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 은 글 긴 생 각
4
주
일학교에 다녀온 뒤부터 아들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수저를 들기 전에 두 눈을 감고 짧게 무어 라 중얼거렸다. 늦둥이로 태어난 데다, 발육까지 늦은 아들은 밥을 잘 먹지 않는다. 어쩌다 먹을 때 는 제대로 씹지도 않고 폭식을 한다. 편식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떤 날은 매운 반찬만 먹고, 또 어떤 날은 소 금을 집어먹기까지 한다. 그런 아들이 식탁에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이 여간 기특한 것이 아니었다.어느 날 아들에게 물었다. “밥 먹을 때 하나님 생각을 하니?”“아니요.”“그럴 거야. 아빠도 밥을 먹으면 서 벼를 키운 농부나, 배추를 시장까지 실어 나른 트럭 운전수 아저씨를 떠올리지는 않아.”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밥을 먹고 나서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게 어떨까. 그랬다. 정작 배불리 잘 먹었다면, 식사 전은 물론 식사 후에도 신과 우주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몇 년 전, 지리산 기슭 실상사에 갔다가 공양간(식당) 배식대에 붙어 있는 공양게송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든 적이 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마음의 온갖 욕심버리고/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보리를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스님들은 소리없이 음식을 들었고, 밥 한 톨 남 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식사 전이나 식사 후에 감사의 기도를 올릴 것이 아니었다. 밥 한 술 입에 넣으 면서, 반찬 하나 집어들면서, 귀한 먹을거리들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기까지 과정을 떠올려야 했다. 우주 전 체가 참여한 결과가 음식물이었다. 생산지에서 식탁에 이르는 길 또한 길고, 여러 갈래였다. 무수한 인력과 시스템이 음식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밥 먹는 행위 자체가 경건한 기도였다. 우주를 내 몸 안에 모시는 것이었다.
일찍이 나는‘예언’한 바 있다. 문명이 바뀌는 장소, 그러니까 문명사적 전환점은 다름 아닌 우리의 식 탁이라고.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이 음식이 어디서 오셨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달라질 것이다. 우 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론적 인식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식탁이다. 우리가, 우리 후 손이 더 이상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캐물을 것이다. 왜 이 런 사태가 일어났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식탁에서 일어나게 될 변화는 본질적이고 광범위하고 지속적 일 것이다. 음식이 식탁에 오르는 길이 투명해질 때까지, 우리 몸에서 나간 배설물이 가는 길이 마침내‘순 환의 질서’에 다시 편입될 때까지.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지구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까지.
그런데 걱정이다. 수저를 들 때마다 음식의 원산지와 재배방법, 가공방식, 이동경로, 유통기한 따위를 캐묻는다면, 소화기 계통이 온전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특히 외식을 할 때에는 신경쇠약에 걸릴지도 모 른다. 여간 만한 딜레마가 아니다.
이문재|시인,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