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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성 제고와 기술혁명을 통한 고성장 추구

1960년대 중반 북한의 대내외 상황을 감안하면 적어도 경제적 관점에서는 갑산파의 주장이 더 현실적이었다고 볼만한 면이 있었다. 김일성과 당 주류도 당 시 상황에서 국방력 강화와 고성장을 동시에 추진하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 했고, 이 때문에 전체 당원과 인민들에게 “더욱 긴장되고 동원된 태세를 견지”할 것을 크게 강조했다.85) 그러나 로동당 주류는 객관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고성장을 유지해야 하며, 또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1964년 들어 김일성 등이 높은 속도를 다시 강조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남 한 정세와 국제 정세,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들의 판단 때문이었다. 이들은 당시 대외 정세가 급변하면서 위기가 고조되던 상황을 자본주의 진영 대 사회주 의 진영, 제국주의 세력 대 반제 세력 사이의 모순이 첨예해지는 현상으로 파악 했다. 나아가 이들은 급변하는 정세를 자신들이 추구하는 혁명과 통일에 유리하 게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여 로동당은 1964년 2월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북조선, 남조선, 국제적 혁 명 역량 강화’, 즉, ‘3대 혁명 역량 강화’를 결정했다.86) 이 결정 이후 남한 및 국 제 정세에 대한 로동당의 관심과 언급이 크게 늘어났다.87) 1965년 10월 10월 로 동당 창건 20주년 행사에서 한 김일성의 연설은 당시 정세와 당면 과업에 대해 로동당 주류가 어떻게 인식했는지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현 시기 우리의 당면한 최대의 과업은 공화국 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하고 우리의 혁명 기지를 더욱 굳게 다지며 남조선 인민들의 혁명 투쟁을 백방으로 지원하며 국제적 혁명 력량과의 련대성을 계속 강화함으로써 남조선 을 미제국주의의 예속에서 해방하고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입니다.88)

85) 신근필,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병진”, 근로자 1966. 11, 19-25쪽, 특히 25쪽.

86) 김일성, “조국통일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혁명 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하자”(1964. 2. 27),

『김일성저작집』 18, 246-266쪽, 특히 249쪽.

87) 『근로자』에서 경제 건설과 남한 및 국제 관계를 다룬 글의 비중도 당 주류의 정세 인식과 연동하여 크게 달라졌다. 구체적으로 1960-61년에는 전자가 후자보다 세 배 가까이 많았지 만, 위기가 고조된 1962-63년 그 수가 거의 비슷해졌고(1962년 30:25, 1963년 31:26), 1964년 이후에는 후자가 전자보다 더 많아졌다(예를 들어 1964년 23:36, 1965년 25:33).

88) 김일성, “조선로동당 창건 20주년에 제하여”, 『근로자』 1965. 20, 2-24쪽, 특히 21쪽.

따라서 김일성과 당 주류가 1964년 들어 높은 속도를 강조한 것은 위와 같은 정 치적 과제 실현에 필요한 물적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이들은 갑산 파처럼 북한의 경제 상황만이 아니라 남한과 국제 정세를 포함한 정치적 필요성 까지 고려한 결과 고성장 전략을 유지하려 했다.

김일성과 당 주류는 1963년 이후 남한 정세가 자신들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따라서 통일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판단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실업자가 700만 명에 달하고, 절량(絶糧) 농가는 130만 호나 되며, 무주택 자가 800만 명이 넘는 등 남한 경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보았다.

이에 더해 ‘4대 의혹 사건’, ‘삼분 폭리 사건’ 등 남한 집권 세력의 부패도 매우 심해서 민심 이반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89) 1960년대 중반 남한 상황에 대한 로동당 주류의 인식은 1965년 4월 인도네시아 알리 아르함 사회과 학원 강의에서 김일성이 한 다음과 같은 발언에 집약되어 나타났다.

남조선의 민족경제는 전면적으로 파산되었고 공업 생산의 수준은 해방 당시의 85%밖에 되지 않는다. 남조선 농업도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농업 생산량 은 해방 당시에 비하여 3분의 2로 떨어졌다. 지난날 우리나라의 곡창지대로 알려졌던 남조선이 오늘에 와서는 해마다 80만-100만 톤의 알곡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만성적 기근 지대로 되었다. 현재 남조선의 실업자 및 반실업 자 수는 약 700만 명에 달하며 매해 춘궁기마다 100만 호 이상의 농가가 절 량에 허덕이고 있다. … 인민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권리 상태에 있으며 테 로와 폭압 밑에서 살고 있다.90)

나아가 김일성과 당 주류는 정치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남한 민중들의 저항이 고조되고 있다고 판단했다.91) 예컨대 이들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추 진에 의해 촉발된 6.3 항쟁의 근본 원인이 남한의 심각한 경제 위기와 부패한 정 권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라고 인식했다.92) 남한 상황을 이와 같이 파악한 로동 당은 ‘남조선 혁명론’에 기초한 대남 전략을 활발히 전개했다.93) 이들은 남한 민

89) 강영철, “남조선에서의 심각한 경제 위기”, 『근로자』 1963. 14, 34-41쪽; 정신용, “군사 정권이 해놓은 일이란 무엇인가,” 『근로자』 1963. 16, 39-44쪽; 신 복, “구악을 무색케 하 는 신악”, 『근로자』 1964. 22, 28-33쪽 등.

90) 김일성,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조선 혁명에 대하여”, 『근로 자』 1965. 8, 2-31쪽, 특히 26쪽.

91) 윤영호, “남조선에서의 로동 운동의 앙양”, 『근로자』 1964. 4, 27-31쪽; 최창진, “남조선 인민들 속에서 고조되고 있는 조국 통일 지향”, 『근로자』 1964. 10, 38-42쪽; 백상철, “남 조신 인민 투쟁의 20년”, 『근로자』 1965. 16, 28-34쪽 등.

92) 하앙천, “남조선 청년학생들의 6.3 봉기에 대하여”, 『근로자』 1964. 13, 8-17쪽, 특히 9쪽.

중들이 더욱 거세게 저항해야 하며, 이를 조직적으로 이끌기 위한 남한 내 지하 당 조직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를 위해 북한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94) 로동당은 공개적으로 남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안하는 등 정치적 공세도 강화했다.95)

국제 정세와 관련하여 로동당은 당시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 아 등에서 ‘미제와 반제 진영 사이의 대격돌’이 진행 중이라고 판단했다.96) 이들 은 특히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동남아시아 전초 기지”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제 3세계 및 세계 전략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핵심적인 전쟁이라고 보았다.97) 이미 3대 혁명 역량 강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한 로동당이 국제적인 혁명 역량과 단결하여 미국을 고립, 약화시킬 수 있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98) 특히 1964년 8월 소위 ‘통킹만 사건’ 발생 이후 미국 이 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 이 전쟁에 대한 북한 정권의 관심이 높아졌 다.99) 북한 정권은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남한 정권을 비난했고, 1965년 3월 ‘베 트남 인민의 요청이 있을 시 언제든지 지원군을 파견’한다고 결정했으며, 같은 해 5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베 트남 전쟁 지원 결의문을 채택했다.100) 로동당은 1966년 당 대표자회에서 베트남 문제에 대한 성명을 채택하여 베트남 지원 입장을 다시 강조했다.101)

93) 이종석, 앞의 책, 379쪽.

94) 림춘추, “남조선에서 혁명적 당 창건은 혁명 승리의 주요 담보”, 『근로자』 1965. 1, 23-28 쪽; 하앙천, “6.3 봉기 후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과 청년학생, 지식인들의 임무”, 『근로자』

1965. 4, 12-23쪽; “거족적 투쟁으로 한일 회담을 분쇄하자”, 『근로자』 1965. 6, 2-11쪽.

95) 북한 정권은 1964년 3월 한일회담 분쇄, 반미반일 통일전선 결성, 남북 경제・문화 합작, 인사 및 서신 교류, 대남 경제 원조, 남한 실업자의 북한 유치 등을 제안했다. “최고인민회 의 호소문: 남조선 인민들과 제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 및 남조선 국회의원들에게”, 『북한최 고인민회의자료집』 제2집, 1307-1310쪽.

96) 허 남, “미제는 동남아세아에서 쫓겨나고야 말 것이다”, 『근로자』 1964. 4, 38-44쪽; 문영 환, “미제는 라오스에서 손을 떼야 한다,” 『근로자』 1964. 15, 34-39쪽; 박왕섭, “반제 투 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진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의 앞길을 가로막을 힘은 없다”, 『근로자』

1965. 7, 39-44쪽 등.

97) 최철용, “반제 투쟁이 더욱 고조된 한 해”, 『근로자』 1964. 24, 35-43쪽, 특히 36쪽; 박순재,

“세계 제패를 위한 미제의 군사 전략과 그 파산”, 『근로자』 1965. 22, 39-48쪽, 특히 42-44쪽.

98) 조진구, “중소대립, 베트남 전쟁과 북한의 남조선혁명론, 1964-68”, 『아세아연구』 제46권 4호 (2003), 227-256쪽, 특히 241-243쪽.

99) “민주 웰남에 대한 미제의 전쟁 도발 책동은 실패를 면할 수 없다”, 『근로자』 1965. 4, 37-40 쪽; 고순일, “궁지에 빠진 미제의 동남아세아 정책”, 『근로자』 1965. 11, 43-48쪽; 류영표, “제 국주의 침략 세력은 파멸을 재촉하고 있다”, 『근로자』 1965. 24, 38-44쪽, 특히 38-40쪽 등.

100) 박광선, “남조선 국군은 민족의 군대, 인민의 군대로 되어야 한다”, 『근로자』 1965. 13, 33-40쪽; “최고인민회의 결정: 미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월남인민의 정의의 투쟁을 적극 지 원할 데 대하여”, 『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 제2집, 1437-1439쪽. 당시 북한이 공군 전력 파견 등 실제로 베트남을 지원한 사실은 2000년대 들어 확인되었다. “北 공군 베트남전 참 전 공식문서 확인”, 『연합뉴스』 2011. 12. 5.

남한 및 국제 정세에 대한 당 주류의 인식과 주장은 경제 운용에 바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김일성이 속도 조절과 균형을 강조한 1963년 하반기에 작성되었 던 1964년도 경제 계획이 북한의 대남 경제 원조 제안 이후 수정되었다. 당시 북 한은 쌀 200만석(30만 톤), 강재 10만 톤, 전력 10억 kWh, 화학섬유 1만 톤 등을 매년 남한에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102) 북한 정권은 자신들이 이를 곧바로 실행 에 옮길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하여 이미 확정된 1964년도 생산 목 표에 더해 남한 지원 물량의 증산을 결정했다.103) 이에 따라 강선제강소는 설비 이용률을 전년 대비 20% 높이고, 기술 관리 사업을 강화하며, 기술혁신운동을 더 욱 확대하여 강재 10만 톤을 더 생산하기로 결의했다. 개성방직공장도 대남 섬유 지원을 위해 고급 천 생산을 전년 대비 50% 늘리기로 했다.104) 당 주류의 정세 인식과 그에 대한 대응은 인민들의 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북한 정권 이 남한 혁명과 베트남 지원 등을 명목으로 인민들의 임금에서 매달 2원씩 공제하 는 조치를 취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105)

이처럼 김일성과 당 주류는 남한에 대한 지원 및 통일, 베트남 전쟁 지원 등 대외적・정치적 측면까지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1964년부터 고성장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즉, 이들에게 3대 혁명 역량 강화 결정 이후 북한 경제의 목표는 북한 인민의 생활 향상만이 아니라 국제 혁명 역량과 연대를 강화하고 남한의 “파괴된 경제를 시급히 복구하고 도탄 속에 빠진 남조선 인민들의 생활을 급속히 안정시 킬 수 있는 물질적 토대”까지 마련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106) 따라서 당시 당 주 류의 사고는 북한의 경제 상황에 대한 냉정한 분석에 기초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기보다, 자신들의 정치적・이념적 지향에 따른 ‘당위’적인 것이었다. 당 주류의 입장에서 높은 속도를 포기하는 것은 자신들의 혁명 목표를 수정 또는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역으로 높은 속도를 거부한 갑산파는 김일성과 당 주류 가 추구하던 정치적 지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김일성과 당 주류는 1960년대 중반의 열악한 객관적 현실 속에서 높은 성장 속도를 달성하기 위해 사상성 제고를 더욱 강조하기 시작했다. 대외 정세 위기의

101) “웰남 문제에 관한 조선로동당 대표자회 성명”, 『근로자』 1966. 10, 87-88쪽.

102) “최고인민회의 호소문: 남조선 인민들과 제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 및 남조선 국회의원들 에게”, 1309쪽.

103) 정일룡(부수상 겸 전기석탄공업상), “우리의 국가예산은 인민생활의 급격한 향상과 나라의 정치 경제적 위력의 강화를 담보한다”, 『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 제2집, 1332-1337쪽, 특히 1334쪽.

104) 이상 내용은 『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 제2집, 1341-1343쪽, 1351-1353쪽.

105) 김 면, 앞의 글, 228쪽.

106) “조국통일을 촉진하기 위하여 우리의 혁명 력량을 더욱 결속하자”, 『근로자』 1964. 5, 42-48쪽, 특히 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