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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적 판단과 주관적 합목적성

문서에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 연구 (페이지 21-24)

Ⅲ. 칸트의 미와 숭고개념

1) 반성적 판단과 주관적 합목적성

숭고에 대한 근대의 재조명은 버크에 의해 본격화되기 시작했지만, 버크의 논의는 숭 고를 경험적, 심리적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데서 그 한계점을 갖고 있다. 숭고에 대한 보편적 접근은 칸트의 선험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41) 체계 내에서 미와 숭고 가 미적(ästhetisch)42) 판단의 선험적 원리로 포함되면서 정립되기에 이른다. 칸트는 미 적 판단을 통해 이르는 만족, 즉 쾌(Lust)와 불쾌(Unlust)의 원리를 밝혀내고자 했고, 이에 따라 두 가지의 보편적 감정을 정초하는데 이것이 미와 숭고이다.

칸트는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미적 판단으로서의 미와 숭고를 분 석한다. 미의 분석은 우리가 ‘x는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 이러한 진술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편타당한 진술로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며, 숭고의 분석 또한 마찬가지로 ‘x는 숭고하다’라는 진술의 판단원리에 대한 분석이 다. 여기에서 주의해 할 것은, 미에 대한, 또는 숭고에 대한 진술의 분석이, 어떤 대상 을 얼마나 아름답게 또는 숭고하게 느끼며 또 어떤 사물, 또는 어떤 속성을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주관적 느낌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 자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무엇

41) 칸트의 철학체계의 핵심어인 ‘transzendental’과 ‘a priori’의 경우 백종현의 번역서에는 ‘초월적’과 ‘선 차적’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최근 출간된 한국칸트학회의 칸트전집에서는 ‘선험적’, ‘아프리오리’로 번 역하고 있어 혼선이 있는 가운데, ‘transzendental’의 경우 지금까지 학계에서 ‘선험적’을 오랫동안 많이 사용해왔다는 점을 들어 이를 적용하도록 하며, ‘a priori’는 ‘선험적’과 구분하기 위해 ‘선천적’이라는 번역어를 택하도록 한다. 또한 ‘Verstand’는 백종현의 번역서에서 ‘지성’으로 표기되며 학계에서도 ‘오 성’과 함께 빈번히 사용되는 번역어이나, ‘지성’은 일상적 어법으로는 칸트의 ‘이성(Vernunft)'을 포괄하 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오성‘을 사용하고자 한다.

42) ‘ästhetisch’에 해당하는 번역은 학계에서 ‘미적’, ‘미학적’,‘감성적’, ‘심미적’, ‘미감적’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으나 그 중 ‘미적’과 ‘미감적’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백종현의 번역서에서는 이 단어를 주 관의 쾌, 불쾌의 감정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미감적’이라는 단어를 채택하고 있으나,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문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는 ‘미적’을 번역어로 택 한다.

을 말하는지43), 그렇게 판단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와 숭고의 판단원리를 살펴보기 전에, 미와 숭고에 대한 진술 판단이 진 리 인식에 대한 진술의 논리적 판단과 어떻게 다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는 판단력 일반의 개념을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설명하 고 있는데 그는 판단력을 어떤 것을“규칙들 아래에 포섭하는 능력, 다시 말해 무엇인가 가 주어진 규칙 아래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능력”44)이라고 정의한다. 이러 한 판단력은 다시‘규정적 판단력(die bestimmende Urteilskraft)’과 ‘반성적 판단력(die reflektierende Urteilskraft)’의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칸트는 규정적 판단력을

“보편적인 것이 주어져 있다면, 특수한 것을 그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으로, 반성적 판단력은 “특수한 것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그를 위한 보편적인 것을 발견”45)해야 하는 판단력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규정적 판단력은 순수 이성의 구조 안에 이미 오 성 일반의 선천적인 범주(Kategorie)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특수한 것을 이 범주 하에 포섭하기만 하면 된다. 즉 인식주관이 대상을 향해 내리는 판단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이에 반해 주어진 규칙으로 포섭될 수 없는 특수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 주관적 조건 내에서의 반성을 통해서만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 ‘반성’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반성이란 곧바로 대상들에 대한 개념들을 얻기 위해 대상들 자신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념들에 이를 수 있는 주관적 조건들을 발견하기 위해 우선 준비하는 마음의 상태 다. 반성은 주어진 표상들의 우리의 서로 다른 인식 원천들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으로서, 이를 통해서만 그것들의 상호 관계가 올바르게 규정될 수 있다.

46)

그렇지만 여기에서 대상에 대한 개념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인 판단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대상 자체, 물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오로지 대상의 현상, 즉 오성의 선천적 범주 내에서 주어지는 개념의 포섭을 통

43) Teichert, Dieter, Immanuel Kant: Kritik der Urteilskraft, Ferdinand Schoeningh, Paderborn, 1992 ;

쉽게 읽는 판단력 비판, 조상식 옮김, 이학사, 2003, 31쪽.

44) Kant, Immanuel, Kritik der reinen Vernunft, Insel Verlag, Frankfurt am Main, 1956, B172. (이하

‘KrV’로 약칭하고 A판과 B판의 쪽수를 표기함)

45) Kant, Immanuel, Kritik der Urteilskraft, Insel Verlag, Frankfurt am Main, 1957. BXXVI. (이하

‘KU’로 약칭하고 A판과 B판의 쪽수를 표기함) 46) KrV, B316.

해 대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판단 또한 가능해지므로, 이러한 오성의 선천적 범주에 근 거하여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규정적 판단력과는 달리 반성적 판 단력은 대상을 결정할 수 있는 그 자신의 선천적 범주들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특수한 것에 관여하여 그 특수로부터 고유한 보편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47) 따라서 반성적 판단력은 대상으로부터 우리 주관으로 향해 내리는 판단, 즉 대상들의 범주들에 대한 개념적 파악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어떤 식으 로든 그 대상이 판단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48) 그렇다고 한다면, 대상을 판단하는 주 관의 보편적 원리가 전제되어야만 할 것이며, 따라서 칸트는 반성적 판단력이 스스로에 게 속하는 선험적인 원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 안에 있는 특수한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으로 올라가야 하는 임무를 갖는 반성적 판 단력은 하나의 원리를 필요로 하는 바, 반성적 판단력은 이 원리를 경험에서 빌려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바로 모든 경험적 원리들과 마찬가지로 경험적이기는 하나, 보 다 고차원적 원리들 아래서의 통일성과, 그러므로 그 원리들 상호간의 체계적 종속관계의 가능성을 기초 지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선험적 원리를 반성적 판단 력은 단지 자신에게만 세울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취할 수 없으며 - 그렇지 않으면 그것 은 규정적 판단력일 터이다 - 자연에게 지정할 수도 없다.

49)

여기에서 반성적 판단력이 스스로에게 세우는 선험적 원리라는 것은, 대상에 대하여 주관이 인위적으로 원리를 지정한다는 의미가 아닌, 주관의 반성이 따르게 되는 자연의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칸트는 이를 “자연의 합목적성의 원리(das Prinzip der Zweckmäßigkeit der Natur)”50)라고 말한다.

이처럼 반성적 판단력은 규정적 판단력과는 달리 순수 오성개념과 같은 자신의 특별 한 범주를 갖고 있지 않은데, 따라서 반성적 판단력은 경험을 구성하지도, 대상에 관한 지식도 제공하지도 못한다. 다만 그것은 대상을 바라보는데 필요한 인식의 조건, 즉 자 연의 합목적적 적합성에 관여하게 된다. 여기에서 자연의 합목적성은 우리로 하여금 산 만한 다양성의 자연을 질서가 있는 조화스러운 전체로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조

47) 오병남, 「칸트 미학의 재평가」, 미학 Vol.14, 1989, 117쪽.

48) Teichert, 위의 책, 43쪽.

49) KU, BXXVII.

50) KU, BXXX.

건을 말한다.51) 결국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합목적성은 바라보는 대상의 경험과 내용에 있지 않고 그것들을 주관 내에서 합목적적으로 조화롭게 보게 하는 형식에 있다. 다시 말해 반성적 판단력은 대상을 주관의 체계 속에 합목적적으로 정리하는데, 이는 개념을 통해 대상을 규정하거나 그것의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상의 형식들이 우리에게 반성되는 것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52) 요컨대, 자연의 합목적성은 대상 의 내용이 아닌 형식과 우리 주관의 선천적 범주가 아닌 인식 능력과의 합목적적 관계 를 말한다.

이러한 대상과 인식 능력간의 형식적, 주관적 합목적적인 관계는 미적 성질을 가진다 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에 대한 합목적성이 대상 자체의 성질에서 비롯되는 것 이 아니며 대상에서 현상된 표상의 주관적인 면으로서, “대상이 그런 경우 합목적적이 라고 불리는 것은, 오로지 그 대상의 표상이 직접적으로 쾌의 감정과 결합되어 있기 때 문이다. 이런 표상 자체가 합목적성의 미적 표상이다”53) 그리고 이러한 미적 표상에 대 하여 주관의 인식 능력간의 조화와 갈등에 따라 나타나는 미적 만족의 상태가 미와 숭 고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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