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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야생 사슴이 알려준 연구자의 자세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47-54)

러시아 야생 사슴이 알려준 연구자의 자세

ReSEAT 전문연구위원 김용준

침 10시, 해가 쨍쨍하게 떠있었지만 러시아의 온도계는 영 하 1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A 교수는 배드민턴공처럼 깃 털이 달린 주사 발사총을 들고 사슴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 었다. 자비 없는 러시아의 추위에 주사액이 꽁꽁 얼지 않도록 한 손으로 주사통을 감싸 쥔 채, 반대편에서 동료가 몰아주는 사슴 무 리 중 목표 사슴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슴 몰이를 여 러 차례 반복하며 목표 사슴이 가까워질 때마다 A교수가 쏜 빨간 깃털의 주사통은 사슴 엉덩이를 향해 곧장 날아갔지만, 단 한 번 도 꽂히지 않았다.

우리 연구팀이 시도하고 있던 실험의 첫 실패였다. 이 연구는 인공적 으로 야생 사슴 우리를 만들고, 사슴의 수정란을 회수하는 세계 최초의 실험이었다. 우리 연구팀은 러시아 대륙사슴의 뿌리가 과거 우리나라 백두대간에 생존했던 사슴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옛 토종 사슴을 복원 하고자 러시아 사슴의 수정란을 채취하러 먼 이곳까지 온 것이다.

수정란을 생산⋅채취하는 실험 계획은 다음과 같다. 사슴은 1~2마리의 새끼만 낳기 때문에 한 마리 당 3~5개 이상의 수정란을 채취하려면 과 배란을 일으키는 호르몬을 투여하고, 제한된 시간에 여러 마리의 실험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동시에 발정 동기화 처리를 하는 것이다. 발정 동기화를 위해 암사슴의 질 내에 특정 장치를 넣기 위해 사슴 마취를 하는 것이 우리의 첫 작업이었다.

시작부터 실패를 겪은 우리는 A교수의 제안으로 동물 마취 전문가인 B선생을 연구진으로 맞이했다. 우리의 기대대로 B선생은 단번에 사슴을 마취시키는 실력을 제대로 보여줬다. 그렇게 첫 작업을 마치고 한시름 놓을 쯤, 두 번째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험 기간이 사슴 들의 주 번식 시기인 10월~12월의 혹한기였다. 영하 30도까지 내려 가는 러시아의 매서운 추위 때문에 마취약과 호르몬이 꽁꽁 어는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일은 사슴들의 사고였다. 사슴 사육장이 너무 협소하다보니 마취약을 맞은 사슴에게 접근하기 위해 사육장에 사람이 들어가면 놀란 사슴들이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 펜스에 머리를 부딪치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사고가 계속 발생하는데, 응급치료를 해 줘도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러시아 야생 사슴이 알려준 연구자의 자세 45 또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몰라 연구진은 내내 불안해했다. 그러던 중 끝내는 대형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사슴들이 도망 다니다가 철망이 뚫리는 바람에 열린 공간 사이로 사슴들이 모두 도망친 것이다. 사슴 도주 사고 후 사육장을 전체적으로 다시 보수하고 새로운 사슴을 구입해 사육장에 채웠지만 12월 중순 가까이 되어서야 1회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사슴 4마리에게 발정 동기화와 과 배란 유도를 한 뒤 무사히 수컷과 합사시켰다. 수정란 채취 일에 맞춰 일찍 작업에 나선 우리는, 적어도 1마리에서라도 수정란을 얻을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하고 밤 10시까지 작업을 진행했다. 식사도 거의 거르며 작업했지만 1~2개의 난자만 확인했을 뿐 끝내 수정란을 채취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대 실패였다.

나는 연구 책임자로서 모든 책임이 나 때문인 것만 같았다. 연구팀 모두가 온갖 고생을 하며 얻어낸 연구 결과가 실패라니.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특히 발정 동기화 작업과 과 배란 호르몬 처리 계획은 내가 짠 것이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수없이 되짚어보며 고민 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실험 실패의 원인을 정리해봤다. 가장 큰 원인은 야생 생활을 하던 러시아 사슴을 협소한 인공 우리에 사육하며 낯선 사람과 접촉 시킨 것이었다. 극도의 경계심과 긴장감으로 스트레스가 높은 상태인 사슴이 난자 발달이나 배란을 수월하게 할 리 없었다.

과 배란 작업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차 실험 실패 후 그 다음 해 2차 실험에 들어가게 된 우리는 지난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한 계획을 짰다. 먼저 인공 우리가 아닌 야생과 조건이 그나마 비슷한 현지의 사슴 농장을 섭외해 실험을 진행하기로 했다. 면적이 넓고 먹이로 유인이 가능한데다가 마취 없이도 실험 처리 하기에 수월해 사슴들이 비교적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사슴 농장을 수배했지만 섭외할 수 없었다. 사슴의 번식 계절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차선책으로 지난 해 사용했던 인공 사슴 우리를 확장하기로 했다. 더 이상의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진들은 여름 방학 기간 동안 러시아로 건너가 현지에서 재료를 직접 구매해 확장 작업을 했다.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쉴 장소를 군데군데 마련했다. 사슴이 사람에게 익숙해지도록 직접 물과 먹이를 하루에 두 번 주며 상주하는 직원도 배치했다. 그렇게 사슴 우리 확장 작업을 마치고 다시 실험을 시작했다. 실험용 사슴들을 실은 차량이 사육장에 도착한 후 사슴들을 우리에 사고 없이 넣기 전까지, 긴장감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실험에 필요한 조건들을 마치고 나니, 드디어 사슴 번식 계절이 찾아왔다. 10월부터 12월 중순까지 4회의 실험 스케줄을 잡았고, 한 스케줄 당 실험 1단계부터 마지막 단계인 자궁관류 및 수정란 회수까지 약 22~24일이 소요되었다. 사슴을 우리에 넣고 한 달이 막 지나서, 1차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5마리 중 2마리에서 난자를 각각 2개와 3개를 채취했다. 이 난자들은 미 수정란이었다. 대부분은 두 달 이상 적응기를 가진 사슴을 대상으로 실험해야 하는데, 우리가 실험한 사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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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것만 같았다.

러시아 야생 사슴이 알려준 연구자의 자세 49 으로 하는 과학 실험은 끊임없는 관찰과 치밀하고 꾸준한 자료 수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행착오를 겪었을 지라도 실패를 성찰하고 결과를 기다릴 수 있는 무한한 인내심이 있다면 끝내는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생명을 다루는 과학에서 갖춰야 할 연구자의 자세는 과학 기술도 중요하지만 실험 대상 동물에 대한 이해와 인내가 우선이 아닐까?

육안관리 불가능한 영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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