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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비판의 윤리학

문서에서 녹색에너지협동연구: (페이지 52-57)

경제학의 비용-편익 분석은 공리주의에 그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 다. ‘편익이 비용보다 큰 행위를 선택하라’는 판단의 규칙은 공리주의 가 추구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칙과 다름없다. 그런데 여기 서 ‘최대 다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원리적으로 공리 주의가 상정하는 ‘최대 다수’는 ‘임의의 모두’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 지만 현실의 공리주의에서 ‘다수’는 시간적으로 ‘현재세대’ 나아가

‘현재세대’ 중에서도 ‘다수파’ 정도의 의미로 통용되는 것이 일반적이 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공리주의에는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이렇게 ‘배제’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현재세 대와 미래세대는 경쟁과 대립의 관계로 간주될 수 있다.

이 파트에서는 공리주의 비판의 계보에 위치하면서 세대 간 ‘공존’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하는 현대윤리학의 사례로서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타자의 윤리학’과 현대 정의론을 대표하는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의 윤리학’을 살펴본다.

가. 고전적 공리주의와 수정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을 윤리적 평가 기준으로 삼는 철학적 입장이다. 공리주의는 각자가 가진 행복의 양을 모두 더해서 그 총량이 큰 사회를 바람직한 사회로 간주하며, 그런 전제에 입각해 법과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공리주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행복을 가져오는 행 위와 규칙의 가치를 오직 ‘쾌락/고통’이라는 단일 척도에 기대어 판단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공리주의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것 은 예를 들어 흥미위주의 오락소설을 읽는 것과 노벨문학상을 받은 예술성 높은 소설을 읽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를 ‘쾌락=재미’라는 기준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공리주의의 원칙에 따른다면 오락소설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예 상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철저한 공리주의의 입장을 견지한다면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지지할 가능성도 발생한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 인가의 문제는 ‘쾌락=행복’을 현재를 포함한 어떤 시간적 길이 속에서 평가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현재를 기점으로 미 래의 어느 시점까지의 시간적 거리를 상정하는가에 따라 쾌락에 관한 평가가 변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시간적 길이가 하루라면 어려운 예술소설을 읽기보다 아마도 오락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 전체라는 길이에서 시간을 생각하면 예술성 이 높은 소설을 인내심을 갖고 깊이 읽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다. 왜 냐하면 독서를 통해서 세계와 인생에 대한 시각과 생각이 변할 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 고민에 대한 해법을 발견하여 그 결과 행복감 (쾌락)이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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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예술성 높은 소설을 읽는 것이 오락소설이 주는 쾌락과 행복 의 총량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가 즉각적인 쾌락만을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성급한 판단이다.

미래세대를 배려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보편 적 정의와 관련된다. 즉, 누구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정의의 원 칙이 있다면, 그것에 입각해 현재 세대와 미래세대를 공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리주의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를 위한다는 명목 으로 개인의 권리라든가 존엄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의 논리는 누군가의 행복을 증가시키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사형’이나 ‘전쟁’을 정당화하는 목소리에서 공리주 의의 논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해 일부 지역에 위험시설과 혐오시설의 유치를 요구하 는 것도 공리주의의 논리이다. 이렇게 공리주의에는 보편적 정의에 부 합하지 않는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 할인율’의 문제를 이런 일반적인 공리주의에만 입각해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기 도 하다.

물론 공리주의 안에서도 이런 비판은 인지되어 왔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위 ‘수정 공리주의’이다. 고전적인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에서는 ‘최대 다수’와 ‘최대 행복’이 라는 두 가지 조건 모두의 충족이 전제가 된다. 달리 말하면 고전적 공리주의는 가능한 임의의 사람들, 즉 가급적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것 이 바람직하다는 암묵의 전제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모두를 행복 하게 하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에 원리와 현실 사이의 모순이 드러나 게 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 ‘수정 공리주의’가 제시하는 해법은 사람 수를 일 정한 범위로 고정하는 방식이다. 즉 최대 다수는 포기하고 일정 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가장 선이고, 무엇이 가장 행복인지를 생각 하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일정 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들은 이런 수정된 공리주의로 사회적 문제를 생 각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익은 어떤가를 생각할 때 우리들은 인류전체의 행복이 아니라 현재 살아있는 한국인 에게 있어서 무엇이 유리한가만을 생각한다.

이렇게 수정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부분을 유보하고 일정한 기준 에 따른 집단을 정해서 그 집단에게 있어서 무엇이 가장 쾌락이 큰가 를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미래세대를 충분히 고려하 기 어렵다. 왜냐하면 ‘최대’의 범위가 알기 쉽게 ‘지금, 여기, 살아있 는 우리들’로 한정되어 버리면 논리적으로 현재 살아있는 세대와 앞 으로 태어날 세대를 ‘경쟁’이 아닌 ‘공존’의 관점에서 다루기가 곤란 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를 생각할 때 고전 적 공리주의를 철저하게 적용하는 태도가 더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공리주의는 흔히 ‘수정 공리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에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이 상존하다. 다음에서 는 이런 ‘수정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두 가지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거 기서는 미래세대 배려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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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4) 나. 가라타니 고진의 ‘타자의 윤리학’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1941년생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 가이다. 현재 컬럼비아대학 객원교수로 근 무하고 있다. 문예비평에서 출발했으나 이후 근현대 철학 사상과 대결하면서 ‘자본주의

=민족(Nation)=국가(State)’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색하는 저술 을 다수 집필하였다.《세계사의 구조를 읽

는다》, 《역사와 반복》, 《세계공화국》,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등의 저서가 있다.

1) ‘타자’가 빠진 공공성

가라타니 고진은 현대의 ‘공공성’ 혹은 ‘공적 합의’에 관한 논의에 서 ‘타자’의 문제가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마 이너리티’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속에서 최 근의 공공성 논의는 기존의 주류 집단만의 공공성이 아니라 이민자나 사회적 소수파에 속하는 사람들과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 렀다. 이것은 ‘타자’ 인식의 진일보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가라타 니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누락되어 있다고 말하는

‘타자’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가라타니는 현재의 공적 합의에 관한 논의는 분명 사회적 구성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지만, 동시에 현재,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만을 전제로 하는 까닭에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가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4) 이미지 출처: https://www.iwanami.co.jp/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의 설명은 간단하다.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지 금 눈앞에 있는 마이너리티와는 대화가 가능하지만, 미래세대와는 대 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즉, 현재 공공성을 재구축하려는 사람들 은 대화라는 커뮤니케이션 형식에 빠져 대화 가능한 살아있는 사람들 만을 공적 논의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화’란 지금 바로 대답이 나오는 사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 대칭적인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칭적인 관계는 아주 드물게 성립할 뿐이고, 우리의 ‘대화’는 거의 비대칭적인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죽은 자나 미래의 인간과의 관계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는 기초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잊혀 진다. 공공적 합의라든가 사회적 계약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타자, 더욱이 공통감각 (공통의 규칙)을 지닌 타자에 한정되어 있다. 왜 그것에 대해 의심을 품 지 않는 것일까?(가라타니 고진, 2001: 116)

‘타자’가 빠져 있다는 가라타니의 비판이 의미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세대와 미래세대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그것은 쉽게 변경될 수 없다. 가라나티는 그런 점에서

‘비대칭적’이며 그것은 쉽게 변경될 수 없다. 가라나티는 그런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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