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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세계와 충분근거율

문서에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 연구 (페이지 42-45)

Ⅳ.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이념

1) 표상세계와 충분근거율

1) 표상세계와 충분근거율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은 ‘의지 형이상학’으로 명명되는 형이상학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예술에 부여된 형이상학적 가치 또한 세계의 본질을 의지로 바라보는 그 의 철학적 진리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에 관한 논의는 필수적 으로 의지 형이상학에 기반한 이해를 요구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계를 표상과 의지로 설명한다. 표상 으로서의 세계는 인식의 세계이며 의지로서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다. 의지와 표상으로 서의 세계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Die Welt is meine Vorstellung)”127) 라는 문장으 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나의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의미하는 바는,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란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128)을 의미한다. 즉 표상세계란 주관에 의해 인식된 세계이며, 여기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의 존재는 오로지 인 식하는 의식을 위한 존재129), 즉 표상세계에서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는 문장을 전제할 수 있게 하는 인식의 선험적 원리를 두 가지 측면에서 들고 있는데, 첫째 표상세계는 근거율 또는 충분근거율(der Satz vom zureichenden Grunde)130)의 형식으로 인식된다는 것과 둘째, 충분근거율은

127) Schopenhauer, Arthu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Ⅰ,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GmbH & Co. KG, München, 1998.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5, 41쪽. (이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로 약칭하고 번역서의 쪽수를 표기함)

128)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41쪽.

129) Möbuß, Susanne, Schopenhauer für Anfänger -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Munich/Germany, 1998. : 쉽게 읽는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공병혜 옮김, 이학사, 2002, 73쪽.

130) 근거율, 충분근거율, 이유율, 충족이유율, 충족근거율, 충분이유율은 모두 같은 원어(der Satz vom zureichenden Grunde)의 번역이며 본 논문에서는 ‘충분근거율’또는 ‘근거율’로 표기하도록 한다. 근거율 은 라이프니츠에 의해 모든 인식과 학문의 핵심원칙으로서 공식적으로 주장되었으며 그것은 “모든 것 은 왜 그것이 그렇고 다르지 않은가에 대한 하나의 충분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충 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나남, 2010, 35쪽.)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라이프니츠 의 충분근거율에 관한 논의를 비판하는데, 충분근거율이 존재의 원인이 아니라 인식근거의 관점에서,

주관과 객관의 공통된 형식이라는 것이다.131) 충분근거율은 주관의 선험적 인식 형식으 로, 주관에 의해 인식된 객관은 충분근거율에 의해 결합된 표상의 구성물이며 따라서 객관 또한 충분근거율의 형식 하에 놓이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충분근거율에 대해 논한 그의 논문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의 모든 표상은 주관의 객관이고, 주관의 모든 객관은 우리의 표상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모든 표상은, 형식에 있어서 합법칙적이며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결합 안에 서로 뒤섞여서 놓여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이 결합에 의해 어떤 것도 그것 자체로 존재 하는 것이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개별적으로 분리된 어떤 것도 우리에게 객관이 될 수 없다. 이 결합은 충분근거율이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132)

충분근거율은 주관의 선험적 인식 형식이므로 주관에 의해 인식된 객관 또한 충분근 거율의 형식에 놓이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주관은 세계의 담당자이며, 현상하 는 모든 것과 객관을 관통하며 항시 그 전제가 되는 조건이다.”133) 따라서, 주관은 객 관의 전제가 되며 객관은 오직 “주관에 대해서만 존재”134)한다. 즉 주관 없는 객관은 없으며 객관은 주관의 선험적 형식에 종속된다. 그 선험적 형식이 곧 충분근거율이며 이것으로 주관과 객관의 세계는 맞닿아 있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인식론적 관점 즉, 주관이 인식하는 객관이라는 세계를 주관의 선험적 인식 형식에 근거하여 파악하고 따라서 객관이 주관에 의해 구성된 표상세계라 는 것, 그리고 주관에 의해 인식된 객관과 그것과 무관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물 자체 (Ding an sich)를 구분하는 관점은 칸트의 인식론적 전제를 그대로 계승한다. 특히, 쇼 펜하우어는 우리의 의식 속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음 을 발견한 것이 칸트의 가장 위대한 공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135) 하지만 오성에 의한 반성적 판단의 근거가 되는 선험적 범주에 대해서는 다르게 접근한다. 칸트는 선험적인

즉 칸트의 말에 따르자면 물 자체가 아닌 주관의 선험적 인식형식으로서 충분근거율이 적용되어야 함 을 주장한다.

131)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41쪽.

132) Schopenhauer, Arthur, 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Bd.1, Sämtliche Werke, Brockhaus, Leipzig, 1937. ;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나남, 2010, 47쪽.

133)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44-45쪽.

134)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45쪽.

135)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46쪽.

감성 형식으로서 시간을 내감의 형식, 공간을 외감의 감성 형식이라 말하고136) 오성에 의한 판단의 범주를 12가지로 구분137)하고 있는데 반해,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오성의 판단 범주를 직관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비판하며 결과에 대한 원인을 근거 짓는 인식 형식으로서의 인과율만을 인정하고 모두 거부한다.138) 결 과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선험적 인식 형식으로서 시간, 공간, 인과율의 세 가지 형태만 을 제시하고 이를 주관과 객관의 공통 형식이자 표상세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되는 형 식으로서 충분근거율이라 칭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객관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형식들인 시간, 공간 및 인과율은 객관 그 자체를 인식 하지 않고도 주관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고 완벽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데서, 즉 칸트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의식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139)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칸트가 말하는 현상의 세계이며, 주관이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듯이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란 오직 충분근거율에 의해 인식된 객관, 즉 표상의 세계뿐이다. 하지만 또한 쇼펜하우어 는 표상세계 한계 너머의 본질세계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열어두며 이렇게 질문한다.

이 세계는 단지 표상에 불과한가? 어떤 경우에 표상이 실체 없는 몽상이나 또는 유령 같은 환영처럼 우리 곁을 슬쩍 지나가 우리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인가? 또는 세계가 뭔 가 다른 것, 그 외의 뭔가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140)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인간의 신체에서 찾는다. 인식주관에 의 해 파악되는 외부로 가장된 객관이 아닌 보다 직접적인 객관인 신체를 매개로 해서 표 상과는 다른, 표상이 아닌 본질의 세계로 다가가고자 한다.

136) KrV, B37.

137) 판단의 범주는 양, 질, 관계, 양태의 4가지 항으로 구분되며, 각 항별로 3가지 하위 항목을 둠으로써 12가지 범주로 구성된다. 이 중 인과성은 대상 간의 ‘관계’에서 가언판단,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판 단하는 판단 범주에 속한다.(KrV, B95. 참조)

138)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의 부록 ‘칸트 철학 비판’을 참조.

139)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46쪽.

140)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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