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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적 차이

문서에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 연구 (페이지 88-92)

Ⅵ. 쇼펜하우어 예술개념의 특성과 한계

1) 인식론적 차이

쇼펜하우어는 분명 칸트를 위대한 철학자로 인정하며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이해하 기 위한 전제로서 칸트의 주저들에 대한 독서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281) 그만큼 그의 철학은 칸트 철학을 승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칸트의 철학이 가지 고 있는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비판하는 데서부터 그의 철학이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 서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점은 미와 숭고, 예술의 개념에서 도 마찬가지인데,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대하여 미에 대한 학으로서의 근본적인 전제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는 판단력비판에서도 아름다움 자체, 즉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아름다움으로부터 출발하 지 않고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 매우 볼품사납게도 소위 취미 판단으로부터 출발했다. (…)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발언으로부터, 아름다움 자체가 아닌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으로 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는 직접 아는 것이 아니라 들어서 아는 듯한 인상을 준다. 거의 이와 마찬가지로 높은 지성을 지닌 어떤 맹인이 색채에 대해 들은 정확한 진술로부터 하나 의 색채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칸 트 철학 학설을 거의 그러한 관계에서만 고찰할 수 있다.

282)

쇼펜하우어는 예술철학에서 다루는 개념들의 대부분을 칸트 미학에서 가져오고 있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 간에는 근본적인 철학적 토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관 점의 차이가 존속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 미학과의 개념적 연관성을 염두하면서

281)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머리말’에서 그의 책을 읽기 전에 칸트의 주저들과 자 신의 논문 충분근거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읽어보기를 강조하고 있으며, 심지어 칸트의 철학 을 철학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이해가 요구되는 사상으로 칭하고 있다.(의지와 표상으로서 의 세계Ⅰ: 제1판 머리말, 14쪽.)

282)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Ⅰ: 부록 - 칸트 철학 비판, 772쪽.

283) 유사한 개념 속에도 어떠한 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내포되어 있는지에 대한 파악 을 통해 칸트 비판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개념의 유사성에서 오히려 그 안에 내포된 철학적 차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쇼펜하우 어의 예술철학이 칸트 미학의 반복으로 취급되거나, 혹은 연관성의 측면에서만 다뤄진 측면이 있어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은 더욱 큰 의의가 있겠다. 본 논문은 그 동안 칸트 미학과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이 가지는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데 반 해, 차이점에 있어서는 체계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밝히고자 한다.

유사한 미적 개념 속에 내포된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차이는 미적 인식의 선험적 원 리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론적 차이에 근거한다. 즉 칸트의 미적 인식은 취미 판단으로 서 상상력과 오성, 이성의 조화에 도달하는 명제적 판단이며, 쇼펜하우어의 미적 인식 은 오성과 이성의 충분근거율로부터 벗어나 개념을 통하지 않은 직관에 의존한다. 이러 한 근본적인 인식론적 차이는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미학 전반을 관통하며 유사한 개념 을 놓고도 전혀 다른 철학적인 입장의 차이를 드러낸다.

본 논문에서는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미적 인식론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구체적으로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두 사상 간의 차이의 근간이 되는 미와 숭고에 대한 인식론적 입장, 즉 반성적 판단과 관련한 차이다. 칸트에게 있어 무엇이 ‘아름답다’는 판단은 대상의 경험 된 표상에 있어서 오성과 상상력간의 조화로운 인식에 의한 주관의 합목적적 판단이며,

‘숭고하다’는 판단은 오성과 상상력의 조화가 좌절된 판단을 이성의 관여에 의해 역시 조화가 달성되는 주관의 합목적적 판단이다. 이에 반해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미와 숭 고의 체험은 표상을 인식하는 주관의 충분근거율을 벗어나 순수객관 즉 이념을 조망하 는, 표상을 벗어나는 인식이다. 칸트에게 미와 숭고는 대상의 표상에 대한 주관의 합목 적적 관계에 의한 판단이라고 한다면,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는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 의 의식과 주관이 표상한 대상을 그 스스로 벗어나는, 대상과 주관과의 관계가 망각된 인식이다. 요컨대 칸트는 대상의 표상이 오성과 상상력, 이성의 주관 인식 능력과 합목

283)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과 칸트의 미학 간에 연관된 개념은 본 논문에 앞서 여러 차례 논의해왔으므 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한다. 간략하게 언급만 하자면, 무관심성과 무욕성, 천재, 미적 이념과 환 상, 수학적 숭고, 역학적 숭고 등의 개념을 들 수 있다.

적적으로 조화되는 연관된 관계, 즉 대상이 주관에 의해 반성되는 관계를 주목하는데 반해, 쇼펜하우어는 대상의 표상을 주관이 인식하는 관계 자체를 벗어나고 망각하는, 즉 대상이 주관의 근거율을 따르지 않고 순수객관으로 직관되는 무반성적인 관계에 주 목한다. 이와 관련하여 반데나빌레(Vandenabeele)는 칸트와 구분되는 쇼펜하우어 예술 철학의 가장 중요한 경계로 미적 체험에서 반성적 판단을 제외한 점을 든다. 그는 쇼펜 하우어의 예술철학이“대상에 대한 반성적 판단이 아니며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감각적 요소에 의해 촉발되는 미적 체험”284)이라고 강조한다. 셰어(Scheer) 또한, “쇼펜하우어 의 경우 미적 직관을 통한 이념의 인식은 학문적인 개념 인식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식”285)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미적 인식론의 차이는 미의 판단의 보편성에 대한 탐구인가, 미의 보편성에 대한 탐구인가로서 그 탐구 영역 에서부터 구분된다.

두 번째로, 칸트의 무관심성(Interessenlosigkeit)과 유사한 개념으로 대응되는 쇼펜하 우어의 무욕성(Willenlosigkeit)의 차이다. 쇼펜하우어는 미적인 인식 능력으로서 의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즉 나를 추동하는 의욕에 매이지 않는 무욕의 순수 직관을 말하는 데, 칸트 또한 대상의 미적 판단을 위해서는 개인의 어떠한 이해와 욕구가 반영되는 않 는 인식의 상태를 전제하며 이를 통해서만이 미적 만족에 다다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미적 인식을 위해서는 생활 주체로서의 이해와 욕구를 떠난다는 면에서 특별하고 공통적인 미적 인식 태도라 할 수 있지만, 그 속에 내포된 인식론적으로 차이를 간과해 서는 안 된다. 공병혜는 칸트에게서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에 의한 미적 판단의 조건 으로서의 무관심성과 대상에 대한 이념 관조의 조건으로서 무욕성은 서로 다른 철학적 체계 위에서 정립된 미적 태도286)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개체로서의 주관, 즉 자아 가 망각된 인식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무욕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칸트의 무관심성은 여전 히 개체의 주관성에 머물러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 다.

세 번째, 예술을 창조하는 능력으로서 천재 개념에 대한 차이다. 칸트와 쇼펜하우어

284) Vandenabeele, Bart, The Sublime in Schopenhaurer's Philosophy, PALGRAVE MACMILLAN, 2015, 2쪽.

285) Scheer, 위의 책, 204쪽 참조.

286) 공병혜, 「쇼펜하우어의 미학 사상 - 칸트 미학과의 연관성 하에서」, 칸트연구 Vol.6, 2000, 354쪽 참조.

는 공통적으로, 미적 대상을 창조하는 능력으로서 선천적인 예술적 재능을 가진 천재를 들고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른 생득적인 재능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는 예술 창작에서의 원리는 다르게 나타난다. 즉 칸트가 말하는 천재적 능력이란 자연 을 합법칙적으로 재현하도록 인식 능력의 조화를 이루는 미적 능력이라면 쇼펜하우어는 대상을 표상하는 구성 능력이 아닌 사물의 영원한 형상, 즉 이념을 발견하는 직관의 능 력이라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천재성이란 “순전히 직관적으로 행동하고 직 관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287) 으로서 “예술에 규칙을 주는 재능”288)으로서 칸트가 정 의하는 오성에 기반한 범주적 인식과는 전혀 다른 인식능력의 영역을 나타낸다. 이와 더불어 천재가 표상하는 미적 이념과 환상에서도 같은 맥락의 차이가 드러난다. 칸트에 의하면 미적 이념은 “상상력의 표상으로서, 이성 이념의 대응물”289)로서 천재가 미적 상상력에 의해 이념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비언어적 표상이다. 이러한 미적 이념은 이념 의 미적 재현을 위한 수단이라는 역할에서 쇼펜하우어의 환상에 비유될 수 있다. 즉 환 상과 미적 이념은 경험된 자연을 보편적 형상의 표상으로서 재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역할에서 유사하지만, 환상을 산출하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Phantasie)은 칸트의 미적 이념을 표상하는 상상력(Einbildungskraft)과는 다른 인식론적 영역을 가진다. 즉 쇼펜 하우어의 상상력은 경험된 표상의 개념적 구분을 해체하고 표상 너머의 이념을 직관하 는 인식능력인 반면, 칸트의 상상력은 “감성과 오성을 매개하는 역할”290)의 인식능력으

는 공통적으로, 미적 대상을 창조하는 능력으로서 선천적인 예술적 재능을 가진 천재를 들고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른 생득적인 재능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는 예술 창작에서의 원리는 다르게 나타난다. 즉 칸트가 말하는 천재적 능력이란 자연 을 합법칙적으로 재현하도록 인식 능력의 조화를 이루는 미적 능력이라면 쇼펜하우어는 대상을 표상하는 구성 능력이 아닌 사물의 영원한 형상, 즉 이념을 발견하는 직관의 능 력이라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천재성이란 “순전히 직관적으로 행동하고 직 관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287) 으로서 “예술에 규칙을 주는 재능”288)으로서 칸트가 정 의하는 오성에 기반한 범주적 인식과는 전혀 다른 인식능력의 영역을 나타낸다. 이와 더불어 천재가 표상하는 미적 이념과 환상에서도 같은 맥락의 차이가 드러난다. 칸트에 의하면 미적 이념은 “상상력의 표상으로서, 이성 이념의 대응물”289)로서 천재가 미적 상상력에 의해 이념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비언어적 표상이다. 이러한 미적 이념은 이념 의 미적 재현을 위한 수단이라는 역할에서 쇼펜하우어의 환상에 비유될 수 있다. 즉 환 상과 미적 이념은 경험된 자연을 보편적 형상의 표상으로서 재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역할에서 유사하지만, 환상을 산출하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Phantasie)은 칸트의 미적 이념을 표상하는 상상력(Einbildungskraft)과는 다른 인식론적 영역을 가진다. 즉 쇼펜 하우어의 상상력은 경험된 표상의 개념적 구분을 해체하고 표상 너머의 이념을 직관하 는 인식능력인 반면, 칸트의 상상력은 “감성과 오성을 매개하는 역할”290)의 인식능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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