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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중요성 상승과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

제2절. 기술혁명의 과제와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

2) 과학기술의 중요성 상승과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

로동당이 기술혁명을 핵심 국정과제로 결정하면서 북한 내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먼저 로동당 지도부가 자신들의 시대를 ‘과학기술의 성과로 살아가야 할 시기’로 규정하면서 과학기술 분야 간부 및 전문가뿐 아니라 모든 간부와 당원들이 높은 과학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66) 이에 따라 당과 정부 내에서도 195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높아지던 테크노크라트의 위상이 상승 했다. 예를 들어 당의 최고위급 인적 구성을 보면, 1956년 상무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 16명 중 두 명이었던 경제 및 기술 분야 테크노크라트가 1961년에는 정치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 16명 중 4명으로 증가했다.67) 내각에서도 중공업위 원회가 금속화학공업성, 전기・석탄공업성, 기계공업성으로 분리, 확대되고 국가 과학기술위원회가 신설되었으며, 대부분 과학기술계 출신들이 이들 기관의 책임자 를 맡게 되었다. 과학원 역시 1960년 전후 이공계 분야를 중심으로 확대 재편되 었고, 처음으로 과학기술계 출신이 원장에 임명되었다.68)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과학 연구 또는 과학계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69) 이보다는 과학 연구를 포함한 과학자들의 활동에 대한

64) 리종옥, “우리나라에서의 기술 혁명”, 22쪽. ‘산소 취입법’은 산소를 불어 넣어 높은 온도 를 유지하면서 화학 반응을 빨리 진행시키는 방법이다. 제철, 제강에 산소 취입법을 도입하 면 용광로의 온도를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철의 환원도 훨씬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65) 실제로는 “중공업 골간에 살을 붙이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로동당은 1960년대 후반, 심지어 1970년대 들어서까지도 이 문제를 계속 강조했다. 이에 대해서는 3, 4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66) 김 일, 앞의 글, 175쪽; 김승일,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임무와 간부들의 정치 실무 수준 제고”, 『근로자』 1961. 10, 27-31쪽, 특히 27-28쪽.

67) 이태섭, 앞의 책, 167, 426쪽. 1956년 로동당 최고 지도부 중 테크노크라트로는 문평제련 소 지배인, 산업상, 중공업상 등을 역임한 상무위원 정일룡과 경공업상, 당 공업부장 등을 역임한 후보위원 리종옥이 있었다. 1961년에는 이 두 사람이 정치위원이었고, 상업상과 재 정상을 역임한 리주연, 해방 후 주요 중공업 공장에서 당 및 행정 책임자로 사업하는 등 북 한 중공업 발전에서 많은 역할을 한 현무광이 후보위원이었다. 이상 정일룡, 리종옥, 현무광 등에 대한 정보는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Ⅰ』 (선인, 2003), 332-333, 463쪽을 참고.

68) 김근배, 앞의 글, 18쪽.

69) 필자가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 북한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는 각각 기초과학 종사자와 공학 종사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연구기관에서 연구하는 사람’과 ‘생산 현장에 속해있

정치권력의 간섭과 통제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높아진 것은 기술혁명이 핵심 과제로 부상했기 때문이었고, 로동당이 보기에 과학기술의 의의 역시 그 무엇보다 ‘기술혁명에 적극 복무하는 것’, ‘국내 자원에 입각한 자립적 공업 체계 확립에 집중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 이다.70) 이에 따라 로동당은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 달성을 목표로 한 과학기술 정책을 펴고자 했고, 기술혁명 실행 역량도 생산 현장을 기본으로 하고 전문 연 구 활동이 이를 보조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말 그대로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 책을 추진한 것이다.

기술혁명 실행 역량과 관련해 로동당은 기술혁명이 소수의 전문가가 아니라 전 인민적 참여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표 2-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제기된 기술혁명 과제들이 경제 전 분야에 걸친 방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로동당은 1961년도 기술혁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로 대중의 사상의식을 계발하고 그들의 적극성과 창발성을 발양시켜 대중적 기술혁신운동을 광범히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1960년대 초에는 생산 현장의 대중적 기술 혁신운동을 기술혁명의 기본 동력으로 보았다.71) 로동당이 대중적 기술혁신운동 을 주 역량으로 간주한 이유는 북한의 역사적 경험과 ‘노동자’라는 존재에 대한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의 인식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북한의 역사적 경험이란 로동당이 보기에 1950년대 말 이후 생산 현장에서 거둔 기술혁신의 성과가 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58년 진행된 대중적 기술혁 신운동인 ‘10주년 기념 경쟁운동’을 통해 600건 이상의 기술혁신이 완성, 보급되 었고, 천리마작업반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 상반기에는 공업 전체에서 57명 당 한 건, 그 중 천리마작업반에서는 2.7명 당 한 건의 창의발명이 나올 정도로 생 산 현장의 기술혁신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72)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에서 노동자 들이 차지한 비중도 핵심 전기 설비 공장인 대안 전기 공장에서 1961년 12월 대 안의 사업체계 도입 이전까지 제기된 창의고안 중 노동자들이 제안한 건수가 92%에 달했을 정도로 매우 컸다.73) 이처럼 1950년대 말 이후 기술혁신에서 생산 현장의 노동자들이 차지한 비중이 컸기 때문에 로동당은 자연스럽게 노동 대중을

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공학도 ‘기술과학’으로 부른다. 이런 점을 반영하여 이 논문에서 ‘과학계’는 기초과학과 공학을 포함하여 연구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 의 집단을 의미한다.

70) 김일성, “당 제4차 대회 총화 보고”, 51-52쪽; “도처에서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기술”, 5 쪽.

71) 한인호, 김덕진, 앞의 글, 35쪽.

72) 강호제, 앞의 책, 197, 297쪽.

73) 이태섭, 앞의 책, 277쪽.

기술혁명 실행의 주 역량으로 파악했다.

기술혁신과 관련하여 노동자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인식은 ‘누구보다 기술혁 신의 아이디어가 많은 노동자들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 기술혁신을 잘 이룰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 나오게 된 논리 구조는 기술혁 명을 핵심 과제로 결정한 1960년 8월 전원회의에서 한 김일성의 발언에 잘 드러 났다. 김일성이 보기에 노동자들은 “날마다 노동에서 새로운 산 경험을 쌓으면 서” 항상 일을 더 쉽게 하면서도 생산을 더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 에 누구보다 기술혁신의 아이디어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다루는 기계만, 그것도 “경험적으로만 알고 이론적으로는 잘 모르는”

약점이 있었다. 따라서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 이런 약점을 보완하면 노동자들의 기술혁신 아이디어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74) 1958년 김일성이 과학연구 기관 소속 연구자들을 생산 현장에 파견하여 과학 연구와 기술지원을 병행하게 한 현지연구사업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기술혁신 성과가 나온 것도 이러한 판단 을 강화했다.75) 로동당이 과학기술 전문가와 노동자들 사이의 창조적 협조를 강 조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있었다.76) 로동당은 ‘특정한 사람만이 과학과 기술을 할 수 있다’는 기술 신비주의는 이러한 창조적 협조를 가로막는 것으로서 극복의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로동당이 노동자들을 기술혁명의 주 역량으로 간주했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역할을 노동자를 보조하는 것으로 국한하지는 않았다. 로동당은 과학 연구의 중 요성 역시 이전에 비해 크게 강조했다. 다만 경제 현장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 해결에 연구를 집중할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해방 직후부터 계속 제기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은 해방 정국에서 인텔리들의 건국 임무로 대중 교 양 사업, 문맹 퇴치 사업, 후대 교육 사업 등과 함께 ‘경제 건설 투쟁에 적극 참 가’를 꼽았다.77) 과학계를 향한 로동당의 이러한 요구는 1950년대 후반 들어 로 동당이 해외 원조의 급감에 따른 자원 및 기술의 공백을 극복하기 위해 자립경제 노선을 강화함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국내 부존자원에 의거 한 자립 경제 건설에 연구 역량을 집중하는 것을 ‘과학기술에서 주체를 세우는 문제’로 표현했다.78) 연구 주제 선정에서 개인적 취향을 국가적 필요보다 우선시

74) 김일성, “기술혁명을 성과적으로 수행할 데 대하여”, 190-191쪽.

75) 현지연구사업의 자세한 내용은 강호제, 앞의 책, 제3장 “천리마운동과 기술혁신운동의 결 합”을 참고할 것.

76) 리영석, 황기희, 앞의 글, 51쪽; 정기련, 앞의 글, 19쪽.

77) 김일성, “건국사업에서 인테리들 앞에 나서는 과업”(1945. 11. 17), 『김일성저작집』 1 (평 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420-427쪽.

하는 것, 연구를 성과가 나올 때까지 진행하지 않고 일회적으로 끝내는 것 등 과 학계가 주체 확립을 위해 극복해야 할 문제점도 함께 제기되었다. 심지어 김일성 은 과학자들이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며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에 중심을 두어야 지 “쓸데없는” 공상적인 것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79)

위와 같은 분위기는 1960년대에도 계속되어 과학원 지도부는 과학자들이 연 구 주제를 선정하기 전에 생산 현장의 간부들과 광범위한 토론을 진행할 것을 요 구했다.80) 북한 내 부존자원의 경제적 이용을 위한 연구, 현존 설비 가동률 극대 화 방안 연구, 연구 사업을 인민경제에 더욱 밀접히 연결시키는 것 등은 여전히 과학계의 핵심 과제로 강조되었다.81) 당연히 과학계에 부과된 연구 과제 역시 기 술혁명 과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기계화・자동화 부문에는 자동차 주 요 부속 및 주물 생산의 전문화・자동공작 기계 생산・벼 모 이앙기 개발 등이 과제로 제기되었고, 금속공학 부문의 과제로 금속공업과 마찬가지로 무연탄 이용 을 극대화한 제철법 완성・유색금속 부문 확대 등이 강조되었다.82) 화학공학 부 문에서는 농업 생산성 향상에 필수적인 화학비료와 농약 관련 연구, 화학공업과 경공업에서 강조되었던 합성섬유와 합성수지 연구 등이 핵심 과제로 꼽혔다.83) 채취공학 역시 광업 부문의 핵심 과제였던 굴진(掘進) 방법 개선, 수력(水力) 채탄 법 공업화 연구 등이 주요 연구 과제로 강조되었다.84) 기초과학에 대해서도 역학 부문은 기계 설계의 이론적 기초인 탄성소성 역학이나 기계 동역학, 물리학은 물 리화학적 방법을 동원한 동력 원천 연구, 화학과 생물학 부문은 국내 자원의 효 과적 이용에 대한 연구 등 생산과 직결된 연구가 강조되었다.85) (<표 2-2> 참고.) 로동당이 이처럼 기술혁명 실현에 기여하는 과학기술 정책을 지향했기 때문에 이 시기 로동당의 구체적인 조치들 역시 철저하게 현장의 기술혁신을 중시하는 방향 78) 1950년대 후반 과학기술의 주체 확립을 강조한 문헌으로는 백남운,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 보고”, 『과학원 통보』 1958. 1, 3-17쪽; “조선로동당 제1차 대표자회 결정 실현을 위 한 과학자들의 임무”, 『과학원 통보』 1958. 3, 1-4쪽 등 다수가 있다.

79) 김일성, “5개년 계획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조선로동당대표자회 결론, 1958. 3.

6), 김일성저작집 12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102-136쪽, 특히 125쪽.

80)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60년 12월 확대 전원회의 결정 실행을 위한 과학원 제23차 상 무위원회 결정(요지)”, 『과학원통보』 1961. 2 , 1-3쪽, 특히 2쪽.

81) 강영창,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새로운 앙양을 위하여”, 『과학원통보』 1961. 5, 1-6 쪽, 특히 3-5쪽.

82) 한도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60년 8월 확대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혁명 과업의 실천 을 위한 기계화 및 자동화 부문 과학 일군들의 당면 과업”, 『과학원통보』 1960. 5, 26-29 쪽; 김인식, “금속 부문 7개년 계획 과제.”

83) 리승기, 앞의 글, 5-6쪽.

84) 신문규, “석탄 공업 부문에서의 당의 집중화 정책과 기술혁신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과학 연구 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 『과학원통보』 1962. 3, 1-7쪽.

85) 최재오, “기초과학을 급속히 발전시킬 데 대하여”, 『과학원통보』 1963. 3,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