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글장편소설에서 개인의 행위를 통해 구체화되는 ‘개인적 폭력’에 대해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폭력이 가시적이고 직접적이며, 사적(私的)인 방식 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개인적 폭력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한글장편소설은 개인의 행위로서 폭력을 형상화하는 데 상당 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여겨진다. 작품 속에 형상화되는 개인적 폭력은 수적으로 다양하며, 양적으로도 풍부하다. 한편 개인적 폭력이 형상화될 때 그것을 가능하게 하 는 사회적인 분위기나 관습 등이 전제되고 있다는 점 또한 포착해낼 수 있었다. 여기 에서는 본격적으로 이 점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갈퉁은 구조적 폭력을 정치적․억압적․경제적․착취적 폭력으로 나누고, 구조적 침투, 분열, 붕괴 및 사회적인 소외 등에 의해 조장된다고 보았다.32)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 승인된 폭력과 승인되지 않은 폭력을 구분하는 것이 ‘법’ 자체라 고 보고, 법이 모든 폭력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33) 이들은 모두 법이나 사회질서, 국가 등 근대적 ‘구조’에 내재한 폭력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견해가 일치 한다. 지젝이 구조적 폭력을 “정상적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으로 이야기한 데서도 그 와 같은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34)
32) 요한 갈퉁, 강종일 외 옮김, 앞의 책, 84면.
33) 발터 벤야민은 “폭력 비판이라는 과제는 그 폭력이 법과 정의와 맺는 관계들을 서술하는 작업 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모든 폭력과 법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앞의 책, 79-80면).
한글장편소설을 배태한 조선후기는 전제왕권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가부장제와 신분 제가 사회질서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때 모든 인간관계에는 차별 적인 질서가 전제되었으며, 이는 제도(법)적․윤리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었 다고 할 수 있다. 신분사회에서 죄질을 결정하는 요인이 범죄 자체의 잔혹성보다는 범죄자나 피해자의 사회적 신분에 있었듯이,35) 조선시대에도 개인의 행위에 대해 법 적 처분을 내릴 때 개인의 신분과 성별이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조선의 형법체 계 및 형벌에 대해 다룬 논의들이 신분이나 성별에 따라 법이 어떻게 차등적으로 적 용되었는가 하는 점에 착목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인 셈이다. 특히 최 근에는 추관지 , 심리록 , 검안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여성폭력의 문제 를 다룬 연구들이 다수 제출되었는데,36) 이들 논의가 설명하고 있듯 전통시대 여성이 법적․윤리적 속박과 억압 속에서 불평등한 삶을 살았다는 견해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37) 한글장편소설에 나타난 폭력을 다룬 선행 연구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여 특히 가부장제와 신분제의 구조 속에서 이중으로 억압받았던 ‘여성’의 사회 적 지위에 주목하고, 조선후기에 양산된 한글장편소설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모두 구조적 폭력으로 다루기도 하였다.38)
그런데 작품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조선시대의 ‘구조’ 혹은 ‘구조적 폭력’에 대해 단 순화해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작품 속 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폭력이 다. 개인의 폭력이 반복․재생산될 때 그것은 개인의 부도덕뿐 아니라 사회 부정의와 도 관련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그런데 한글장편소설의 서사는 폭력과 관련한 개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며, 이때 ‘구조’는 직접적으로 존재를 드러내
34) 슬라보예 지젝,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앞의 책, 24-25면.
35) 조르쥬 바가렐로, 이상해 옮김, 앞의 책, 31면.
36) 김선경, 조선 후기 여성의 성, 감시와 처벌 , 역사연구 8, 역사학연구소, 2000; 장병인, 조 선시대 성범죄에 대한 국가규제의 변화 , 역사비평 56, 역사비평사 2001; 박경, 살옥 판결을 통해 본 조선후기 지배층의 부처 관계상― 秋官志 분석을 중심으로― , 여성과 역사 10, 한 국여성사학회, 2009; 백옥경, 조선시대의 여성폭력과 법―경상도 지역의 <檢案>을 중심으로―
,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19,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9; 유승희, 조선후기 형사법의 젠더 gender 인식과 여성 범죄의 실태 , 조선시대사학보 53, 조선시대사학회, 2010; 문현아, 판결 문 내용분석을 통한 조선후기 아내살해 사건의 재해석―추관지 사례를 중심으로 , 진단학보 113, 진단학회, 2011; 박소현, 18세기 동아시아의 性(gender) 정치학― 欽欽新書 의 배우자 살 해사건을 중심으로 , 대동문화연구 82,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2013 등.
37) 조선시대 법체계의 문제점은 하층이나 여성이 차별을 받았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것은 아니 다. 형률상의 차별보다 주목이 되는 것은 실제 판결을 내리는 자리에서 해당 사건들이 담론화 되는 방식이다. 가해자가 남성/남편일 경우, 구체적인 정황과 범행 동기 및 전례 등을 두루 살 피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각주 36번의 논의들을 참조.
38) 공혜란, 앞의 논문, 2018.
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구조적 폭력은 ‘정상’의 상태로 내재하고 있으며, 의식하지 못하 는 순간에 개인의 삶을 규율하고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점 때문에 작품 속 개인의 폭력을 구조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 기도 한다.39)
등장인물의 삶에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당대의 구조에 대해 인식하더라도, 그 억압 의 양상이 관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점 또한 특기할 만하다. 한글장 편소설은 작품의 배경을 가정과 가문으로 한정하고 있는바 가족 관계로 그 범위를 제 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고려해야 할 지점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처첩제의 존재 를 고려하면 같은 여성 사이에서도 지배―피지배 관계를 상정하기 어렵지 않다. 조선 사회가 첩에 대한 정처의 상대적 우위를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가내에서 정처의 지위가 높았는가는 단언할 수 없다. 몇몇의 기록에서 양반 남성이 가내 정처 의 지위를 보호하는 데 힘쓴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여성의 절대적인 처우에 신경 쓴 결과라기보다는 무리 없이 첩을 들이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 능하다.40) 처첩 사이에 신분상의 상하 관계가 존재했고 이는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었 지만, 사족 남성의 권한(소유물)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게 취급되기도 했다.41) 첩의 경우에도 ‘양첩’과 ‘천첩’ 사이에는 법적 차별이 존재했다.42) 서모(庶母)는 엄연히 아들 을 둔 아버지의 첩인 경우에도 모친의 예로써 대접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소현성 록>에서 서모 석파에게 예를 잃지 않는 소현성의 면모가 유독 부각되는 것은 이와 같은 현실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여성이 가장으로 행세하며 더 큰 영향력을 발휘 하기도 하고, 가부장으로 인정받은 존재도 어머니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소현성 록>에서 양부인은 여성이지만 가내에서 지존(至尊)으로 존재한다. 가내의 인물들은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장편소설에서 자행되는 개인의 폭력을 곧바로 구조적 폭력으로 이해하 는 방식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작품이 그리는 폭력의 실상을 포착해내기 위해서는 폭력의 주 체와 대상이 맺는 관계, 이에 대한 주변인물의 시각, 서술자의 평가와 태도 등을 통해 총체적으 로 접근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구조의 문제를 내면화한 개인이 폭력을 저지르는 현상을 포착하고 이에 대한 성찰을 동반할 때, 비로소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인 식이 이뤄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0) 이 점에 대한 논의로는 정지영, 조선 후기의 첩과 가족 질서―가부장제와 여성의 위계 , 사 회와역사 65, 한국사회사학회, 2004 참조.
41) 정지영에 의하면 간통이나 강간과 같이 여성의 성적 문제와 관련한 남편의 권한을 정할 때
‘처첩’은 동질적으로 간주되었다(정지영, 조선시대 첩에 대한 포섭과 배제의 장치들―법전류의 첩 관련 규정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19.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9, 73-76면).
42) 대전통편 형전 에는 ‘천처첩자녀(賤妻妾子女)’ 조항을 따로 두었다.
이하 경국대전 , 수교집록 , 대전통편 등 조선시대 법령자료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시 대법령자료(http://db.history.go.kr/law/)”를 참조하였다.
행동의 준거를 그의 평가와 판단에서 찾는다. 그런데 가부장제가 보호하려고 했던 것 이 ‘가부장’ 혹은 차세대의 ‘가부장’이며 소외된 것은 여성들뿐이었다고 단순화한다면, 작품 속에서 자질을 시험받으며 고통 받는 남성 주인공들의 삶은 설명될 길이 없다.
<유효공선행록>에서 유우성이 부친 유연의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그의 광 패한 성격이 곧 가부장의 자질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부친의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당대의 제도와 구조를 한글장편소설이 얼마나 유념하고 있었는지도 확언할 수 없 다. 상층 남성이 하층 여성을 겁간하는 행위는 당대에도 법적 처벌의 대상이었으나,43)
<소현성록>에서 소운성은 소영을 강간하고도 당당하다. <명주보월빙>의 정세흥 역 시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형벌의 적용에서 ‘공적 처벌’을 원칙으로 하고 있 었지만,44) 한글장편소설에서 개인적으로 보복을 하거나 사적으로 화해에 이르는 장면 은 흔하게 보인다.45) 소설에 나타난 구조적 폭력의 문제는 몇몇 제도의 존재를 의식 하는 것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갈퉁이 예술이나 언어, 사상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 ‘문화적 폭력’을 언급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46) 로제 다둔 역시 예술 작품에 형상화된 폭력의 여러 양 태를 고찰하고 궁극적으로는 예술이 “폭력적 인간의 가장 확실한 지원자가 아닌지”
물은 바 있다.47) 갈퉁에 따르면 문화적 폭력은 구조적 폭력을 합법화는 수단이나 그 내용을 말하므로, 예술작품뿐 아니라 사상서나 규범서, 교육 등도 해당된다. 문화적 폭력은 개인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직접적․구조적 폭력을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거나, 혹은 그것의 존재를 아예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48)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하면, 한글장편소설이 어떻게 개인적․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 고 있는가 하는 문제, 즉 그 ‘문화적 폭력’으로서의 성격에 더 큰 관심이 간다.49)
43) 장병인은 조선전기 강간범죄 처벌의 실제를 고찰하면서 지배층 남성이 관비, 사노의 처, 사노 의 딸 등을 강간했을 때 감형을 받은 경우가 많긴 하였으나, 부처(付處)형을 받기도 한 예가 있 음을 지적한 바 있다(장병인, 조선전기의 강간범죄―처벌사례에서 나타나는 위정자의 인식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50, 역사학회, 1996, 112-115면).
44) 장병인, 앞의 논문, 2001, 243면. 물론 간통 현장에서 발각된 남녀를 죽인 남편의 경우, 남편의 원수를 살해한 부인의 경우 등에는 감면을 한 기록이 있어 사적 복수가 일부 용인된 정황이 포 착되기도 한다.
45) 이익은 ‘사화(私和)’의 행위가 곧 ‘패교(敗敎)’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원수의 집에서 뇌물을 받고 사건을 은폐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을 사화(私和)라고 한 다. 자제(子弟)로서 부형의 원수를 보복하지 못하니, 교화(敎化)의 퇴패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 다(故受賄扵仇家而故脫之謂之私和, 子弟而不報父兄之仇, 敗敎莫大也).” (이익, 성호사설 권11 인사문 살인법 ). 번역문은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에서 가져왔다.
46) 요한 갈퉁, 강종일 외 옮김, 앞의 책, 84면.
47) 로제 다둔, 최윤주 옮김, 앞의 책, 13면.
48) “문화적 폭력은 직접적․구조적 폭력을 올바른 것으로서 또는 적어도 잘못된 것은 아닌 것으 로 보이게 하거나 심지어 느껴지게 만든다. (중략) 그 심리학적 메커니즘은 내면화이다(요한 갈 퉁, 강종일 외 옮김, 앞의 책, 4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