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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개념의 차이

문서에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 연구 (페이지 92-97)

Ⅵ. 쇼펜하우어 예술개념의 특성과 한계

2) 숭고개념의 차이

쇼펜하우어는 숭고에 관한 논의에서 특히 칸트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데, 칸 트 미학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숭고에 관해서는 이론적 탁월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가령, 칸트의 미학에서 숭고개념이 “월등하게 탁월하다”, “숭고함의 이 론은 아름다움의 이론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학 연구에 “바 른 길을 제시한다”298)고 표현할 정도이다. 기본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언급한 숭 고가 미와 구분되는 점, 즉 불쾌의 쾌의 감정으로서 정신적 고양을 동반한다는 개념과

293)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364쪽.

294)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취미 판단과 관련한 예로서 주로 자연을 들고 있으며 예술에 대해서는 시 와 건축에서 소수의 예를 들고 있다. 칸트는 자연미와 예술미를 직접 비교하며 우위를 논하지는 않았으 나, 주로 자연을 대상으로 한 판단과 감정을 서술했다는 면에서 자연미가 미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지 니며 그의 미학에 좀 더 부합하는 대상으로 고려하였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295) 칸트는 음악과 비교하여 우위에 있는 예로 조형예술을 들고 있다.

296) KU, B221.

297) 공병혜, 위의 논문, 352쪽.

298)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부록 - 칸트 철학 비판, 773쪽.

숭고의 하위 범주, 즉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의 구분은 그대로 수용한다. 이처럼 칸트와 동일한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쇼펜하우어의 숭고론은 칸트 숭고 론의 단순한 변형이나 연장299)으로 여겨져 오며 미학사에서 큰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 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숭고론은 비록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 간 의 철학적 체계와 지향의 차이만큼이나 큰 차이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좀 더 심도 깊은 논의와 발굴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숭고론이 가지 는 차이점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미와 숭고의 구분과 그 경계다. 칸트는 숭고를 미와 서로 단절된 개념으로 보았던 반면, 쇼펜하우어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경계를 뚜렷이 구분하지 않고 연결된 미적 감정으로 파악하였다. 박영선은 숭고감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이와 같은 차이 에 주목하는데, 대상을 감상하는 주관의 감정에 따라 미에서 숭고로 이행하는, 또는 미 와 숭고가 동시에 존재하는 미적 경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숭고는 칸트 와 구분된다.300) 쇼펜하우어는 아름다움에 숭고함이 내재하거나 숭고함에 아름다움이 남아있는 감정으로서 미와 숭고를 중첩하여 설명하는데, 가령 “생명체의 원리의 부족을 약간이나마 상기시킴으로써 (…) 미의 감정에서 숭고의 감정으로 넘어간다.”또는 “아름 다움에 내재한 숭고함의 흔적은 참으로 미약한 것이긴 하지만”과 같은 표현에서 잘 드 러난다.301) 쇼펜하우어가 미와 숭고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관점은 그가 미적 체험 에 오성의 개념을 관여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미와 숭고 모두 미 적 직관의 영역이며 이러한 영역에서는 미와 숭고가 개념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구분 자체가 미적 체험의 생생함을 훼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반데나빌레 (Vandenabeele)는 쇼펜하우어가 미와 숭고를 명확한 기준으로 구분하지 않고 점차적인 차이를 가진 것으로 여긴 이유는 두 가지 모두 순수하게 미적 직관의 관점에서만 다루 었기 때문이며, 그에 반해 칸트는 숭고를 이성의 우월함과 연결짓고자 함으로써 둘 간 의 구분이 중요하게 간주되었다는 점을 설명한다.302) 쇼펜하우어는 숭고와 미의 경계를

299) 안성찬은 숭고의 미학사를 다룬 그의 저서에서 쇼펜하우어의 숭고개념은 “거의 전적으로 칸트에 의 존”한다고 언급하고 있다.(안성찬, 위의 책, 157쪽) 이와 관련하여 반데나빌레(Vandenabeele)는 쇼펜하 우어의 숭고론이 기존의 미학사에서 “단지 칸트의 숭고개념의 변형(transforming)”으로 취급되고 있다 고 지적하며, 그보다는 칸트의 숭고론을 좀 더 타당하게, 대안적으로 접근하는 관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숭고론이 재평가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Vandenabeele, 위의 책, 4쪽)

300) 박영선, 위의 논문, 138쪽 참조.

301)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336-337쪽.

302) Vandenabeele, 위의 책, 5쪽.

개념적으로 구분하는데 큰 노력을 할애하지 않았는데 다만 환경과의 적대성의 정도에 따라 미약한 숭고와 고도의 숭고를 언급하기도 한다. 가령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지고 (…) 정적에 잠긴 아주 쓸쓸한 곳”에서의 미약한 숭고와 “폭풍우에 휘말린 자연, 위협 적인 뇌우로 인한 어두컴컴함”에서의 투쟁적인 숭고는 “꺾인 의지의 모습 사이로 순수 한 인식 주관이 모습을 드러”303)내는 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아울러 개념의 판단을 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학적, 역학적 숭고 또한 학문적 구분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 숭고의 감정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버크 이후 숭고에 관한 미학적 논의에서 숭고는 항상 미와 구분되는 경험, 또는 미와 는 다른 원리를 가진 판단으로 다루어져 왔으며 이러한 점에서 숭고는 미와의 차이점 을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획득해왔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미와 숭고를 구분하는 기존 의 원리를 수용하면서도 둘 간의 경계를 명확히 단절하지 않고 미적 체험이라는 테두 리 아래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숭고를 미와는 다른 감정으로 구분한 버크의 공적만큼이 나 숭고의 미학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안성찬은 고대 이후 미학사 에서 대부분 숭고가 미의 부가적인 감정으로, 혹은 미에 포함되는 개념으로 파악되어져 왔음을 지적하는 가운데 “쇼펜하우어 역시도 숭고의 본질을 미와 동일한 것으로 해 석”304)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보자면, 이러한 비판은 쇼펜 하우어 숭고론의 표면적인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즉 쇼펜하우어가 미와 숭고 의 명확한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미에서 숭고로의 이행의 경험을 열어두었다는 것이 곧 숭고를 미와 동일시한 것으로 보긴 어렵다. 오히려 쇼펜하우어는 미와 다르게 숭고 의 경험이 가진 의미로서, 그것이 정신의 고양에 좀 더 직접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순수주관으로의 고양을 자극하는 감정으로서 아름다움보다 숭고의 감정 을 조금 더 높게 평가한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환경을 오히려

“낮은 숭고함”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순수한 인식 작용으로 고양되려면 의지의 관심으 로부터 더욱 결연히 벗어나야 한다”305)라고 말하며 의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과 부정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데서, 숭고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무게 중심을 읽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미적 체험은 개체로서의 의지 부정에 도달함으로서 달성되는데, 때문에

303)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337-338쪽.

304) 안성찬, 위의 책, 158쪽.

305)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337-338쪽.

적대적 대상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숭고의 체험이 “꺾인 의지의 모습 사이로 순수한 인 식 주관이 모습”306)을 드러내도록 종용한다. 이런 점에서 개체에 대한 위협과 투쟁의 정도가 더욱 강렬할수록 의지가 꺾이고 부정되는 개체로서의 체념과 의지 부정으로 나 아갈 길이 더 분명해질 수 있다는 면에서, 미감보다 숭고의 감정이 주관의 정신적 고양 을 위해 더 열려 있는 가능성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두 번째는 숭고를 경험함으로서 고양되는 주관 개념의 차이다. 쇼펜하우어가 숭고 경 험을 통한 주관의 정신적 고양을 순수한 미적 관조의 영역에 한정하고 칸트가 강조하 는 도덕성의 가치를 배제하였다는 것은 숭고를 통해 달성되는 정신적 고양의 지향점이 전혀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숭고의 경험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인식의 지평이 형 이상학적으로도, 또한 가치론적으로도 전혀 다르다. 공병혜는 숭고미에 관한 칸트와 쇼 펜하우어의 차이를 이러한 점에서 정의하는데, 칸트의 숭고미를 “도덕적 주체자가 자신 의 내면의 도덕적 이념을 일깨워서 일어나는 정신적 감정”으로, 쇼펜하우어의 숭고미를

“표상의 세계에서 개별자가 의지의 싸움을 거쳐 세계의 본질을 직관하는 순수 인식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기 고양의 감정”307)으로 설명한다. 반데나빌레(Vandenabeele) 또 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숭고를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이 성의 이념이나 소명에 대한 존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308)는 면에서 미적 주관의 차이 점을 언급한다. 또한 그는 주관의 상태에 대해서도, 칸트의 완전한 도덕성에 이른 안정 된 주관의 인식상태와는 다르게 쇼펜하우어의 숭고적 주관은 의지를 넘어가려는 투쟁 과정의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적한다. 즉 숭고를 경험하는 주 관은 자연의 대상에 의해 위협받고 방해받는 주관과 미적 관조의 평온한 주관의 상태 사이의 투쟁 과정 속에서 규명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인식 상태의 변화과정 중에 놓여있 는 주관이라 할 수 있다.309) 요컨대 쇼펜하우어의 숭고론은 이성과 도덕의 인식 영역이

“표상의 세계에서 개별자가 의지의 싸움을 거쳐 세계의 본질을 직관하는 순수 인식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기 고양의 감정”307)으로 설명한다. 반데나빌레(Vandenabeele) 또 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숭고를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이 성의 이념이나 소명에 대한 존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308)는 면에서 미적 주관의 차이 점을 언급한다. 또한 그는 주관의 상태에 대해서도, 칸트의 완전한 도덕성에 이른 안정 된 주관의 인식상태와는 다르게 쇼펜하우어의 숭고적 주관은 의지를 넘어가려는 투쟁 과정의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적한다. 즉 숭고를 경험하는 주 관은 자연의 대상에 의해 위협받고 방해받는 주관과 미적 관조의 평온한 주관의 상태 사이의 투쟁 과정 속에서 규명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인식 상태의 변화과정 중에 놓여있 는 주관이라 할 수 있다.309) 요컨대 쇼펜하우어의 숭고론은 이성과 도덕의 인식 영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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