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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현장의 기술인력 확대와 기술혁신운동 활성화

제3절. 기술혁신의 활성화와 제도화 추진

1) 생산 현장의 기술인력 확대와 기술혁신운동 활성화

로동당은 자신들이 기술혁명의 기본 동력으로 간주한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 을 강화하기 위해 생산 현장의 기술 역량 강화, 현장 기술자들의 지위와 권한 강 화, 기술혁신을 위한 제도적 기반 강화(대안의 사업체계, 기술발전계획 작성 및 집행의 의무화), 천리마작업반 운동 강화, 작업반 내부채산제・작업반 우대제 등 물질적 유인 강화 등을 시도했다. 여기서는 일단 생산 현장의 기술 역량 및 천리

88) 변학문, “1950, 60년대 북한 생물학의 형성과 변화”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4), 25쪽.

마작업반 운동 강화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현장 기술자들의 지위와 권한 강화 및 제도적 기반 강화 문제는 대안의 사업체계를 다루면서 서술할 것이고, 물질적 유인 강화에 대해서는 3장에서 다룰 것이다.

생산 현장의 기술 역량과 관련해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고질적인 기술인력 부족에 시달렸다. 예를 들어 해방 직후 북한은 1947년도 경제 계획 완수를 위해 국영 기업에 필요한 기술 인력 중 고급 기술자 5백여 명, 중급 기술자 1천여 명이 부족했는데, 기술현장을 떠나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일하던 기술자와 일본인 기술자까지 동원해도 4백여 명이 모자랐다.89) 이런 상황을 극복 하기 위해 북한 정권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대학 15개교, 전문학교 55개를 설립했 을 정도로 기술 인력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90) 북한 정권은 전쟁 이후에 도 전후복구와 경제 건설에 필수적인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부터 대학을 포함한 각급 기술교육 기관의 복구, 확장을 추진했다.91) 그 결과 1953년 하반기 2만 명 남짓이던 기술 전문가 수가 1957년 7만 3천여 명, 1960년 13만 3천여 명, 1961년 16만 1천여 명으로 증가했다.92) 그러나 경제 의 급성장과 함께 기술 인력 수요도 늘었기 때문에 1960년대 초에도 북한은 기술 인력이 부족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있던 기술자, 전문가들도 생산 부 문 종사자는 39%에 불과했고 절반 이상이 행정 사무 부문에 종사했기 때문에, 실제 생산 현장의 기술 인력 부족은 더욱 심각했다.93) 결국 1960년 당시 경제 주 요 부문에서 대졸 기사 확보 비율은 수요의 35.4%에 불과했고, 특히 기술혁명의 핵심 부문인 기계 제작 공업에서는 20.1%밖에 확보하지 못했다.94)

로동당은 기술혁신 활성화에 필수적인 기술 인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1970년도까지 기사 및 전문가 23만 명 이상, 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기수 및 중 등 전문가를 60만 명 이상으로 늘릴 것을 결정했다. 특히 7개년 계획 기간 교육 비 지출을 두 배로 늘려 기사 및 전문가 17만 6천 명, 기수 및 중등 전문가 46만 89) 정준택, “1947년도 인민경제 발전에 관한 예정 수자 실행에 대한 전망”, 『인민』 1947. 4, 국사편찬위원회 편, 『북한관계사료집』 13 (1992), 309-314쪽, 특히 311-312쪽; 이윤금,

“인민경제 부흥과 발전에 대한 예정 수자와 노동 행정”, 『인민』 1947. 4, 같은 책, 335-345쪽, 특히 338쪽.

90) 김종항, “우리나라에서의 기술 인재 양성 사업에 대하여”, 『근로자』 1962. 7, 13-20쪽, 특 히 15쪽.

91) 김일성, “모든 것을 전후 인민경제 복구 발전을 위하여”, 『김일성저작집』 8 (평양: 조선로 동당출판사, 1980), 11-64쪽, 특히 36-37쪽.

92)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62, 363쪽.

93) 김창만, “기술 인재 양성 사업을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60년 8 월 확대 전원회의 보고)”,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61, 83-95쪽, 특히 89쪽.

94) 정기련,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은 기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우리 당의 정책”, 『근로 자』 1960. 8, 38-43쪽, 특히 40쪽.

명 이상을 새로 양성함으로써 노동자 1,000명 당 기사, 기수, 전문가 수를 1960 년 33명에서 1967년 108명으로 높일 것을 목표로 했다.95) 당시 고등교육상 김종 항에 따르면, 위와 같은 목표가 달성된다면 1960년에 비해 기사, 전문가 수가 7.5배로 증가하는 것이었고, 부문별로는 기계부문 15배, 화학부문 7배, 전기 부문 8배, 지질탐사 부문 16배 등으로 높아지는 것이었다.96) 북한 정권은 이를 위해 고급 전문가를 양성하는 대학과 중급 전문가를 양성하는 고등기술학교 등 교육기 관을 증설하여 1960-61학년도 각각 76개소와 82개소이던 대학과 고등기술학교 수가 1961-62년 92개소와 199개소, 1964-65년 98개소와 464개소로 늘었다. 교 육기관 증가와 함께 기술 전문가 수도 1962년 18만 3천여 명, 1963년 22만 3천 여 명, 1964년 29만 3천여 명으로 빠르게 늘었다.97)

기술인력 양성과 관련하여 1960년대 북한에서는 생산 현장의 노동자, 농민들 이 생산과 학업을 병행하는 ‘일하면서 배우는 체제’가 크게 확대되어 주요 공장・

기업소・광산・농장 등에 교육기관이 설치되었고, 야간 및 통신 교육망도 확충되 었다.98) 이는 로동당이 소련공산당, 중국공산당 등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농민을 인텔리로 육성하는 것을 특히 강조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일하면서 배우는 체제 는 1940년대 말부터 야간학부, 통신학부 형태로 도입되어 한국전쟁 직전 전체 대 학생 중 일하면서 배우는 학생 비율이 33.3%에 달했다.99) 로동당은 특히 기술혁 명을 핵심 국정 과제로 결정한 이후 이 체제의 확대, 강화를 더욱 강조했다.100) 이에 따라 ‘공장대학’ 설립 및 확장이 두드러졌다. 공장대학은 희천 공작기계공 장, 구성 기계공장 등 핵심 공장 및 기업소에 설립되었는데, 1960-61학년도 24개 교 설립을 시작으로 꾸준히 증설되어 1970년에는 41개교로 늘어났다. 북한 전체 대학생 중 공장대학 학생 비중도 1960-61학년도 97,000여 명 중 49,000여 명, 1963-64학년도 214,000여 명 중 149,000여 명 등 항상 과반수를 차지했다.101) 로동당은 일하면서 배우는 체제의 확대를 통해 기술혁명에 필요한 기술 인력 양 성을 꾀함과 동시에, 노동자・농민의 지적 수준을 높임으로써 근로자들의 일반 지식과 기술지식 향상이라는 당시 문화혁명의 핵심 과제도 달성하려 했다.102)

95) 김 일, 앞의 글, 173쪽.

96) 김종항, 앞의 글, 19쪽.

97)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65, 482-483쪽.

98) 정기련, 앞의 글, 42쪽.

99) 김종항, 앞의 글, 16쪽.

100) “기술 인재 양성 사업을 더욱 강화하자”, 『로동신문』 1961. 9. 1.

101) 『조선중앙년감』 1965, 483쪽.

102) 김종항, “공장, 기업소는 기술 인재 양성의 강력한 기지이다”, 『근로자』 188 (1961. 7), 8-14쪽, 특히 11쪽;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 보고,”

로동당은 기술 인력 양성 확대와 함께 천리마작업반 운동 강화를 시도했다.

이후 1970년대 초까지 로동당은 대중적 기술혁신 활동을 강화하려 할 때마다 천 리마작업반 운동의 활성화를 강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대중 적 기술혁신 운동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운동이 추구한 목표가 각 사업 장의 생산성 향상, 근로자들의 기술 지식 및 기능 수준 향상, 기업소 관리 운영 방법 개선, 운동 참가자들의 사상 개조 등 기술혁신보다 포괄적이었기 때문이 다.103) 특히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시작 당시부터 이 운동에서 ‘사상 사업’이 지닌 의의와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예를 들어 로동당은 이 운동을 “천리마운동의 심 화・발전이며 사회주의 경쟁 운동의 가장 높은 형태”라고 평가했는데, 이러한 평 가의 핵심 이유로 천리마운동과 달리 이 운동의 내용에 참가자들에 대한 사상 교 양 및 사상 개조가 포함되었다는 점을 꼽았다.104) 나아가 로동당은 공산주의 사 상 교양 강화를 통해 천리마작업반 운동 참가자들의 사상을 개조하는 것이 이 운 동의 확대와 성공을 위한 핵심 방법이라고 주장했다.105) 이처럼 천리마작업반 운 동은 기술혁신보다 더 광범위한 목표를 지향했고, 운동 시작 이후 변함없이 사상 사업의 중요성이 강조된 운동이었다.106)

그러나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사실상 대중적 기술혁 신 운동이었다. 이는 무엇보다 당시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핵심 과제가 기술혁신 이었기 때문이다. 1절에서 언급한 대로 1950년대 후반 고도성장의 결과 북한 경 제는 단순한 노력 동원이 아니라 기술혁신을 통해서만 고성장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이런 조건에서 로동당은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활성화함으로써 생산 현장 의 기술혁신 활동을 확대・강화하려 한 것이다. 로동당이 1960년 8월 전원회의에 서 각급 조직들과 천리마작업반 운동 참가자들을 향해 “기술혁신을 위한 투쟁이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주요한 내용으로 되게 하라”고 호소한 것도 이런 인식에서 비롯되었다.107) 사실 1959년 천리마작업반 운동 자체가 로동당이 1957-8년 진행

『근로자』 190 (1961. 9), 3-108쪽, 특히 53쪽.

103) 강용섭,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공산주의의 학교”, 『근로자』 1960. 9, 52-57쪽, 특히 54쪽.

104) 김일성, “당 제4차 대회 총화 보고,” 33쪽. 1950년대 후반 이후 북한 대중운동의 변화에 대해 로동당은 개별 노동자들의 혁신운동으로 출발한 천리마운동이 1958년쯤이면 ‘집단적’

혁신운동으로 발전했고, 여기에 ‘근로자들의 사상 교양 및 개조 사업’이 결합됨으로써 1959 년 초부터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백재욱, “당의 령도와 천리마운동”,

『근로자』 1961. 11, 34-39쪽, 특히 38쪽.

105) 『우리나라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천리마 작업반 운동』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1), 217-231쪽; 『천리마 기수 독본』 (평양: 직업동맹 출판사, 1963), 332-337쪽.

106) 일부 연구자들은 사상 사업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된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특징에 주목하 여 ‘천리마작업반 운동과 함께 경제발전 그 자체보다 인간 개조에 선차적인 중요성을 부여 한 김일성 노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파악했다. 이태섭, 앞의 책, 203쪽.

107) 강용섭, 앞의 글, 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