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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과학기술위원회 설립과 기술발전계획 의무화

제3절. 기술혁신의 활성화와 제도화 추진

3)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설립과 기술발전계획 의무화

2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제기된 기술혁명 과제들은 수공업 설비를 초보 적인 기계 설비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기존 설비의 효율적인 정비 및 개선을 통한 가동률 향상, 새로운 기계 및 새로운 생산 공정의 개발을 통한 생산성 향상, 반도 체나 핵 과학 등 첨단 분야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포괄적이었다.

이 때문에 공장의 최 말단 생산 단위인 작업반에서부터 중소 규모 공장, 대규모 중공업 공장은 물론 농촌의 협동농장, 각급 과학 연구 기관에 이르기까지 생산과 관련된 단위들 중 기술혁신이 강조되지 않은 곳을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기술 혁명은 몇몇 소수의 힘이 아니라 전체 군중이 참가하는 운동을 통해서만 실현가 능한 것으로 제시되었다. 김일성과 로동당은 특히 생산 현장의 기술자・노동자와 과학원을 필두로 한 연구기관에 소속된 과학자들의 역할을 크게 강조했고, 생산 현장과 과학계가 1950년대 말 현지연구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상호 유기적 연계 속에서 효율적으로 기술혁명을 추진하기를 바랐다. 로동당은 이를 제도적으로 강 제하기 위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했고, 기술발전계획 작성 및 실행을 법적 의무 사항으로 만들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오동욱을 초대 위원장으로 하여 1962년 설립된 기술

123) 이 문제는 연구 기관에 대한 지도 체제의 정비 이후 1년이 지난 1963년 말에도 제기되었 을 정도로 뿌리 깊은 문제였다. 오동욱, “사회주의 건설의 대고조와 전면적 기술혁신 운동”,

『로동신문』 1963. 12. 10.

124) 아상 과학원 서호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과학령도사』 2 (조선로동당출판사, 2002), 149-150쪽.

행정 지도 기관이다. 여기서 기술 행정 기관이라는 것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설 립 이전 과학원이 담당했던 연구 기관 관련 행정 업무를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전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신 과학원은 과학원 산하 연구소뿐 아니라 내각 각 성 산하 연구기관들의 연구 사업까지 지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125) 즉, 과학원이 행정 부담에서 벗어나 여러 기관에 분산되어 있던 연구 활동을 종합적 으로 지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설립의 주요 의도 중 하나였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 활동과 연구 기관들의 기술혁명 관련 연구를 감독, 검열하는 지도 기관의 역할도 담당했다. 구체적으로 국가과학 기술위원회는 경제 개발 과정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 한 연구에 과학자, 기술자들을 동원하고, 국내외 선진 과학기술 성과를 생산에 도 입하며, 생산 현장의 기술 관리 사업 개선・생산 공정의 기계화 및 자동화 실현 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126)

지도 기관으로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위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설립은 내각을 중심으로 한 여러 기관들 사이의 기술혁신 관 련 협력 사업에 대한 지도 주체를 명확히 한 것이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설립 이전 북한 내각은 경제 관련 과학기술적 문제들을 필요에 따라 내각 각 성 및 위 원회, 과학원, 각 지역 정권기관(인민회의, 인민위원회 등) 산하 위원회 사이의 협 력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예를 들어 내각은 1961년 각종 비료 생산 및 그 원료 확보 관련 연구를 중공업위원회와 과학원이, 간석지에서 염분을 빠르게 제거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농업성과 과학원이, 무연탄 가스화의 성과를 평양시에 도입 하는 사업을 과학원・평양시 인민위원회・평양시 가스화 대책위원회가 각각 협력 하여 진행할 것을 결정했다.127) 이때 과제를 부여받은 기관들은 과제 실행 계획 안을 작성하여 내각의 검토를 받아야 했다.

문제는 당시 북한의 내각 직제 상 제출된 계획안의 평가 및 시행 감독을 누 가 할 것인지 모호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공업위원회와 과학원의 협력 연구 계획에 대한 평가와 감독은 중공업위원장보다 직급이 높은 인사 또는 기관이 담 당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961년 당시 내각에서 중공업위원장의 상급 인사로는 125) 서호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과학령도사』 2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2), 81쪽.

126) 오동욱, “현 시기 기술 혁명의 촉진을 위한 몇 가지 문제”, 『근로자』 1963. 3, 26-31쪽, 특히 27쪽.

127) “농촌 경리의 화학화를 촉진시킬 데 대하여”(내각 결정 제61호, 1961. 4. 14), 조선중앙 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62, 179-181쪽; “화학공업을 비롯한 인민 경제 모든 부문에 무연탄 가스화를 시급히 도입할 데 대하여”(내각 결정 제99호, 1961. 6. 12), 『조선중앙년 감』 1962, 183-185쪽, 특히 184쪽.

수상(김일성), 제1부수상(김 일), 7명의 부수상이 있었기 때문에 부수상들이 이를 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당시 중공업위원장이던 리종옥이 부수상을 겸직 했기 때문에, 이는 형식 상 부수상이 부수상을 평가, 감독하는 셈이었다.128) 이러 한 상황에서 기술혁신 관련 협력 사업의 지도 기관으로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설립됨으로써,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이와 같은 모호함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었을 것이다.

생산 현장과 연구 기관에 대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감독은 기술발전계획의 작성과 집행에 대한 지도 및 통제의 형태로 진행되도록 만들어졌다. 기술발전계 획은 “각 공장, 기업소의 구체적인 기술 발전 방향과 이를 위한 조직적, 기술적 대책을 반영한 계획”으로서, 각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에 대한 계획”이었다.129) 1960년대 초 기술발전계획의 주요 항목은 기술 경제적 기준, 선진 과학기술 도입 계획, 생산 공정의 기계화 및 자동화 계획, 품이 많이 들고 힘든 작업의 기계화 계획, 새 기계・기구 및 중요 시제품 생산 계획, 과학 연구 및 중요 시험 사업 추 진 계획 등이었다.130) 이 중 ‘기술 경제적 기준’은 해당 공장 또는 기업소의 생산 능력 및 설비 이용 기준, 원자재 소비 기준, 제품 생산 시간 기준, 품질 기준 등 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기술 경제적 기준은 생산, 자재, 자금, 노동력 등 공장 과 기업소의 생산과 관련된 여타 계획 작성에 필요한 기초적 내용을 총괄한 것이 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기술 경제적 기준을 포함한 기술발전계획을 다른 계 획들보다 한 분기 먼저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131) 역으로 기술발전계획 보다 늦게 작성되는 계획들은 작성 당시의 기술 수준이 아니라 기술발전계획에서 예견한 미래의 발전된 기술을 기준으로 삼아야 했다.

기술발전계획이 정확하게 언제 도입되었는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는 없지 만 늦어도 1950년대 말에는 이미 시행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32) 기술발전계획 을 전면적 기술혁명 실현의 주요 수단으로 간주한 로동당은 1960년 하반기부터 기술발전계획의 중요성을 본격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로동당은 1960년 8월 전원회의 결정서에 전면적 기술혁명 추진과 함께 ‘기술혁명에서 제기 되는 모든 문제들을 사전에 예측, 해결하기 위한 기술발전계획의 정확한 작성’을

128) 1961년 당시 북한 내각 성원에 대해서는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61, 131 쪽 참고.

129) 김호윤, “공장 기업소들에서의 기술발전계획”, 『근로자』 1962. 5, 46-48쪽, 특히 46쪽.

130) 배룡천, “기술 혁명과 기술발전계획”, 『근로자』 1963. 13, 46-48쪽, 특히 46쪽.

131) 한재숙, “기술발전계획의 의의와 그 작성 방법,” 『경제지식』 1960. 10, 7-12쪽. 특히 12쪽.

132) 당시 북한에서 기술발전계획은 1년 단위로 작성되었고, 1960년도 출판된 북한 문헌에서

‘지난 시기 기술발전계획 작성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을 보면, 늦어도 1960년 이전에 이미 기술발전계획이 작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재숙, 앞의 글, 7쪽.

포함시켰다.133) 이는 로동당이 기술발전계획을 “기술혁신의 가장 약한 고리를 추 켜세우며, 걸린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하도록 보장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134) 로동당은 또 기술발전계획을 치밀하게 작성하고 실 행함으로써 기술혁신에 무관심하고, 기술혁신을 끈기 있게 진행하지 않으며, 기술 혁신의 성과를 상호 교환하는 데 무관심한 일부 간부들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고 강조했다.135)

이러한 인식 속에서 1962년 로동당은 1963년부터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시행을 법적 강제 사항으로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1962년까지는 공장과 기업소들 이 기술발전계획을 형식적으로 작성하거나, 작성한 계획을 정확하게 실행하지 않 아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63년부터는 모든 기업들이 생산 계 획 수립 전 반드시 기술발전계획을 정확하게 작성하고 그것을 철저히 집행해야만 했다.136) 기술발전계획이 “기술혁명 과업을 구체화한 당과 정부의 지령이며, 무조 건 집행해야 할 법적 의무”가 된 것이다.137) 이를 통해 로동당은 각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을 법적으로 강제하고, 기술발전계획을 기준으로 하여 미래의 기술 발전 이 가져올 생산성 증가분을 생산 계획에 포함시키고자 했다.138)

로동당이 기술발전계획을 기술혁명 실현을 위한 핵심적인 제도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기술혁명 실적이 로동당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1960년대 중반 북한 문헌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64년 말 로동당은 1965년을 7개년 계획 성 공을 가름할 해로 판단하고 이 해의 경제 계획을 반드시 완수할 것을 강조했다.

이 때 로동당은 경제 전 부문에 대한 집중적・계획적 지도 강화와 기술혁명의 강 력한 추진을 계획 완수에 필수적인 요소로 꼽았다. 나아가 로동당은 기술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산 계획과 함께 “기술발전계획을 직접 틀어쥐고 그 실행을 위한 물질적, 기술적 조건을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중 요하다고 강조했다.139) 로동당은 1965년 초에도 하부 단위들에 대한 성, 국, 기업 소들의 기술지도 강화를 기술혁명 촉진의 핵심 문제로 강조하면서, 기술발전계획

133) 한재숙, 앞의 글, 7쪽.

134) 리홍균, “기술혁신은 짜고 들어 추진시켜야 한다,” 『근로자』 1962. 14, 16-19쪽, 특히 18쪽.

135) “도처에서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기술”, 7쪽.

136) 오동욱, 앞의 글, 30쪽; “기술 준비의 선행과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경제지식』 1964. 3, 40-44쪽.

137) 오동욱, “사회주의 건설의 대고조”; 전정희, “대중적 기술혁신운동의 새로운 형태”, 『근로 자』 1964. 9, 29-35쪽, 특히 31쪽.

138) 황금택, “생산 준비를 철저히 선행시키자”, 『경제지식』 1964. 12, 1-5쪽; 최두렬, “생산 에 대한 기술 준비”, 『경제지식』 1964. 12, 6-10쪽.

139) “7개년 계획 수행에서 결정적인 전진을 이룩하자,” 『근로자』 1964. 24, 2-5쪽, 특히 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