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복, 과잉, 전이되는 폭력
한글장편소설에서 폭력적인 장면이 펼쳐질 때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폭력의 수위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적당한 수준의 폭력이라는 것은 형용모순에 가까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까닭은 작품 내적으로 폭력의 원인과 이유를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독자는 작품 속 등장인
5) “While watching a violent scene, we may at times align ourselves with the perpetrator, victim or the detached onlooker(Henry Bacon, The Fascination of Film Violence, Palgrave Macmillan, 2015, pp. 17-18).”
6) 이와 관련하여 주인공의 비극적 처지가 강화될수록 독자는 도덕적 우월성을 느끼는 한편 비극 적 카타르시스를 맛보았을 것이라고 본 선행연구의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박일용, 가문소설과 영웅소설의 소설사적 관련 양상―형성기를 중심으로― , 고전문학연구 20, 한국고전문학회, 2001, 181-186면). 여기에서는 독자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 더 큰 관심을 두고자 하는 것이다.
7) 롤로 메이, 신장근 옮김, 앞의 책, 203면.
물들이 자행하는 폭력이 잘 설명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그것이 ‘사실적인가’ 판단한 다. 이 판단의 결과에 따라 감정이입을 할 수도 있고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다.
<소현성록>에서 실절을 이유로 양부인이 교영을 죽인 것은 과도한 처사이다. 이는 주변인물들의 반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화부인이 집사인 이홍에게 자신 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를 때도, 그를 잡아 나무에 동여 매고는 더러운 물을 입에 붓는다. 자신의 말을 거역한 것에 대해 분노하는 화씨에게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의 수위가 문제적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폭 력이 매우 절제되어 있는 듯 보이는 <소현성록>에서도 이처럼 폭력은 자행될 때마다 그 수위가 대단히 높아서 주의를 끈다.
명현공주는 소운성을 사랑하지만 끝내 그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그래서 늘 결핍에 시달리며 분노에 절어 있다.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운성이 창기들과 어울렸다 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공주는 화를 주체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창기들을 불러다 머리 털을 자르고 귀와 코를 베고, 또 손발을 자른 뒤 매질을 가하는 등 극형을 내리게 된 다.
부인이 더옥 분긔쳘골(憤氣徹骨)여
공를 노화
리고, 대공의게 다라드러 머리로브터 왼몸을 혜지 아니코 즛두다리니, 분긔발발(憤氣勃勃)여 흉악히 날 치
거동이 일희 사
을 만나 무러 흔드
형상이오, 조각 인졍(人情)이 업
니 나히 비록 늙으나 쇠패(衰敗)미 업서, 공를 두다리
바의 피 소나고 일신(一身)이 상
디라. (중략) 주인이
드른 쳬 아니고 어러이 두다리며 그 몸을 무러더 피를
고, 두발을 쥐여드며 벽의 부이져 별학
치 즛두
다리니, 두골이
여져 붉은 피 돌지어 흐르니 이러구러 요란디라. (<명주보월 빙>권4, 224면)<명주보월빙>에서 위부인은 금척으로 광천과 희천을 번갈아가며 내리친다. 그러다 몸을 물어뜯고, 머리를 잡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머리를 벽에 부딪치는 등 흡사
‘이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달려든다.
삼흉(三凶)이 대로여 위력으로 약을 퍼붓고져
쇼졔 약기 신뉴(新柳)
격녈(激烈) 싁싁
고 강녁(强力)이
업지 아니니, 맛
입을 버리지 아냐 약을 밧지 아니니, 흉괴 뉴시 모녀와 비영 셰월노 더브러 쇼져의 슈족(手足)과 몸 을 나리누르며
이이 쥬머괴로 치기를
이
더니, (중략) 경승승(乘勝)여 입을 어긔고 독약을 퍼 너흘, 긔운이 막혀 약물이 후셜(喉舌)을 넘지 못
, 위뉴 등이 창황급급(蒼黃急急)히 셔르져 업시려
고로, 약이 못 드러가
줄도
지 못
고, 한업시 퍼 너허 옷
젹시며, 간간이 옥면화협(玉面花頰)과 응지셜 부(凝脂雪膚)를 모진 손으로 쥬여더 곳곳이 붉은 피 돌지어 흐르고, 쇼졔 엄홀
여 숨을
두르지 못고 일신 슈죡(手足)이 어름
니 분명 죽엇
줄 아 라, 큰 피농(皮籠)을 드려 쇼져
녀흘, 셰월이 그 쵹금상(蜀錦裳)을 벗기고 비 영이 그 머리의 슈식보화(修飾寶貨)를 다
더 가지고, 뉴시 그 옷
마벗기 려
, 현
이 쇼졔 오
나오지 아니믈 괴이히 넉여,
마니 경희뎐의 와 죡젹 을 가마니여 합장(閤牆) 뒤셔 여어보니 이 경상이라. (<명주보월빙>권10, 19-21 면)위부인과 유부인, 경아는 명아에게 독약을 먹인다. 명아가 완력으로 거부하자 세 여 인은 명아의 입을 억지로 벌려 약을 밀어 넣고, 반복해서 때린다. 명아가 약을 목구멍 으로 넘기지 못하자 얼굴과 피부를 쥐어뜯기도 한다. 명아가 의식을 잃자 죽은 줄로 착각하고 농을 들여와 명아를 집어넣는다. 명아는 옷도 다 벗겨지고 머리의 장신구도 다 뜯긴 채 피농에 갇힌다. 이렇듯 한글장편소설 속 폭력은 상상 이상으로 ‘과잉’되어 나타난다.8)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여성’이 폭력의 주체가 될 경우, 남성과 매우 대조적인 면이 보인다는 데 있다. 여성 폭력 주체는 거의 예외 없이 같은 대상에게 같은 이유로 ‘반 복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소현성록>에서 명현공주는 소운성을 흠모하여 혼인하게 되지만, 운성이 자신과 화락하지 않자 분노를 키워간다.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서 창기들과 놀아난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들을 인체(人彘)로 만들어 버리고, 운성이 자신이 아닌 형씨만을 사랑하는 듯 보이자 그를 못에 빠뜨려 죽이려고 한다. 공주의 분노는 점점 크기를 더해가더니 급기야는 소현성을 살해하겠다는 의지로까지 확대된 다.
소현성은 물론 명현공주를 후대하지 않았고, 엄밀하게 말해 그를 무시한 것이나 다 름없었다. 특별히 좋아하거나 기뻐함도 없고 미워하거나 미안해함도 없었지만, 할 말 이 없을 때는 함께 있어도 침묵하기가 일쑤였다고 했다. 소현성은 소운성이 공주를 박대하는데도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해 어머니 양부인에게 꾸중을 들을 지경이었다.
운경이 형씨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공주를 박대하지 말고 후하게 대우하라고 운성에게 반복적으로 조언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소현성에 대한 공주의 마음이 좋았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소현성이 왕을 찾아가 공주의 만행을 간언한 데 대해 억한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요컨대 명현공주는 운성이 자신을 박대하는 것 때문에 늘 분노해 있다. 그리고 이 분노는 자신의 불행을 방치하는 소부의 사람에 게 공격적 행위를 반복하게 하는 동인이 된다.
8) 이것은 한글장편소설이 다루는 여러 문제들이 다소 과장된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지하는 극단적이고 과장된 행위를 통해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는 것 은 멜로드라마의 대표적 특징이며, 고전장편소설이 멜로드라마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이지하, 앞의 논문, 2015).
<보은기우록>에서 녹운은 위연청의 외모에 반해 음심(淫心)을 품고 접근했으나 거 절당한다. 그러자 도리어 그를 죽이려고 계획한다. 독약으로 여러 번 위협하였으나 현 명한 그가 알아서 잘 피하자, 부친 위지덕에게 자신에게 음심을 보였다고 모해하여 그를 사지(死地)로 몰아간다. <명주보월빙>에서도 위부인과 유부인은 조부인과 그 소 생을 향해 폭력을 반복적으로 행사한다.
이들의 폭력적 행위가 반복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명현공주는 형부인, 소운성, 소현성 등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녹 운은 위연청에게 거절을 당하는 순간부터 살의(殺意)를 품었으나 번번이 실현하지 못 한다. 위부인과 유부인도 광천 형제와 조부인 등을 살해하고 싶었지만 그 시도는 실 패를 거듭한다. 목적의 달성이 지연되기 때문에 폭력은 같은 대상에 대해 점차 수위 를 더해가며 반복된다. 이들의 폭력이 과잉되었다고 느껴지는 것은 수위만의 문제는 아니며, 점차 수위를 더해가며 반복․재생산되는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여성의 폭력은 ‘폭력의 대상’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주목할 점이 있다. 소현성의 첫 째 부인 화수은은 투기가 심한 인물이다. 한글장편소설에서 투기하는 여성은 대개 가 혹한 처벌을 당하므로, 화씨의 고난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화씨는 소현성의 둘째 부인을 들이는 일에 석파가 지나치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분노한 다.
화시 믄득
지저 왈,
“내 일 셔모로 원 업거 므
연고(緣故)로 날을 믜워 뎍국(敵國)을 쳔거뇨? 셔뫼 만일 긋치면 말녀니와 나죵 내 원슈
디을딘대 젼졔의 어댱검(魚腸劍) 을 번 딜너 셜고 내 죽으리라.” (중략)
화시 대로(大怒)야 졀치(切齒) 왈,
“ 삼(三生) 슈인(讐人)이라. 만일 셕현의
을 려올딘대 당 〃이 저 죽여
분을 플고 늘근 년이 텬앙(天殃) 닙어 죽으믈 보리라. 반시 셕녀 려와 슉질(叔 姪)이 동모야 부인과 우리 부쳐의 목숨을 긋려
계교로다.” (<소현성록>권 1, 92-94면)석파를 마주쳤을 때 이미 화씨는 분노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석 파는 서모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어머니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므로, 소현성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를 이기지 못한 화씨가 직접 ‘칼로 (석파를) 찔러 한을 갚 겠다’라고 하는 등 표독스럽고 폭력적인 말로 석파에게 욕을 퍼붓자, 석파 역시 억울 함을 견디지 못해 발을 구르며 통곡하기에 이른다. 지다가던 소현성이 석파가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고 그 연유를 묻자, 석파는 칼을 빼들어 자결할 기세로 억울함을 호소 한다. 화가 난 소현성은 화씨의 유모를 데려다 장을 60대나 치는 중형을 내린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