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과도기 논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된 이른바 속도와 균형 논쟁도 1960년대 북한에서 사상성을 주요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역할 을 했다. 속도와 균형 논쟁은 경제 성장의 속도를 얼마나 빠르게 할 것인지, 경제
58) 여기서 ‘공산주의의 완전 실현’은 무계급사회이면서 동시에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하여 “능 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 사회를 의미한다.
59) 과도기에 대한 스탈린, 흐루시초프, 마오쩌둥의 입장은 이태섭, 앞의 책, 358-363쪽에서 정리.
60) 과도기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은 김일성,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로레타 리아 독재 문제에 대하여”(1967. 5. 25), 『김일성저작집』 21, 259-276쪽에 자세히 담겨 있다.
이와 관련하여 황장엽은 김일성의 이 연설이 “북한 사회를 특이한 형태의 극좌로 몰아간 전환 점”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황장엽,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서울: 한울, 1999), 148쪽.
61) 이태섭, 앞의 책, 429-430쪽. 갑산파나 그들에 동조한 인사들이 작성한 문헌을 접할 수 없 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고, 다만 이들의 숙청 이후 이들을 비 판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연설이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속도와 균형 문제에 대한 입장 등 이후 서술하게 될 갑산파의 견해도 모두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판에서 정리한 내용임을 미리 밝혀둔다.
62) 김일성, “사회주의 경제의 몇 가지 리론 문제에 대하여―과학교육부문일군들이 제기한 질 문에 대한 대답, 1969. 3월 1일,” 『근로자』 1969. 3, 2-19쪽.
각 부문들의 균형 발전은 어느 정도까지 지향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것으 로서, 이 역시 1960년대 중반 김일성 등 당 주류와 갑산파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논쟁은 구체적으로 대외 관계 악화에 따른 자립 노선 강화, 병진 노선 채택, 북한 사회의 이완 등으로 인해 7개년 계획 실행에 차질이 빚어짐에 따라 촉발되 었다. 이 때 김일성과 로동당 주류는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고성장이 필요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들과 달리 갑산파는 당시 북한이 고성장 기조를 유지할 수 없는 대내외적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공업화가 상당히 진전 된 1960년대 전반기 상황에서 1950년대 후반과 같은 고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보 았다. 이들에게 대소 관계 악화에 따른 외부의 물질적・기술적 지원 급감, 자립 경제 건설 노선 및 병진 노선 추진에 따른 자원 배분 왜곡 등도 고성장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63) 이들은 이러한 상황 인식 속에서 경제 성장 목표를 낮추고, 자립경제 노선 및 병진 노선을 완화하며, 중공업과 경공업의 균형 발전을 통해 인민 생활 향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4)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속도와 균형 문제에 대해 당 정책 해설서인
『근로자』를 통해 표명된 로동당의 공식 입장은 일관되게 ‘높은 속도를 우위에 둔 속도와 균형의 동시 추구’였다.65) 1961년 11월 『근로자』에 실린 한 기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로동당의 공식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로동당 은 높은 속도만을 추구하면서 균형성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항상 경계했다. 경제 각 부문이 균형적으로 발전할 때에만 높은 성장 속도를 유지할 수 있고, 고성장 만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각 부문 간 균형이 무너져 결국 발전 속도도 느려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은 계획 경제를 통해 경제 각 부문의 균형 발전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동당에게 계획성과 균형 발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높은 발전 속 도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부문 간 균형도 각 부문을 항상 같은 속도로 발전 시킴으로써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재 부문처럼 더 중요한 부문을 먼저 발전 시킨 토대 위에서 다른 부문의 성장률을 높임으로써 달성되는 ‘적극적’ 균형을 의 미했다. 이러한 인식은 높은 속도에 치중하여 균형 발전을 소홀히 하는 것보다
“균형성을 위하여 경제 발전의 속도를 늦추려는 소극적이며 보수적인 편향”을 더
63) 김정일, “반당반혁명분자들의 사상여독을 뿌리빼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울 데 대하 여”(1967. 6. 15), 『김정일선집』 1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230-240쪽, 특히 234쪽.
64) 경제와 관련한 갑산파 주장의 개요는 이정철, 앞의 글, 75쪽에서 정리.
65) 이정철은 이를 ‘높은 속도를 위한 적극적 균형론’으로 표현했다. 같은 글, 69쪽.
욱 경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소극적’ 균형, 즉 경제 계획 작성 시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부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부문들의 성장률을 낮게 설정함으로써 유지 되는 균형은 배격의 대상이었다. 대신 동원 가능한 자원을 모두 이용할 수 있고 예상되는 난관도 다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적극적으로” 계획을 수 립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66) 전후 북한의 공식적인 경제 발전 노선인 ‘중공 업의 우선적 발전 및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 발전’은 이러한 로동당의 공식 입장 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속도와 균형 논쟁이 본격화하기 전인 1960년대 초 로동당은 자신들의 역사 적 경험을 내세워 위와 같은 지향을 정당화했다. 1950년대 후반 북한 경제의 고 도성장이 바로 높은 속도를 우위에 두고 속도와 균형을 동시에 추구했기 때문에 거둔 성과였다는 것이다. 이는 1960년대 로동당의 경제 분야 이데올로그 중 한 명이면서 1967년 갑산파 숙청 이후 로동당 과학교육부장을 맡은 최중극이 1963 년 3월 『근로자』에 게재한 글에 잘 드러났다.
최중극에 따르면 전후 복구 시기 로동당이 소비재 생산에 비해 생산재 생산 의 우선적 발전을 추구한 결과 1954-56년 생산재와 소비재 생산의 연 평균 성장 률이 각각 59.4%와 28.0%로 크게 차이가 났다. 그러나 1957-60년에는 두 부문 의 연 평균 성장률이 각각 37.7%와 34.9%로 거의 비슷해졌다고 한다. 이는 생산 재 부문의 우선적 발전이 소비재 부문의 빠른 성장을 가져와 궁극적으로 둘 사이 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 증거였다. 공업과 농업의 균형 문제도 마찬가 지였다. 1954-60년 로동당은 연 평균 공업 성장률이 농업의 그것보다 약 4배나 될 정도로 공업의 우선적 성장을 추구했다. 최중극은 이를 통해 농업을 새로운 기술적 토대 위에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그 결과 농업 생산 역시 연 평균 10%로 빠르게 성장했다고 주장했다.67) 요컨대 로동당은 생산재 공업의 우선 발전에 기초하여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킨 후, 발전한 생산재 공업을 토대로 소비재 공업 및 농업을 빠르게 발전시켜 균형을 달성한다는 입장이었다.
실제로도 로동당은 7개년 계획을 입안할 때 중공업의 급속한 발전을 추구했 던 1950년대 후반에 이은 1960년대 초를 ‘적극적 균형 달성을 통한 인민 생활 향상’ 국면으로 상정했다. 이는 로동당이 1950년대 후반을 거치며 상대적으로 발 전한 중공업의 생산력과 기술력을 토대로 7개년 계획 전반기 3년 동안 경공업 및
66) 이상 속도와 균형에 대한 로동당의 공식 입장에 대해서는 리석심,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높은 속도와 균형 문제”, 『근로자』 1961. 11, 46-52쪽, 특히 46-47쪽에서 정리.
67) 최중극, “우리나라 인민 경제 발전에서의 속도와 균형”, 『근로자』 1963. 3, 32-39쪽, 특히 34-36쪽.
농업 발전에 치중하기로 결정한 데서 드러난다. 물론 이와 같은 로동당의 구상은 원활하게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1963년 9월 개최된 전원회의 내용을 보면 그 때까지도 로동당은 당시가 균형 달성 국면이라는 입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를 건설한 보람이 제철소의 웅장한 굴뚝이 아니 라 인민들의 유족한 생활에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면서 아래와 같이 균형 발전 에 기초한 인민 생활 향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부 사람들은 공업에서 생산수단생산이 소비재생산보다 반드시 높아야 하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서도 소비재생산보다 생산수단생산에 힘을 더 넣어야 한다 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다 교조주의적인 것입니다. 물론 우 리 공업에서는 지금 생산수단생산이 소비재생산보다 높으며 앞으로도 계속 높 을 것입니다. 그런데 … 우리가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생산을 끊임없이 늘 이고 기술을 발전시켜 인민생활에 필요한 경공업제품과 농산물을 더 많이 생 산하기 위한 것이며 결국은 인민들을 잘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중공업을 계속 확대하는 데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인민생활을 높이기 위하여 그것을 잘 리용하는데 힘을 넣어야 하며 인민소비품생산에 필 요한 원료림, 자재를 더 많이 생산하여야 합니다.68)
위 인용문을 보면 당시 로동당 내에 생산재 부문에 투자를 집중할 것인지, 아니면 생산재와 소비재 부문에 대한 투자의 균형을 맞출 것인지를 두고 이견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가 병진 노선을 채택한 직후로서 애초 계획과 달리 국방공업을 포함한 중공업에 대한 국가 투자를 늘려야 할 필요성이 높아진 상황 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논쟁이 발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 김일성은 분명한 어조로 소비재 생산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다. 심지어 김일성은 강철 생산량을 언급하면서 높은 속도 위주의 경제 정책을 수정할 필요 성까지 언급했다. 원래 로동당은 7개년 계획이 끝나는 시점에 연 강철 생산량을 220만∼250만 톤으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김일성은 이 목표가 지나치게 높다고 지적한 것이다. 대신 김일성은 경제를 잘 운용한다면 당시 연 강철 생산 량 100여만 톤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아가 김일성은 7개년 계획이 소비보다 축적에 너무 치중하여 작성되었다고 하면서, 축적과 소비의 균형을 이 루는 것이 “당면한 정세의 요구”라고 주장했다. ‘미제의 도발 강화’와 소련의 수 정주의 때문에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던 당시 상황에서 소비품 수요도 모두
68) 김일성, “현 시기 우리나라 인민경제의 발전방향”, 3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