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폭력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이다. 갈퉁의 분류법에 서 직접적 폭력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그는 이를 단순한 개인적 행동이나 집단에 의 해 의도된 것이라 보았다.7) 지젝은 ‘가시성’의 여부를 두고 폭력을 구분하였는데, 이 때 가시적인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 부르고 ‘사회적 행위자’, ‘사악한 악인’, ‘억압적 공권력’, ‘광신적 군중’ 등에 의해 직접적으로 자행되는 폭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8) 현실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이고 가시적인 폭력은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의 신체와 정신에 직접적인 방식으로 상처를 입힌다.
거듭 지적한 바와 같이 개인적인 폭력은 대개 구조적 폭력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한글장편소설의 문면에서 제시되는 폭력들은 모두 개인의 행위로 구체화 된 다. 여기에서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한글장편소설이 다루는 개인적 폭력의 양상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작품 속 폭력은 주로 형태의 유무에 따라 그 형상을 달리한다고 보고, 물리적 폭력과 비(非)물리적 폭력으로 나누어 살핀다. 이는 폭력 주체가 ‘힘’을 발휘하는 방식에 주목한 결과로서, 폭력의 대상이 입는 상처의 양상이나 크기와는 무 관하다. 심지어 폭력 주체의 의도와도 무관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성적 폭력은 개인의 육체를 향해 힘이 발휘되므로 가시적으로 포착되지만, 피해자는 정신적인 차원에서 더 크게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가해자 역시 대상의 육체보다는 정신을 지배하려는 목적에서 성적 폭력을 자행하기도 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폭력의 주체로부터 시작된 힘의 형태와 양상에 주목하여 폭력 의 양상을 구분해보기로 한다. 이와 같은 논의의 방식은 이해의 편의를 위함이지, 각 각의 양상에서 다뤄진 폭력이 개별적으로 발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가해자를 논 의의 중심으로 놓고 폭력을 조망하는 작업이 피해자의 상처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 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피해자가 겪는 고통이나 상처만을 생각한다면, 폭력 의 형태나 양상을 구분하는 일은 아예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9) 본고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은 피해자의 피해와 상처, 고통을 규정하는 행위가 폭력적일 수 있음을 의 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7) 요한 갈퉁, 강종일 외 옮김, 앞의 책, 83면.
8) 슬라보예 지젝,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앞의 책, 38면.
9) 손봉호는 우리말에서 ‘아픔’과 ‘괴로움’을 구분하듯, 서구에서도 ‘pain’과 ‘suffering’을 구분하고 있음을 이야기한 바 있다. 이 경우 전자는 육체적인 것, 후자는 정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고통 을 당하는 인간에게 양자의 경계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가 배제 된 아픔이나 육제적인 요소가 배제된 괴로움은 하나의 “이상형”일 뿐이라고 보았다(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24-32면).
1) 물리적 폭력
폭력은 주로 “신체적” 사건이다.10) 우리는 어떤 것보다 신체를 공격하는 행위를 폭 력으로 느낀다. 폭력 중에서 가시적이고 직접적으로 확인 가능한 폭력을 물리적인 폭 력이라고 했을 때, 이는 종종 신체적인 폭력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곤 한다. 신체적인 폭력은 대개 폭행(暴行)이나 체벌 등 타인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이다.
한글장편소설에는 다양한 신체적 폭력이 나타난다. <현몽쌍룡기>에서 조공이 창기 들과 놀아난 큰 아들 조무에게 매질을 하는 것, <임씨삼대록>에서 옥선군주가 남편 임창흥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 <완월회맹연>에서 소교완이 며느리 이자염을 쇠몽둥 이로 두들겨 패는 것 등 위력을 통해 대상의 신체를 공격하는 예는 셀 수도 없이 많 다. 한글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에 대한 논의가 신체적 폭력을 가장 우선적으 로 검토해야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신체적 폭력은 타인의 신체를 향해 위력이 직접적으로 가해질 뿐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타인의 신체를 조종하거나 제어하면서 자유를 박탈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명주보월빙>에서 위부인과 유부인은 돈을 벌기 위해 광 천과 희천에게 비질을 하고, 말을 먹이거나 새끼를 꼬는 등의 노복(奴僕)의 일을 맡긴 다. <소현성록>에서는 위승상의 부인 방씨가 전실 소생에게 일부러 더러운 일을 시 키기도 한다. 이는 모두 타인의 신체의 자율성을 빼앗는 행위라는 점에서 신체적 폭 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로 폭력에 접근하면 감금이나 납치, 인신매매, 축출 등도 포함할 수 있다.11) 한편 독약이나 요약(妖藥) 등으로 타인 의 지각능력을 마비시키거나 정신적인 착란을 일으키게 하는 장면 등이 보이는데, 이 역시 신체와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신체적 폭력의 일부이다.12)
신체적 폭력 중에서 그간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것은 성(性)적 폭력이었다. 그 방 법상의 가혹함이나 정신적 충격의 정도를 감안했을 때, 성적 폭력을 일반적인 신체적 폭력과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성찰에 기인한 결과라고 판단된다. 법적인 의미에서 성폭력은 강간이나 간음, 성매매, 성적 착취 등을 의미하지만,13) 문화적으로는 성을 매개로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함으로써,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해 신체적․심 리적․사회적 고통을 야기하는 행위로 이해되곤 한다.14) 주지하듯이 강간과 같은 성
10) 롤로 메이, 신장근 옮김, 앞의 책, 224면.
11) 이와 같은 행위 역시 타인의 육체보다는 정신을 지배하려는 목적 하에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12) 한글장편소설에 나타나는 ‘요약’의 문제에 집중한 논의로 한길연, 대하소설의 요약(妖藥) 모티 프 연구―미혼단과 개용단을 중심으로 , 고소설연구 25, 한국고소설학회, 2008 참조.
13)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 2조 참조.
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참조. 오늘날에는 여성에게 특정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 역시 폭력으로 이해된다.
적 폭력은 “개인의 육체를 침해함으로써 가장 비육체적인 부분을 침해”하는 특수성을 지닌다.15) 성적 폭력에 대한 논의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의 상처만을 다룰 수는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글장편소설에 나타난 폭력의 상당한 부분이 성적 폭력으로 다뤄질 수 있다. <소 현성록>에서 소운성은 서모 석파가 자신의 팔에 앵혈을 찍는 장난을 하자 이에 대한 반감으로 석파의 조카 소영을 겁간한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현몽쌍룡기>에도 보이 는데, 서모 화씨가 조무(용홍)의 팔에 앵혈을 찍는 장난을 하자 이를 없애기 위해 시 녀 앵을 겁탈한다. 이때 조무는 시녀 앵이 갑작스런 위협에 놀라 거부의 뜻을 밝히자,
“칼노 머리 버혀 자최 업시 리라.”라고 말하며 칼을 빼어들고 위협한다.16) 이렇 듯 높은 수위의 성적 폭력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반면에,17) 다른 남녀의 성관계 장 면을 엿본다거나 원치 않는 상대방에게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행위들은 비교적 소 홀히 다뤄져 온 듯하다.
굥불
음졍(淫情)을
고져
나 어려온지라. 쵹(燭)을 임의 믈녀시니 부마 의
거동도
시 보디 못고, 경(鏡臺)의 야명쥬(夜明珠)를
여 들고 부마의
거동을
피니,
옥
용모의 봉안(鳳眼)이 그린
며, 반월텬졍(半月天 庭)과 녹빈방쳔(綠鬢方天)의 두발이 헛틀며, 깃 거린 봉(鳳)이라.
금(紗衾)을 가
가지 추혀 덥허시나, 옥
살히 빗최니 공어린
시 드리미러 보다가, 경
의 벼
우가지
을 일우교져
나, 엇디 임의로
리오. 온가지로 음욕(淫 慾)을
지 못
니,
은 분이 쳘골(徹骨)여, 누쉬 방방(滂滂)여 쳔만 시름을
여시니, 부매
쳬나
기만 기다려 공쥬의 음일(淫佚)
거동을 보디 말녀
니, 분미 경의
더지고져
나
고
쳬니, 굥쥬
부마의
여시믈 모로고, 그 몸을
시 보고져
여 졈졈 발치로 나려
금을 놉히 드디라. (<명
주보월빙>권24, 6-8면)위의 인용문은 <명주보월빙>에서 문양공주가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잠들어버린 정천흥의 옷을 들춰 몸을 훔쳐보는 장면이다. 부인인 문양공주와 동침 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버려두는 정천흥의 행위 역시 일종의 성적 학대임에는 틀림 이 없지만,18) 음욕을 이기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들추는 문양공주의 행위 역시 성적
15) 조르쥬 비라렐로, 이상해 옮김, 강간의 역사 , 당대, 2002, 9면.
16) <현몽쌍룡기>권1, 44면. 이하 <현몽쌍룡기>의 인용문은 김문희 외 역주, 현몽쌍룡기 1-4, 소명출판, 2010에서 가져왔다.
17) 장시광은 이와 같은 장면을 포착하여 ‘강간 모티프’라고 부르고 이에 대해 별도로 논의한 바 있다(장시광, 고전 대하소설의 강간 모티프 연구 , 국어국문학 170, 국어국문학회, 2015).
18) 한길연은 부부 강간뿐 아니라 성적인 권리를 억누르는 것도 성적 폭력의 일부라고 보았는데 (한길연, 앞의 논문, 2010, 84-102면), 이와 같은 견해를 참고하면 정천흥이 문양공주와 동침을 하지 않은 것 역시 성적 폭력에 해당한다.
폭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적 폭력과 관련해서는 여성을 가해자로 위치시키는 경우 가 매우 드물었는데,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위계와 관련된 구조적 폭력의 결과일 수 있다.
한편 한글장편소설에서는 여성 등장인물이 남복을 한 채 생활을 하는 화소가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이때 그 실체를 모르는 남성인물이 여성인물에게 신체적 접촉을 시 도하는 장면이 보인다. 여성인물은 대개 극구 거부하지만, 남성인물은 동성(同性)이므 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의 성별과는 무관하게, 상대방이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은 성적 폭력의 범주에서 다뤄질 수 있다.19)
온갖 성적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부부가 아닌 친족관계에서 음욕을 보이는 행위는 한글장편소설에서 매우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폭력이 <유효공선 행록>과 <보은기우록>에서 보인다. <유효공선행록>에서는 유홍이 자신의 형수이자 유연의 부인인 정씨를 흠모하며, <보은기우록>에서는 서모 녹운이 위연청에게 음욕 을 보인다. 이를 눈치 챈 유연과 위연청은 심각한 모욕감을 느낀다.
젊은 부부의 성관계나 잠자리를 엿보고 이를 가문의 일원들이 공유하는 장면도 종 종 보인다. <소현성록>에서는 서모 이파와 석파가 소현성과 화수은의 잠자리를 엿보 다가 화씨가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젊은 부부의 잠자리를 엿보는 행위는 가문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규찰(糾察)의 의미를 지닌다.20) 이들의 화 목은 곧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파가 화수은의 잉태 사실을 곧바로 양부인에게 가서 알린다. 그런데 젊은 부부의 성관계에 대한 염탐과 관심이 늘 가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석파는 유기가 부인 윤씨를 아낀다 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둘의 잠자리를 엿본 뒤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고, 소 현성의 부인 여씨는 석명혜에 대한 질투심으로 그를 곤경에 빠트리고자 석씨의 얼굴 을 하고 상서와 화씨의 잠자리를 엿본다. 이와 같은 행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문 제가 되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을 통해서도 그 부당함이 언급되기도 한다. 규찰, 규제 등의 미명 하에 행해졌던 행위들 속에 가려진 폭력성에 대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명주보월빙>에서는 자녀를 생산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위부인과 유부인이 젊은 부부의 잠자리를 엄금하는 내용이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성 적 폭력은 많은 경우에 구조의 문제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
19) <소현성록>에서 소운명은 남장한 채 떠도는 이옥주를 만나는데, 친교를 빌미로 그에게 동침 을 강요한다. 소운명이 이옥주를 남성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상대방의 의사 에 반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소운명의 태도는 매우 폭력적이다. 이옥주는 소운명의 강압적인 행 동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반대의 예도 존재하는데, <창선감의록>에서 윤여옥이 여성 행세 를 하며 엄월화에게 접근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윤여옥은 누이인 윤옥화로 가장하고 엄월화 곁 에 머물며 그녀의 신체를 만지는 등 성적으로 희롱한다.
20) 이에 대해서는 전성운, <소현성록>에 나타난 성(性)적 태도와 그 의미 , 인문과학논총 16, 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