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순수인식주관의 관조

문서에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 연구 (페이지 65-71)

Ⅴ. 쇼펜하우어의 예술개념과 숭고

2) 순수인식주관의 관조

예술가는 이념을 직관함으로써 사물의 영원한 형상을 인식, 보존, 전달하지만 그러한 예술가의 미적 직관과 활동에 있어 주관이 어떻게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 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주관의 상태 또한 그의 의지 형 이상학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형이상학에 있어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의지는 삶에의 의지다. 의 지는 맹목적이며 생존을 위한 자기보존과 자기파괴를 반복한다. 따라서 의지가 객관화 된 개체들 간에는 갈등과 투쟁으로 인한 고통이 필연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의지 에 봉사하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삼지만, 인간의 신체와 주관이 그 자체로 의지의 객관화이며 자기 보존과 본능적 욕망의 지배에 놓여 있으므 로, 학문적 접근으로는 이를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이성적 사유에 근거한 기존의 전통철학이 가진 실천적 무기력을 비판하며, “철학은 어 느 경우에도 현존하는 것을 해석하고 설명하며, 구체적으로, 즉 감정으로 누구나 이해 할 수 있게 표현되는 세계의 본질을 이성의 분명하고 추상적인 인식에 이르도록 하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208)고 단정한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는 이성적 사유에 근거 한 학문의 방식이 아닌, 미적 인식에 의한 예술적 체험을 통해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 나는 순간에 대한 가능성을 찾고자 하였다. 쇼펜하우어에게 미적 체험은 의지에 종속된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즉 의지를 부정하는 인식에 도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의 부정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식에 의해서는 주어질 수 없고 단지 예외적인 순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데209) 이러한 의지 없음, 의지 부정이 가능하 기 위해서는 근거율을 벗어난 순수한 주관의 인식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상태, 즉 순수인식주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식이 의지에 봉사하는 데서 벗어나, 바로 그럼으로써 주관이 단순히 개인적인 주관이기를

207)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309쪽.

208)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442쪽.

209)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298쪽.

그만두고, 이제 의지가 없는 순수한 인식 주관이 된다. 이때 인식 주관은 근거율에 따라 더

하지만 함머마이스터의 문제제기는 그 자체가 합리적 판단만이 진리에 이르는 적합한, 혹은 더 가능성 있는 인식이라는 견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미적 직관은 그것이 오히려 개념에 의하지 않음으로써, 즉 근거율에 의존한 합리적 사고를 벗어남으로서 근본적인 통찰에 이를 수 있다는 점 을 의지 형이상학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는 점을 주지하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뫼부스(Möbuß)는 의지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욕 자체도 의지의 표현 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며 이에 대하여, “의지의 부정은 인식의 결과이지 그것의 의도 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의도적으로 계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위로서 내적인 필연성으로부터 인간을 자유에로 초대하기 때문이다.”216)라고 대답한다. 비른바 허(Birnbacher) 또한 의지부정을 주관의 내적 상태로 해석하는데, 그는 의지부정을 의 지의 약화나 제거를 의미하지 않으며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ataraxia)에서 말하는 내 면의 평정과도 같은 상태라고 주장한다.217) 의지부정이 주관이 이르게 되는 인식의 결 과이지 의도가 아니라는 뫼부스의 언급은 의지부정 자체를 또 다른 의지의 발현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측면에서 적절한 지적이긴 하지만, 의지부정을 내면적인 자유 또는 평정과 같은 심적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자칫 의지부정을 내면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 으로 전도될 우려가 있다. 한편, 김미영은 의지부정이 경험세계를 이끄는 필연성인 자 연을 부정하는 신비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의지부정은 근거율에 의해 인식된 표상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할 뿐, 자연 으로서의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의지부정은 주관 앞 에 놓인 자연을 환영으로 거부하는 신비주의적 인식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사물에게 공통적인 자연의지를 인정하는 본질적 인식에서 비롯된다.218) 또 한편으로 하피터는 의 지의 부정을 수도자 또는 성인과 같은 금욕주의적 삶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신체에서 비롯되는 감각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쾌락적 활동의 금지를 역설한 다.219) 이러한 금욕적 삶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도 윤리에 관한 논의에서 대안적인 삶

215) Hammermeister, 위의 책, 196쪽.

216) Möbuß, 위의 책, 232쪽 참조.

217) Birnbacher, D., Schopenhauer, Reclam, Stuttgart, 2009a, 106. ; 김미영, 「쇼펜하우어에서 자연의지 와 자유의지」, 칸트연구 제41집, 2018, 132;134쪽 재인용.

218) 김미영, 「쇼펜하우어에서 자연의지와 자유의지」, 칸트연구 제41집, 2018, 128-132쪽 참조.

219) 하피터, 「쇼펜하우어에서 삶의 긍정과 부정으로서의 역설적 행복」, 철학논집 제48집, 2017, 117-118.

의 형태로서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의지부정을 금욕과 고행의 실천적 삶의 형태로만 논하는 것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라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축소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지적들에서처럼, 의지부정을 개체의 소멸이나, 신체적 또는 심리적 욕구의 억 제와 제거와 같은 생리학적, 심리학적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신비주의적 세계로의 초월, 금욕적 삶의 형태로만 해석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의지부정은 자신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의 획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식이 이성적 사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윅스(Wicks)는 의지의 부정이 이성의 반성적 사고를 통해 의지를 부정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며, 주관이 의지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의지가 발 현하는 경험적인 성격의 고정성이 무너지며 욕망이 스스로 침묵하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지의 부정은“의지가 자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 후, 자신 의 발현 내에서 (살려는 의지의 부정으로서) 자신과 등지게 되는 상황이다.”220)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의지부정이 주관이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의지의 객관화로서의 주관이 스스로를 의지의 발현으로서, 혹은 의지 그 자체임을 인식하면서 스스로가 더 이상 개체로서의 주관이 아닌 보편으로서의 인식에 도달하는 상태로 이해 할 수 있다.

결국, 의지부정에 따른 순수인식주관의 상태는 개체로서의 주관의 인식을 벗어남으로 써 근거율에 의해 표상을 결합한 세계로서의 객관 또한 사라지는 형이상학적 상상의 요청되는 인식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부정은 주관이 의지에 맞서 거부하거나 분리한다는 논리적 대결의 개념이 아닌, “의지의 자기 인식”221)이라는 관점 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주관이 스스로를 의지로서 깨닫는 인식을 통해 비로소 의지 로부터 벗어난 인식에 이를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에 이른 주관, 즉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주관을 순수주관이라 부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주관이란 대상 을 인식하는 내가 의지의 객관화이며 따라서 의지의 한 사태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 는 데서 비롯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내가 인식 주관이 아니라 단순한 맹목적 의 지에 불과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인식 주관인 내가 없으면 인식된 사물은 객관이 아 니라 단순한 의지이자 맹목적 충동”으로서, 인식 주관인 나와 인식된 사물은 의지로서

220) Wicks, 위의 책, 208-210쪽

221)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307쪽.

하나이며 이러한 “의지는 즉자적으로 표상의 밖에서 내 의지와 동일하다.”222) 이처럼 대상과 나를 동일한 의지로서 자각하는 것은 “자신이 그 주관으로서 세계와 모든 객관 적인 현존의 조건, 즉 담당자임을 직접 깨닫게”223) 되는 그러한 자각이다. 여기서 주관 은 객관화된 개체의 원리로부터 벗어나 의지의 담당자로서 자신을 자각하면서 이제 자 신의 개체성을 망각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스스로도 순수인식주관에 대한 비판을 미리 염두하면서, “비난에서 벗 어나기란 절대 불가능”224)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이러한 점을 의식하여 비유를 들어 순수인식주관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주관 밖의 주관, 또는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주관이라는 의미에서, 객관을 비추는 맑은 거울을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은 이 대상에 전적으로 빠져들어, 즉 자신의 개체, 자신의 의지를 잊고 단지 순수한 주관으로서 객관을 비추는 맑은 거울(klaren Spiegel)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상을 지각하는 사람은 없이, 그 대상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된다. 그러므로 직관하는 사람과 직 관이 더 이상 구별될 수 없으며, 둘은 하나가 되어 버린다.

225)

또한 인식하는 자도 인식된 것도 없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인식법칙이 사라진 대

또한 인식하는 자도 인식된 것도 없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인식법칙이 사라진 대

문서에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 연구 (페이지 6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