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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회의 이완과 정권의 미흡한 역량

제1절. 기술혁명 실현을 가로막은 내외의 악조건

3) 북한 사회의 이완과 정권의 미흡한 역량

1960년대 초 로동당의 정책 방향은 타당한 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설 비 가동률을 높이고 노동 행정을 체계화하며 기술 발전을 통해 자원 낭비를 줄이 려 한 것은 외연이 급속히 확장된 북한 경제의 내실을 다지기 위한 것으로서 당 시 상황에 부합한 정책이었다. 김일성과 로동당은 이러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 조건도 최적에 가까운 상태라고 판단했다. 1950년대 후반을 거치며 자체

36) 김성태, “사회주의 분배 원칙과 <<작업반 점수제>>”, 『근로자』 1963. 10, 21-26쪽, 특히 23쪽.

37) “과학상을 제정함에 대하여”(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1963. 12. 17), 『北韓法令集 제1권』 (1990), 388쪽.

38) 백재욱, “대안 체계 하에서의 로동에 대한 정치 도덕적 자극과 물질적 자극”, 7쪽.

39) 이태섭, 앞의 책, 346-347쪽.

40) 김 면, “구동독의 대북한 기밀보고서 분석”, 『평화학연구』 제7권 제1호(2006), 211-232 쪽, 특히 228쪽.

기술 역량이 크게 성장했으며, 인민들의 혁명적 열의도 여전히 높은 상태였고, 김 일성에 대한 반대 세력이 대부분 제거되어 당의 사상적 통일 수준이 높을 뿐 아 니라, 전후 복구와 5개년 계획을 거치며 간부들의 역량도 강화되었다고 본 것이 다. 이에 따라 김일성과 로동당은 문화혁명으로 간부들과 인민들의 기술적・사상 적 수준을 지속적으로 높여가면서 당의 “올바른” 정책을 실행한다면 7개년 계획 의 높은 목표를 달성하고 사회주의 공업화를 완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로동당의 이러한 판단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었다. 당시 북한 정권의 전반적인 역량과 정책적 준비 수준은 여러 면에서 부실한 것이었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이완 현상이 나타났다. 더구나 이런 문제들을 주도적으로 해결 했어야 할 로동당 간부들의 정책적 통일 수준도 높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과 내 각의 많은 간부들이 김일성이 기대했던 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기술혁명 관련 주 요 내각 기구들도 자주 개편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북한 과학기술의 발 전 경로와 가능성에 대한 김일성의 전망도 지나치게 단순하고 낙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실현되지 않았다. 게다가 병진 노선은 자원 제약뿐 아니라 간부들의 동요와 국가 역량의 분산을 불러왔기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를 하나 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한 정권의 정책적 준비 수준이 낮았음은 1960년대 빈번했던 국가 기구의 재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물론 로동당이 7개년 계획 시작 전 그 실행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북한은 전쟁 이후 6-7년 만에 경제 가 급팽창하여 훨씬 복잡해지고 사회 체제도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로동당은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경제지도 및 관리 체계를 정비하고 간부들의 수준도 현실 에 적응할 수 있도록 향상시킬 필요가 있었다. 특히 1950년대 후반 고도성장이 로동당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기 때문에 계획경제를 지향하는 로동당이 경제 를 원활히 관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이 더욱 시급했다. 이 때문에 로동당은 5개년 계획 종료 뒤 1960년을 완충기로 설정하여 경제 관리 체계를 재편하기 시 작했고 간부들의 정치, 경제, 기술 학습을 강조했다.

로동당은 7개년 계획이 시작된 뒤에도 각종 회의를 개최하여 7개년 계획 실 행 대책을 논의했다. 대표적인 예가 지방공업 및 농촌 경리 발전 대책을 논의하 기 위해 1962년 8월 7-8일 평안북도 창성에서 개최된 ‘지방 당 및 경제 일군 창 성 연석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각 도당 위원장 및 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지방공 업 경영국장, 산간지대 군 농업협동조합경영위원장 등 각 지역 간부들뿐 아니라, 당 중앙위원회와 내각 성 및 중앙기관 중 지방공업 및 농촌경리와 관련된 간부들

까지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논의된 지방공업 및 농촌 경리 발전 방안의 핵심 내용은 정치・

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 행정의 최 말단 지도 단위이자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 는 거점인 군(郡)의 역할을 다방면으로 높이는 것이었다.41) 당연히 군 당, 군 인 민위원회, 군 농업협동조합경영위원회, 군 교육문화기관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와 함께 이 회의에서는 기계화 수준 제고, 간부와 노동자・농민의 기술기능 수 준 제고, 지방 자체의 원료 기지 확보, 논 면적 및 관개면적 확대 등 지방공업과 농촌 경리 발전의 기본 방향뿐 아니라, 각 지역 내 식료공장・방직공장・제지공 장의 생산량, 각 지역 별 구체적인 논 면적 및 관개면적 확대 목표, 농기계 보급 대수 등 세부적인 내용까지 논의되었다.42) 이처럼 로동당은 창성연석회의를 개최 하여 7개년 계획 전반기 3년의 핵심 목표였던 경공업 및 농촌 경리 발전에 필요 한 대책과 구체적인 방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했다.43)

로동당은 이 외에 전원회의, 김일성의 현지지도 등을 통해서 7개년 계획 실 행에 필요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의하고 제시했다. 예를 들어 1961년 12월 개최된 제4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는 변화된 환경에 맞게 기술적 지도를 강화할 수 있도 록 공업 및 농업 관리 체계를 변경할 것을 결정했고, 이는 2장에서 살펴본 대로 공업 부문의 대안 체계와 농업 부문의 협동조합경영위원회 도입으로 이어졌다.

1963년 5월 개최된 제4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는 이보다 약 6개월 전 모든 공 장・기업소로 적용이 확대된 대안 체계 확립과 천리마작업반 운동 활성화 방안을 논의했고, 이를 통해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을 강화하려 했다.44) 이뿐 아니라 김일 성은 1963년 3월 개최된 과학자, 기술자 대회에 참석하여 7개년 계획 실행을 위 한 과학계의 과제를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김일성은 기계공업・금속공업・화학공 업 등 주요 경제 부문의 기술혁신을 위한 과학계의 연구 과제, 과학원과 국가과 학기술위원회의 과학 연구 사업 지도 강화, 과학원과 경제 관련 성 산하에 중복 설치된 연구소들의 구조조정 등을 강조했다.45)

로동당은 7개년 계획 개시 전후 경제 관리 체계에 큰 변화를 가했다. 먼저 로동당은 전쟁 전에 비해 그 규모가 7배 이상 성장한 공업 분야의 효율적인 관리

41) “창성 련석 회의와 그 의의”, 『근로자』 1962. 13, 21-27쪽, 특히 23쪽.

42) 김일성, “군의 역할을 높이며 지방 공업과 농촌 경리를 더욱 발전시켜 인민 생활을 획기적 으로 향상시키자,” 『근로자』 1962. 13, 2-20쪽.

43) “창성 련석 회의와 그 의의”, 22쪽.

44) 김일성, “공장 당 위원회사업을 강화”; “공장 당 위원회 사업의 가일층의 강화 발전을 위 하여”, 『근로자』 1963. 11, 2-6쪽.

45) 김일성, “기술혁명수행에서 과학자, 기술자들의 임무”, 180-210쪽.

를 위해 각 도의 경제지도・관리 기능을 확장했다. 예를 들어 지방공업이 빠르게 성장한 상황에서 “공업에 대한 국가기관의 지도를 현지에 접근시키며 지도사업을 구체적으로 기동성 있게 하기 위해” 1960년 도별로 경제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는 중앙 성, 국들이 관리하던 중소 규모 지방공업과 지방 건설을 각 도에서 관리하 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46) 이어 로동당은 1961년 12월 말 각 도내 대규모 공 장, 기업소에 대한 지도관리 업무도 도당 위원회로 이관했다.47) 로동당은 또 앞서 언급한 대로 1962년 새로운 공업관리체계로서 대안 체계, 농업관리체계로서 협동 조합경영위원회를 도입했다.

로동당은 국가 단위의 계획화 사업 체계도 변경했고, 내각 기구를 신설・개 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계획화 체계와 관련하여 로동당은 1964년 12월 열린 전원회의에서 “국가계획기관의 주관주의와 생산자들의 기관본위주의, 지방본위주 의를 없애고 과학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계획의 일원화체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구체적으로 로동당은 어느 지방기관에도 속하지 않는 지구별(도, 시, 군) 계획위원회를 신설한 뒤 이를 국가계획위원회 아래 두기로 결정했다.48) 내각 기구의 경우 2장에서 살펴본 대로 1962년 7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신설했을 뿐 아니라, 같은 해 8월에는 중공업위원회를 금속화학공업성・전기석탄공업성・

기계공업성으로 분리했다.

그러나 이러한 각종 개편 과정이 면밀한 검토 끝에 안정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편 과정에서 각 단위의 역할과 임무가 명확하게 규정 되지 않아 혼선이 빚어졌고, 몇몇 기구들은 잦은 변화를 겪었으며, 어떤 기구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할과 임무의 모호함의 예로 지역 소재 공 장, 기업소 지도에 대한 도당 위원회와 시당 위원회의 책임 소재 문제를 들 수 있다. 1963년 3월 김일성은 남포시를 현지지도하면서 남포시 당 위원회가 시내 주요 공장・기업소에 대한 지도・통제 업무는 도당 위원회 소관이라는 ‘핑계’를 대며 공장・기업소 지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도당뿐 아니라 시 당도 시내 소재 공장・기업소들에 대한 지도・통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49) 김일성의 입장에서 관할구역 내 주요 생산 단위를 지도하지 않는 당 조직 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규모 공장・기업소에 대한 지도 임무를 도당 위원회로 이관하면서 시 당 위원회의 역할을 명확하게 규정하

46) 김일성, “함경남도 앞에 나서는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1960. 9. 2), 『김일성저작집』 14, 314-344쪽, 특히 317쪽; 김일성, “당 4차 대회 총화 보고”, 35쪽.

47) 김일성, “모든 힘을 여섯 개 고지의 점령을 위하여”, 375쪽.

48) 김일성, “지도일군들의 당성, 계급성, 인민성”, 510쪽.

49) 김일성, “남포시 당 조직들의 과업”, 138-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