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기술혁신의 활성화와 제도화 추진
2) 과학원 확대 개편과 과학계의 천리마작업반 운동
북한 정권은 기술혁명 관련 과학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1960년을 전후로 과학원을 개편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일성과 로동당은 과학계를 향해 경제와 직결된 주제에 연구를 집중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며, 현지연구사업은 그 형식, 내용, 성과 면에서 이러한 요구가 최대한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현지연구사 업을 통해 과학계의 경제적 유용성을 직접 확인한 로동당은 과학계가 경제 문제 와 직결된 연구를 더욱 원활히 진행하도록 만들기 위해 연구 기관들을 확대 재편 했고 과학원 원장을 생산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인물로 교체했다. 이와 함께 과학 연구 기관들의 천리마작업반 운동 활성화 시도, 과학 연구 기관에 대한 지도 통 제 체제 정비도 이루어졌다.
과학원 재편에서 먼저 눈에 띠는 부문은 화학 부문이었다. 북한 정권은 리승 기의 비날론 공업화, 려경구의 염화비닐 공업화, 리재업의 합성고무 개발 성공 등 당시까지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둔 화학 부문 연구 기관들을 1960년 하반기부터 함 흥 지역에 집중시켜 과학원 함흥분원을 만들었다. 기술혁명과 직결된 다른 부문 의 연구 기관들도 확장 또는 신설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기술혁명의 핵심 목표 였던 기계화, 자동화 관련 연구를 담당하던 과학원 공학연구소 산하 자동화 연구 실이 기계화 및 자동화 연구소로 확장 독립했고, 물리수학연구소 산하에는 반도 체와 컴퓨터 연구를 담당할 반도체연구실과 계산수학연구실이 신설되었다. 무연탄 가스화, 함철 코크스 등 북한 경제의 자립성 강화에 필수적이었던 연료 자립 연
113) 김일성, “당 제4차 대회 총화 보고”, 93-94쪽; “권두언: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가일층의 발전을 위하여”, 『근로자』 1962. 9, 2-6쪽, 특히 5쪽.
114) 『천리마 기수 독본』, 26쪽; 현동관, “우리나라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천리마작업반 운동”,
『경제지식』 1961. 8, 5-10쪽, 특히 6쪽.
구를 책임질 중앙연료연구소도 설립되었다. 북한 내 자연자원의 경제적 이용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던 과학원 자연조사연구소도 생물학연구소와 지질 및 지리학 연구소로 확대 분리되었다.115)
이러한 과학원 재편은 그 자체로 과학원의 현장성, 즉 과학원과 생산 현장의 연결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함흥분원은 과학원 산하 화학 연구 기관들만이 아니라 중공업위원회 산하 화학공업연구소까지 흡수한 것이었다. 또 비날론 공장, 흥남 비료 공장 등 대규모 화학공장이 자리한 함흥에 분원을 설치 함으로써 연구 기관과 생산 현장의 상시 연계를 가능하게 했다. 과학원 산하에 신설된 중앙금속연구소도 당시 북한 최대의 제강소가 있던 강선에 자리했고, 김 책제철소 연구실・청진제강소 연구실・성진제강소 연구실 등 주요 제철소 및 제 강소 연구실을 산하에 두게 되었다. 1961년 신설된 생물학연구소는 기초과학 연 구소였지만, 그 역할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동식물 자원 조사, 확정 및 그 이용 방도 연구’로 규정되었다.116)
과학원 원장은 1961년 3월 경제학자 백남운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강영창 으로 교체되었다. 이로써 1952년 과학원 설립 이후 처음으로 이공계 출신 원장이 등장했는데, 당시 원장 교체에서 이보다 더욱 주목할 것은 원장으로 임명된 인물 이 ‘강영창’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과학 연구의 현장성 강화라는 로동당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뤼순공대를 졸업한 강영창은 해방 직후 월북하여 성진제강소 기사장을 지냈고, 소련으로 단기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전쟁 전 성진 제강소 개건, 전쟁 중 군수품 생산, 전후 황해제철소 복구 및 확장 등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955년 이후 로동당 중공업부장, 내각 금속 공업상 등을 역임했다. 특히 그가 이러한 직책들을 맡았을 때 천리마운동, 천리마 작업반 운동이 진행되었고, 따라서 그가 이 운동들을 실질적으로 지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는 해방 이후 북한 공업 발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누구보다 김일성의 지시와 로동당의 경제 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었다.117) 김일성은 이러한 이력을 가진 강영창을 과학원장에 임명함으로써 과학원 역량을 경제와 직결된 연구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과학 연구 기관들의 천리마작업반 운동 활성화도 로동당이 과학 연구를 생산 현장의 문제 해결에 집중시키기 위해 취했던 조치 중 하나였다. 과학계의 천리마 작업반 운동은 1960년 8월 천리마작업반 운동 선구자 대회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115) 이상 과학원 재편 내용은 강호제, 앞의 책, 325-329쪽에서 정리.
116) “새로 창설된 과학원 연구소들”, 『과학원통보』 1961. 4, 56-57쪽.
117) 강호제, 앞의 책, 327쪽.
진행되었지만, 이 대회에서 김일성이 공업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이 운동을 활성 화해야 한다고 발언한 뒤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과학원 기관지 『과 학원통보』를 보면 적어도 1961-62년에는 과학계의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비교적 활발했고, 여러 연구실이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 학계에서 처음으로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은 곳은 화학연구소 산하 고분자화학 연구실이었다. 화학공학자 려경구를 중심으로 한 이 연구실은 4개월 만에 연 6천 톤 생산 규모의 염화비닐 공장 완성, 북한에 풍부한 피마주(피마자) 기름을 이용 한 새로운 가소제 생산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았다.118) 이밖에 화학공업연구소 산하 시약 연구실과 도료 연구실, 중앙연료연구소 산하 철콕스 연구실, 중앙금속연구소 산하 남포 연구실, 중앙분석소 산하 무기분석연구 소, 물리수학연구소 산하 수학 연구실, 화학공업연구소 산하 항생소 연구실 등이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았다.119)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작업반들이 참가를 결의하기만 하면 곧바로 참가할 수 있던 운동이 아니었다. 참가 희망 작업반이 자신들의 장기 목표와 그에 따른 월 별 목표를 결의하고 목표 수행 방법과 담당자 등을 구체적으로 작성한 뒤, 이러 한 결의와 수행 계획의 적절성 여부에 대해 해당 직맹 조직의 세밀한 검토를 통 과해야만 운동에 참가할 수 있었다.120) 천리마작업반 칭호는 당연히 각 작업반이 직맹의 검토를 통과한 목표를 정확히 달성해야만 받을 수 있었다. 문헌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과학 연구 기관들 역시 이와 비슷한 절차를 거쳐 천리마작업반 운동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이 연구 기관 에 적절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김일성과 로동당의 입장에서만 보자 면, 과학계의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연구 기관들이 경제와 직결된 구체적인 목표 를 설정하고 그 달성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 또는 강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 법이었다.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은 과학원 산하 연구실들을 소개한 문헌들을
118) “과학원 화학연구소 고분자화학연구실에 천리마작업반 칭호 수여”, 『과학원통보』 1961.
2, 61-62쪽. 려경구(1913-1977)는 1936년 일본 와세다 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했고, 해방 직후 경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6년 월북했다. 이후 그는 흥남 지구 인민공장 기사 장, 흥남연구소장, 과학원 함흥분원 부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58년에 10여 년 동안 연 구했던 염화비닐 생산에 성공했고, 1960년대 초에는 그 공업화에 성공했다. 독립운동가 여 운형의 5촌 조카이다.
119) “천리마 작업반의 영예를 쟁취한 과학원 화학공업연구소 시약 연구실과 도료 연구실”,
『과학원통보』 1961. 4, 29-31쪽; “과학원 중앙연료연구소 철 코크스 연구실”, 『과학원통보』
1961. 5, 49-50쪽; “과학원 중앙금속연구소 남포 연구실”, 『과학원통보』 1962. 1, 25-27 쪽; “과학원 중앙 분석소 무기분석연구실”, 『과학원통보』 1962. 1, 27-29쪽; “천리마 수학 연구실”, 『과학원통보』 1962. 2, 48-50쪽; “천리마 항생소 연구실”, 『과학원통보』 1962. 3, 50-52쪽.
120) 강호제, 앞의 책, 253-254쪽.
보면 이 점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위 연구실들이 천리마작업반 운동에 참가하면서 결의한 목표들이 경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시약 연구실은 수입에 의존하던 시약의 국내 생산, 도료 연구실은 3,000톤 급 선박에 필요한 도료 문제 해결이 목표였다. 남포 연구실의 목표도 북한에 풍부한 빈(貧)망간(망간 함유량 4%)을 처리하여 36-38%
수준의 망간 정광을 생산하는 것이었고, 수학 연구실도 전자계산기(컴퓨터) 제작 및 그 운영 준비 사업・수리 운영학적 방법 연구 및 그 방법의 대중적 보급을 목 표로 했다.
『과학원통보』 기사들에 따르면 이 연구실들은 목표 달성 과정에서도 생산 현 장과 연계를 강화했다. 예를 들어 시약 연구실 성원들은 시약 순도를 높이기 위 해서는 생산자들의 기술 기능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노동자들과 같이 침식하면서 자신들의 지식을 보급했다. 그 결과 많은 노동자들의 기능 수준이 크 게 높아져 시약 생산의 양과 질에서 모두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한다. 수학 연 구실도 자신들이 연구, 체득한 수리 운영학적 방법을 평양 전기 공장・희천 기계 공장・청산리 농업협동조합 등 생산 현장에 실제 도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고, 이를 통해 근로자들뿐 아니라 연구 성원 자신들의 지식수준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121) 이처럼 로동당은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통해 ‘과학계와 노동 자의 창조적 협조’를 강화함으로써 경제와 직결된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를 바란 것이다.
로동당은 1962년 말 과학 연구 기관들에 대한 지도 통제 체제도 정비했다.
북한은 당-국가체제이기 때문에 로동당 중앙위원회가 과학기술 정책의 기본 방향 과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당 과학교육부가 연구기관 내 당 조직을 통해 과학자 들에 대한 정치적 지도와 통제를 진행했다. 내각은 당이 결정한 정책의 집행을 담당했으며, 연구기관들의 연구 사업에 대한 감독도 일차적으로 내각의 임무였다.
당시 북한에는 과학원 소속 연구소 또는 내각 각 성 산하 연구소들이 있었는데, 과학원이 ‘내각 직속 기관’이어서 결국 모든 연구 기관들이 내각 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122) 그러나 1962년 말 이전까지 북한 내각에는 이들 연구 기관을 통일 적으로 지도하는 체제가 확립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연구 계획의 집행 과정에 대한 통제 미흡・연구 기간 지연・연구 역량의 분산・기관들의 상호 비협조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123)
121) “시약 연구실과 도료 연구실”, 29쪽; “수학 연구실”, 50쪽.
122) 과학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3-1957)』 (평양: 과학원출판사, 1957), 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