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武臣執權期의 문학적 전환
○趙潤濟는 이 시기를 「武官의 執政과 民 族意識의 睡覺」이라 하였다. 근 30여년 간의 대몽항쟁을 민족의식이 잠깬 빛나는 기간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조의 건국과 함께 15세기에 이루어진 왕성한 민족문화의 창조적 업적들을「민족의식의 각성」에 바탕을 둔 것 이라고 보는 조윤제의 역사인식에 연관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무신집권기와 고려 후기의 국문학을 서민계급(상층)의 장가(속요, 속악가사)와 귀 족(사대부)계급(하층)의 경기체가로 문학의 성 격을 양립적으로 파악하는 성과를 보였다. 거 기에다 시조와 설화의 발생, 한문학의 난숙을 이 시대의 문학내용으로 들고 있다.
○현재는, 특히 한문학에 있어서 무신집권기 를 귀족문학과 사대부문학의 분기점으로 보게
되었다. 고려 전기의 귀족문학과 그 이후의 사대부문학이 모두 지배계급의 문학이라는 점 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문학담당층이 문벌귀족으로부터 신흥사대부로 바뀜에 따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 오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곧 문학의 전환점을 가 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전개와 함께 민족의식이 성장하고, 문학담당층이 교체되고, 세계관이 바뀌면서 삶의 총체적인 변화에 따 라 문학은 새로워진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확인되어야 할 문제의 하나는 문학담당층인 문인지식 계급만이 아니라 농민 등 일반 민중 의 역량과 의식의 성장이 또한 그 시대문학의 발전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太平好文之王 의종(毅宗) 24년(1170년), 鄭仲夫의 난, 명종 3년(1173년) 金甫當의 난—
의종 복위운동의 실패, 명종 6년(1176년) 공 주 鳴鶴所의 亡伊 亡所伊의 난, 신종(神宗) 원 년(1198년) 사노 萬積의 난
※李義方(1170)-정중부(1174)—경대승(1179) –李義旼(1183)-최충헌(1196)–崔瑀(崔怡,1219) –최항(1249)–崔竩(1257)-金俊(1258)-林衍, 林惟茂(1268)--1270(고려 원종11년),개경환 도
※毅宗-명종-신종-희종-康宗-고종-元宗-충렬 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숙왕-충혜왕-충 목왕-충정왕-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1392)
※○죽림칠현 : 중국, 위진남북조(6조)시대 완적(阮籍), 유영(劉伶), 혜강(嵇康), 산도(山
濤), 상수(向秀), 왕융(王戎), 완함(阮咸)
※○죽림고회 : 고려, 李仁老, 吳世才, 林椿, 趙通, 皇甫沆, 咸淳, 李湛之, 이규보는 오 세재가 東都로 가서 오지 않자 입회하라는 청 을 거절
○「文冠을 쓴 자는 胥吏도 남김없이 죽이 라.」고 하면서 두 차례에 걸친 문신의 대량 학살을 감행한 鄭仲夫의 난은 필경 「三京 · 四都護· 八牧으로부터 전국의 郡縣 · 館 · 驛 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리에 武人을 임 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차차 사정은 달라져서 행정을 담당할 새 로운 文 · 史의 기능인이 필요하게 되고, 이와 함께 과거(戶長, 首吏에게도 자격)도 계속 실 시되었다. 더구나 崔忠獻이 정권을 장악하면 서부터 이러한 사정은 더욱 진전되어 지방에 숨어 지내던 지난날 官人들이 다수 재등용 되 고 새로 진출하는 文士들의 수도 점점 늘어나
게 되었다. 무신집권기의 이러한 문인지식층 의 동향을 그들의 정치·사상·성격에 따라 분류 해 낸 李佑成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간명하면 서도 주목을 끌게 한다.
⑴ 鄭仲夫亂初에 진작 도피하여 儒冠을 벗어 던지고 삭발 爲僧하여 명산을 두루 방랑하거 나 한곳에 安住하면서 세상이 다소 달라진 후 에도 끝내 還俗하지 않고 遁世無悶으로 일생 을 마친 사람들로 神俊 · 悟生과 같은 이들이 있다. 神駿 · 悟生 은 高麗史에 나타나지 않고 다만 破閑集 · 西河集 · 櫟翁稗說 등 文集 詩 話類에 보일 뿐이다. 그의 성명도 알 수 없다.
神俊의 호는 白雲子로서 公州에 가 있었고 悟 生은 伽倻山에 있었던 것이 알려지고 있을 뿐 이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당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節操는 많은 사람들에게 높 이 慕仰되었던 것 같다.
⑵ 역시 亂初에 피신했으나 儒冠을 버리지 않
고 지방에서 유학을 닦으면서 處士생활로 일 생을 보낸 사람으로 權敦禮와 같은 이가 있 다. 權敦禮는 御史를 지낸 官人이었지만 高麗 史列傳에 이름이 없다. 현재 林椿의 문집에 權에게 보낸 서한이 실려 있고 朴仁碩의 墓誌 에 權의 字가 실려 나오는데 그 字는 不華라 고 되어있다. 그는 原州에 은거하여 다시 세 상에 나오지 않았으나 그의 淸名은 당시 利錄 에 분주하는 俗儒들에게 멀리 美望의 的이 되 었던 것이다.(6-1)
⑶ 亂初에 피신했다가 세상이 약간 달라진 후 에 수도 開城에 와 관직을 구했으나 여의치 않아 불우하게 일생을 보낸 사람으로 林椿과 같은 이가 있었다. 林椿은 난 발발과 함께 그 의 一家가 화를 입고 그는 겨우 피신하여 영 남지방으로 유랑하다가 뒤에 개성으로 와서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자기의 등용 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실의와 飢餓로 早死했는데 그가 죽고
나서 崔怡는 그의 문집에 특별히 발문을 써주 고 널리 印布하게 하였다.
⑷ 亂後 얼마 안 되어 과거로 發身했거나 최 씨정권 이후에 등용되어 崔氏의 門客이라는 평을 듣게 된 사람으로 李仁老 · 李奎報와 같 은 이들이 있다. 李仁老 · 李奎報는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유명 문인으로 그의 행적은 너무 나 잘 알려져 있으며 또 崔氏정권에 협력한 많은 人士들이 모두 이 유형에 속한다.
⑴과 ⑵그룹은 그 수에 있어서 지금까지 그리 많이 조사 발굴되지 않고 있을뿐더러 남긴 글 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들은 무신 정권과의 타협을 끝내 거부하고 현실권 밖에 서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깨끗한 일생을 살아갔으며, 지방에서 후배를 길러내어 그들 로 하여금 고려 후기의 新興士大夫階級의 주 류를 이루게 했다. 이들은 현실권을 떠남으로 써 오히려 참되게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있
었던 것이다.
○네 개의 유형 가운데 특히 ⑷그룹에 주목 하게 된다. ⑶그룹이 吳世才 임춘 등 「죽림 고회」의 중심인물들로서 현실권을 스스로 벗 어나지도 못한 채 실의와 좌절의 생애를 마치 는 유형이라면 무신집권기부터 역사무대의 전 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新進士人層」은 바 로 이 ⑷그룹에 속하기 때문이다.
○「죽림고회」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江 左七賢의 風流를 愛慕하여 花朝月夕에 詩酒로 相携」하면서「山林에 隱淪」하기를 일삼았다 는 金台俊의 해석을 필두로 하여 대부분의 문 학사가 이와 흡사하게 서술되어 왔다. 최근의 국사개설서에까지도「현실을 도피하여 산림에 묻혀 음주와 詩歌를 즐기거나, 정권을 멀리하 여 淸談의 風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 고 있다. 죽림칠현과 흡사한 일종의 현실도피 그룹으로 보아온 것이다.
○이러한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가 수정되었 다. 이인로 오세재 임춘 등 중심인물은 대개 몰락한 고려전기의 문벌귀족 출신으로서 「현 실에의 적극적인 진출을 꾀했으나 항상 좌 절」되었고 따라서 「대개는 불우한 생애를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서, 「반항성」
을 띤 그룹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라도,「도피 성」을 띤 結社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결론 이었다. 그 이유로서, 그들은 ⑴ 立身行道의 유교사상을 기본교양으로 하였고, ⑵ 경제적 으로 宦路진출이 생활 보장상 필요한 처치였 으며, ⑶ 출신성분(家統)에의 사명의식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인로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갈 래로 진행되어 왔다.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비평적 저술이라고 하는 <破閑集>을 중심으로 그의 詩話를 분석하는 작업과 그의 문학성격 을 검토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이인로가 무신
란으로 몰락한 구귀족에 속하는 인물이고 이 규보가 무신란과 함께 대두하기 시작한 새로 운 계층에 속한다는 데 더 큰 비중을 둔 것이 었다.
○「新進士人」이란 대개 지방에서 신흥한 중소지주층 출신으로, 首都 王城 속에 전통적 생활기반을 가져왔던 고려 전기의 귀족계급과 는 여러 모로 성격을 달리한 사람들이다.(富者 는 連川連脈하고 貧者는 無立錐之地라---崔 瑀 晉陽公) 왕조에 기생하는 귀족 관인층이 아니라 전시과체제의 분해과정 속에서 사유지 를 가지기 시작한 지방토착세력이라는 새로운 경제관계를 발판으로 하였고, 「能文能吏」의 실무적 기능을 갖춘 새로운 사람들이다. 처음 이들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으나 무신정권 아래에서 자기의 문학으로 무신에게 봉사하면서 보호 육성되어 왔다. 이 들이, 무신정권이 넘어지고 점차 그 정치적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드디어 고려 후기의 신
관료―사대부계급으로 발전해 갔다. 그들은 왕조에 기생하는 귀족문신들에 비하여, 자기 의 토지를 발판으로 가진 「관료적 학자」
「학자적 관료」로서 생활에 있어서 훨씬 주 체적이며 전진적일 수 있었다.
※○고려사절요, 권18, 元年 癸酉
崔怡 :<以能文能吏爲第一 文而不能吏 次之 吏 而不能文 又次之>(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