 지닌다.

쇼펜하우어가 이데아와 이념의 동일성을 단언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혼선과 상이한 해석이 계속되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쇼펜하우어가 플라톤 의 이데아를 오해 또는 곡해하고 있다는 측면이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언 급하면서 “필연적으로 객관, 인식된 것, 즉 하나의 표상이며,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그렇기 때문에만 물 자체와 상이하다.”179)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데아를 “물 자체 와 상이한”,“하나의 표상”으로 지칭하는 것은, 그 자체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급은 애초에 플라톤이 이데아를 참된 세계로 상정한 의미와는 상반되기 때문 이다. 또한 “의지의 객관화의 특정한 단계를 플라톤이 영원한 이데아 또는 변함없는 형 상으로 부른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희망”180)한다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의 이데아의 용 어를 빌려와 의지의 완전한 객관화로서 이념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이데아의 의미를 플라톤이 말하는 참의 세계, 즉 칸트가 말 하는 바의 주관 밖의 물 자체의 세계라는 존재론적인 의미가 아닌, 변화하는 개별 사물 의 영원한 형상으로서 모범이 되는 역할이라는 면에서만 그 의미를 차용하고 있는 것 으로 파악된다. 즉 개별 사물에 대한 이데아의 역할과 개체의 표상에 대한 이념의 모범 으로서의 역할만이 유비적으로 동일하며, 플라톤의 철학 내에서 이데아와 쇼펜하우어의 의지 형이상학 내에서의 이념은 전혀 다른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 측면은,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다른 쇼펜하우어의 이념의 존재론적 역할, 즉 의지와 표상간의 매개의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쇼펜하우어의 이념이 가진 이 데아와의 차이점과 그 자체로서의 모호한 위치로 인해 또한 문제가 제기되는 부분이기 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객관화에서 이념의 역할을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근거율에 따라서 현상하는 개별적 사물은 물 자체(즉, 의지)의 간접적인 객관화에 지나지 않고, 이 물 자체와 현상하는 사물 사이에는 의지의 유일한 직접적인 객관성으로서 이념이 존재한다. 이는 이념이 표상 일반의 형식, 즉 (…) 고유한 형식(근거율)을 받아들이지 않았 기 때문이다.

181)

179)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293쪽.

180)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286쪽.

181)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294쪽.

여기서 이념은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화로 개별 표상과 의지를 매개하는 역할로 언급 되는데, 문제가 되는 점은 이념이 의지의 객관화, 즉 다수로서의 개체화에 관계하지만 개체화의 원리인 근거율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때에 드러나는 모호한 점은 표상과 이념 모두 의지의 객관화이지만, 개별 표상은 근거율에 의한 간접적인 객관화인 반면 이념은 근거율과 무관한 의지의 직접적 객관화이면서도 동시에 다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념은 다수의 표상과 관계하는 다수의 모범이지만, 시공간과는 무관한 단일의 의지를 매개한다. 여기에서 이념은 전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두 세계를 매개한다는 역할에서의 난점을 가지며 시간과 공간의 근거율과 무관하지만 다수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모순을 가진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개별 사물간 관계의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이데아가 개별 사물들에 분유한다는 원리로 설명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단일한 의지가 다수의 개체에 분화하거나 참여하지 않으며, “개 체의 다수성 자체는 의지가 아닌 의지의 현상에 관계할 뿐”182)이라고 말함으로서 두 세계의 원리를 단절시킨다.

이러한 이념의 난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의와 해석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다만 쇼펜 하우어의 이념에 대한 좀 더 심도 깊은 논의는 본 논문 주제와 관련한 범위를 벗어나 므로 추후 다른 지면을 통해 다뤄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념과 표상의 관계 를, 사물의 영원한 형상으로서의 모범과 이를 모방한 모사와의 관계로서 유비적으로 바 라보는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쇼펜하우어의 이념을 동일시하여 간주 할 수 있다고 보고, 이러한 관점만으로도 미학적 논의에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한 다. 이와 관련한 쇼펜하우어의 언급을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한다.

내가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의지가 물 자체이며 그 때문에 다수성과는 무관한 한에서 의 지의 객관화의 각기 특정한 고정된 여러 단계를 말한다. 개별적 사물에 대한 이들 이념들 의 단계의 관계는 물론 그들 사물의 영원한 형상이나 모범에 대한 관계와 같다.

183)

문서에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 연구 (페이지 5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